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안에서 자유함

조회 수 3328 추천 수 1 2016.09.30 07:47:34

진리 안에서 자유함

                                                     은파 오애숙

흰 엿가락 두 개
나란히, 나란히 눕히니
십 일자가 되었네

하나에다 하날 더하면
두 개가 되는 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이치나

녹여 붙이게 되면
하나 되는 이치를 모르고
그저 박박 우기고 산다

원칙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척박하고 삭막한가
진리가 자유 안에 있는데도


오애숙

2016.10.12 07:23:46
*.175.35.244

 진리 안의 자유함


성경을 보면 진리 안의 자유함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러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알게 하신 후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 대로 오랜 세월의 박해가 끝난 후,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일요일로 정한것은 안식후 첫 날 주님의 부활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예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기에 일요일을 주일 (주님의 날)이라 칭하게 된 것이랍니다.


예수님 당시엔 안식일에는 예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무엇이 중요함 가르쳐 주기 위해 친히 본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막 2:27,28)

   ============

금붕어에게 자유함은 언제 주어지는 것일까요? 금붕어가 어항 밖의 세계를 동경하며 나비처럼 잠자리처럼 창공을 날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생각과는 달리 막상 물을 떠나게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금붕어입니다. 그저 몇 번 퍼덕이다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뿐입니다. 금붕어의 자유함은 연못의 물입니다. 연못까지는 못 가더라도 어항 정도라도 괜찮은 것입니다. 금붕어는 헤엄치고 숨 쉴 수 있는 적당한 양의 물이 있으면, 나름대로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에게도 금붕어 같은 물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얼까요? 금붕어가 물 안에서 자유한 것처럼, 우리들의 삶이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물, 그게 무얼까요? 

오애숙

2016.10.12 07:25:15
*.175.35.244

우리들의 자유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창이 제대로 열리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진리 안에 서 있어야 비로소 자유함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마가복음 2장 24절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편견과 무지, 비판과 정죄의 칼날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자임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금식할 필요가 없는 신랑임을 그렇게도 드러내어 주었는데도, 저들은 예수님이 저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막 2:2:22), 이를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오애숙

2016.10.12 07:27:25
*.175.35.244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이란 그져 법만 따지려 드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안에 자유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여 매사에 율법적으로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자유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정죄하려 하기에 넉넉함이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빠진 함정이 이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을 정죄와 율법의 칼날로 세분합니다. 39개의 안식일 준수 율법을 만들고 그 항마다 각각 6개씩의 시행세칙을 만들어 사람들을 옥죄어 갔습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 덩어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짐지게 한 셈입니다. 그 중 하나가 안식일에 추수하면 안 된다.. 안식일에 정미소에서 곡식을 타작하면 안 된다.. 그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며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는 일을, 여기에 적용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이지요. 낫으로 곡식을 베는 것도 아닌데, 추수라고 뒤집어 씌우는 거지요. 배가 고파 비벼서 몇 알 먹는 것을 정미소 일이라고, 뒤집어 씌우는 거지요. 

오애숙

2016.10.12 07:35:52
*.175.35.244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온전히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린 자유함을 누리 수 있는 것이죠. 진리 안에서 자유을 누릴 수 있고, 다시 말씀드려 분별과 지혜로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지요.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아직 하나님을 몰라, 사랑도 없이 율법적인 잣대로만, 이런 일 저런 일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늪에 빠져 있지요.

 

둘째로, 우리들의 자유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의 어느 한 부분만 알면 편협한 생각에 묶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구약 전체를 통괄하며 알아야 합니다. 구약을 읽을 때는 신약의 시선으로 읽어야 합니다. 신약을 읽을 때는 구약의 배경과 역사를 감안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입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급되는 진리는 그러므로 융통성을 가지게 됩니다. 유연함을 가지게 됩니다. 넉넉함을 가지게 됩니다. 자유함을 가지게 됩니다. 설교만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깊은 성경적인 원리를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각종 삶 공부가 열려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단계별 삶 공부를 통하여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면서 신앙생활의 의문들을 그 때 그 때 해결해 나가야 눈이 밝아집니다. 영안이 열리고 분별의 지혜가 생깁니다.

     

오애숙

2016.10.12 07:42:16
*.175.35.244

안식일에 관하여 칡넝쿨처럼 얽혀 있는 율법의 사슬들, 무려 234개 조(39x6)의 세칙이 있었던 거죠. 밀이삭으로 가볍게 배고픔을 채우는 제자들의 일을, 여기에다가 억지로 거는, 이 사악한 공격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으로 반응하십니까? 다윗의 일행이 배고픔 때문에 허기를 채우던 성경 구절(삼상 21:1-6)을 인용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전; 성막 마당)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진설병)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막 2:25,26).

 

성경은 여기저기의 말씀들이 서로 합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밝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단도 성경을 제법 그럴 듯하게 인용하지만 편협하게 자기 좋은 대로 몰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의 음식을 고루 고루 먹어야 우리 몸이 건강해 지듯, 말씀도 두루 두루 먹어야 영적인 건강과 자유함이 주어짐을 명심하십시오.  

