-사랑하는 아버님께 세쨋딸이 편지합니다-

  아버지!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여곡절 속에서 올해가 아버님의 ‘구순’이 되는 해입니다. 진심으로 아버님의 ‘구순’을 축하 드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평강 속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날(!)이 되기 전에 부지런히 오늘도 아버님을 찾아뵙습니다. 등 떠밀려온 세월의 바람 속에 마냥 어린아이 짓만 하던 아빠의 딸도 금빛 햇살 에 은빛 머릿카락 하나 씩 흩날리는 인생 서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철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이 편지는 수십 년 전 러시아로 단기 선교 갔다 온 후에 처음 쓰는 편지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 제 기억 너머에 늘 자상한 아빠로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일 학 년 입학 전 장화를 선물해 주시면서 올바르게 신도록 신발 신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요. 하지만 제 기억에는 말표 장화 양쪽 상단에 말이 붙여 있어 발 모양에 신은 것이 아니라 말표 양쪽 상단에 붙여진 상표를 보고 신었던 기억이 있고, 일 학년 가을 학기에는 어떻게 아셨는지 수업시간에 딱 맞게 빨갛고 노란 단풍잎과 은행잎 등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빨갛다 빨갛다 단풍잎이 빨갛다/ 노랗다 노랗다 은행잎이 노랗다~] 초등학교 다닐 때 산수를 친구와 함께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셨지요. 또한 중학교 시절에는 일어와 한문을 가르쳐 주셨던 기억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늘 자상했던 모습을 생활 속에서도 나타내셨지요. 제가 학교에서 새 학기가 되어 책을 받아오면 언제나 예쁜 포장지를 준비하시어 책을 곱게 싸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까지도 한 권, 한 권씩 책을 싸 주신 후 표지 앞면과 옆면에 이름을 써 주셨던 기억입니다.   한 번은 시험 공부를 위해 누런 백지를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학교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았더니. 어느새 검은 표지를 준비하시어 묶어 놓으셨더군요. 친구들은 아버지의 자상함에 “너는 자상한 아빠를 두어 행복하겠다.” 참으로 부러워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어린 시절, 아버님은 저에게 한 번도 야단친 적이 없으셨던 기억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의견을 늘 존중하셨던 기억 입니다. 오히려 시험을 못 봤어도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다. 다음 기회가 또 있지 않니!”라고 격려하며 다독이셨지요. 하지만 저는 제 아이들에게 자상하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늘 아이들에게 엄격하기만 하여 자책의 소리가 심연에 부메랑 되어 저를 일깨웁니다. 오늘도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 있는 모습에. 그만 못 견디어 “게임 그만두지 못하겠니!”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답니다. 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것인지... 스스로 모든 걸 잘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맘 때문인지. 기다려 주지 못하고 늘 조급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다못해 제가 어릴 적, 이불 속에 누워서 책을 보다 눈 시력을 훼손 시킨 탓에 그 반사 작용에 그런지, 다른 부모들은 자녀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제발 책 좀 읽으라고 하는데 저는 막내가 노트북으로 책 보는 것도 못 견디어 합니다. 눈 시력 버릴까 안달하고 있네요. 사실 마음이 힘든 것은 눈 시력은 고사하고 숙제도 안하고 책만 읽으려 하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미국 사회 일원으로 살고 있기에. 회초리를 들 수도 없어, “너, 숙제 했니, 안 했니”로 소리만 점점 커져 깡패 엄마가 따로 없다 싶답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한국 사회에서 살았을 때도 회초리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처럼 잘못하면 야단도 치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그러지 않으시고 항상 제 의사를 존중했었지요. 그런데 사실 처음 고백하는데요. 사춘기 시절에는 그것 조차도 제게는 불만이었던 기억입니다. 사춘기를 조용하게 보냈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게도 못된 모습이 있었네요. 행복에 겨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바로, 모든 것에 만사 오케이! 그런 것이 불만이었답니다. 아버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딱 한 가지 제 주장에 대해 반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 이민이었습니다. 미국에 남아 있는 것도 아버지의 만류挽留가 없었다면 지금쯤 한국에서 살고 있겠다 싶습니다. 

  아버지,  20여 년 전 미국에 왔을 때 일입니다. 제가 한국에 다시 돌아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때 제 나이가 마흔 살이었던 기억입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당부하신 말씀은 이곳에서 잠깐 고생하면 노년이 편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지요.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IMF, 후 폭풍으로 학교 프로그렘인, 방과 후를 학교에서 자체 운영하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학원들이 사장 길로 접어들어 운영하던 학원을 말아 먹은 게 억울하던 시기가 있었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올 때 프리미엄을 전혀 못 받고 넘기고 온 것이 너무 억울하였지요. 하여 영주권 받고 공부만 끝나면 한국에 다시 가고자 했던 때 였습니다. 

  그해 봄날, 아마도 이때 쯤 이었다 싶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지요. 그날 아버지는 극구 말리셨습니다. 아마도 그 문제로 엄마와 옥신각신하다가 ‘휭, 하니, 돌아서서 제 방으로 들어갔었답니다. 몇 시간 지난 후 답답하여 베란다로 가서 쉬려고 거실에 불을 켰지요. 제 기억에 베란다에 온열기가 놓여 있어. 그곳에서 치료하다 잠을 청하려 했던 까닭이었답니다.  불을 켜는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께선 그때까지 거실에 남아서 저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 하신 거라 싶습니다. 제가 불을 켜자 고개를 돌리 셨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님의 눈물을 보았던 기억입니다. 

  그때의 아버님   눈물이 제 가슴에 아로 새겨졌습니다. 그후 학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에 가려던 결심이 아버지의 눈물의 기억으로 봄 햇살 속에 눈 녹듯 녹아 미국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께서는 늘 저를 위해 기도하셨겠지만, 그날은 특별히 저를 위해 진심 어린 눈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싶습니다. 그 이후 모든 일이 휴지가 잘 풀려지듯 풀려 갔던 기억입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제 아이들에게 사랑과 기도와 격려로 이 시대의 꿈나무가 되도록 올바르게 키워야겠다고 마음으로 결심합니다.

  아버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요. 엊그제가 어머니 소천으로 장례식을 치른 것 같은데, 벌써 3주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버님도 비상 상태이셨지요. 일 년에 네다섯 차례 양로병원에 몇 개월 씩 입원하셨다 퇴원하시던 때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져 옵니다. 특히 작년 11월 말 경에는 행사 사회를 맡기로 되었는데, 퇴원 절차 밟아야 하는 날짜가 겹치게 되어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도 스쳐 지나갑니다. 다행히 양로 병원에 한 달간 모시게 되어 일이 순조로웠던 기억입니다. 병원 측에서 항생제 주사를 20일간 맞아야 한다기에 가디나에 사는 막내와 얼바인에 사시는 오빠의 도움으로 퇴원과 동시에 양로 병원에 갈 수 있었지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막무가내 안 가시겠다고 하시던 아버님께서 마음을 접고 한 달 동안 입원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었는지요. 덕분에 그 당시 며칠 동안 여러 가지 행사를 성공적으로 무사히 치를 수 있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님 소천 하시기 전에는 제가 늘 바빴던 기억입니다. 그 이유로 한 달에 서너 번 얼굴만 살짝 들여 내밀고, 먹을 것만 잔뜩 냉동고와 냉장고에 쌓아 두고 제 임무 끝낸 것처럼 행세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이에 살고 있어, 어머님 소천 후에는 거의 매일 찾아뵐 수 있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로 몸이 불편함에도 늘 식생활 습관과 시간 관리 잘하시는 모습에 감사와 찬사를 보냅니다. 또한, 저는 아버님을 늘 존경합니다. 오늘도 언제 모아놓으셨는지! 신문에 게재된 영문 수필을 책처럼 묶어서 제 아이에게 주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아버님은 자상하면서도 빈틈없으시군요. 제가 지나치는 말로 언제인가 “이 영문 수필 모아 제 아이에게 주면 좋을 텐데….”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고 책처럼 만들어 주시다니!! 그저 저는 감격 할 뿐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게 늘 자상한 아빠이십니다. 또한, 저희 자녀에게도 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신경써 주신 것 기억합니다. 양로보건센터에서 받아온 숨은 그림 찾기나 색칠하는 자료를 늘 주시며 하게 하셨죠. 아버님은 역시 제 아이들에게도 훌륭한 할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제 아빠여서 늘 감사합니다. 아버지, 올해가 ‘구순’이 되는 해입니다. 1927년 11월 24일 생 이시니요. 어제 한국에 계시는 언니에게 전화 왔었는데 제가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전화를 계속 연결해 보았으나 연결되지 않아 다시 연결 중에 있습니다. 언니도 뭐가 그리 바쁘신지...  지금 생각해 보니 [구순 잔치] 문제로 전화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 곁에서 사랑만 받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해 죄송하고 송구하네요. 역시 맏이는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저의 부족함에 다시 송구함을 느껴 봅니다. 하지만 편지를 쓰려고 자판을 두드리는데 이번 해가 아버님 [구순]이라는 것에 셋째 딸이 부끄러워 자라 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아직 생신이(구순) 몇 개월 남아 있어 다행이라 싶으며, 아버지, 진심으로 ‘구순’을 축하 드리는 맘으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사시는 동안 늘 건강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만이 가득하시며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를 늘 곁에서 매일 볼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드린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서기 2017년 5월 7일
                                                                                                                                                      세쨋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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