오애숙

2016.10.12 07:43:30
*.175.35.244

세째로, 우리들의 자유함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뜻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는지를 잘 알아야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은 단순합니다. 우리 인간을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복의 존재로 세우기 위하여 에덴 동산을 주시고, 천하 만물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를 우뚝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스리고 즐길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안식일을 정하시고 복의 날로 구별하여 주셨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이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나아가 새 하늘 새 땅까지 우리들의 새 에덴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간단명료한 결론을 들어 보세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의 손길을 움직이시다가, 이레째 날에는 창조의 모든 손을 멈추시고 쉬셨습니다. 하나님의 쉼이 있는 이 날을 하나님은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 2:3).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 돌판에서도,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중히 다루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출 20:8-11).

     

오애숙

2016.10.12 07:44:18
*.175.35.244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자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됨으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닮아가며 친밀한 관계가 늘 유지되어 가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당당한 선포를 들어 보세요.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막 2:28). 인자라는 말은 에스겔서에서는 예언자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이지만, 다니엘서에 와서는, 메시야를 특정하는 호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예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단 7:13,14).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인자이신 예수, 바로 그 분이 지금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사해 주시고, 사흘 후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사, 말씀으로 천하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다시 구름 타고 오실 재림의 날까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고 그 머리가 되셔서 성령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예수 부활 승천후,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에 의하여 주일로 대치되어 왔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안식일의 거룩함과 복됨이,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일로 합쳐진 것이지요. 안식일의 율법적인 준수는 주일 성수로 승화되어 신앙적 양심을 따라, 지난 이 천년 간, 아름답게 계승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그러므로 이제는 주일의 주인이시고, 주중 날마다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시며, 온 세상의 통치자요 주권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자유함의 뿌리요 반석이 되시기 위하여 주인의 자리에 견고히 서셨습니다. 망각하기 쉬운 이 위대한 질서를 늘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찬양과 경배의 채널을 만드셨습니다. 순종과 섬김의 채널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동행함과 친밀함의 채널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에 기쁨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이 때 놀라운 기쁨과 자유함과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요 그런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애숙

2016.10.12 07:45:23
*.175.35.244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삶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일은 구별된 찬양과 경배의 날입니다. 우리는 찬양과 경배의 공동체입니다. 섬기는 몸된 교회가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찬양과 경배의 약속된 시간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안전감과 자유함을 공급해 줍니다. 이 대열에서 이탈해 보세요. 불안과 염려, 두려움과 어둠이 우리를 공격하게 됩니다. 저는 믿음을 가진 이후, 주일날에 예배 드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고 기억합니다. 다른 일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주일은 온전히 주님께 바치며 살아갈 것을 다짐 또 다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일생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일 성수를 굳게 지켜 보십시오. 그 안전감과 그 자유함 위에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삶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일은 구별된 순종과 섬김의 날이기도 합니다.리는 순종과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사역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질서와는 상관없이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에 순종하고 헌신하고 복종해 보십시오. 헌신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들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죄악과 어두움에 묶여 있는 세상으로부터 사랑하는 이웃들을 탈출시키고 빛으로 인도해야 할 영적 싸움의 새로운 재무장이 예배를 통하여 주일 성수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랑의 섬김과 헌신이 주일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중보기도의 섬김, 정보 교환을 통한 섬김, 행정적인 체계와 준비와 광고를 통한 섬김, 주일 준비와 다음 주일 준비를 위한 섬김 등등. 병든 자와 가난한 자, 외롭고 힘든 자들을 섬기는 구별된 날이 주일이라 해도 좋습니다. 때로 즐거운 교제도 나누지만, 우리는 주일날 모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지체들의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듣고 보고 반응하는 거룩한 날로 이 하루를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공급하는 일, 믿음이 약해서 세파에 시달리는 분들을 견고케 하는 일, 악한 세상에 묶여 신음하고 탄식하는 가정을 위해 영적 전쟁을 함으로 섬기는 일 등등.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친밀한 삶을 살아갈 때 삶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일은 구별된 동행함과 친밀함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서실이요 캐비넷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비밀 모든 은밀한 지시가 늘 새롭게 우리를 향하여 떨어집니다. 그리고 무슨 보고도 다 드리고 해결함 받을 수 있는 특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대사로 하나님의 동역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헌신의 삶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할 때, 세상의 유혹이나 협박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할 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며 당당히 살기를 원할 때, 이를 위하여는 내가 우선 늘 먼저 주 안에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활짝 열려져 있어서, 무슨 대화이든, 무슨 고민이든, 무슨 요구이든 우리 주님과 가슴 속을 트고 나누는 그런 시간이 이 주일날 확보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소리지르며 부르짖으며 기도해 보는 것도 참 좋은 지혜요 기회입니다.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주 안에서 씨름 했던 나날들의 전과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간이 바로 이 주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주간의 일들을 주님께 맡기며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세상으로 가정으로 일터로 다시 파송되는 날이 바로 이 주일입니다. 헌신 시간에 앞으로 걸어나오며, 자유함과 기쁨으로 충만함 가운데, 헌신의 표시를 단호히 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이 주일입니다. 이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오애숙

2016.10.12 07:51:59
*.175.35.244

위의 글은 한기쁨 교회 박일우 목사님의 설교를 조금 수정하여 게재 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추천 수
5988 시)삶 5 [1] 오애숙 2017-05-23 3347 1
5987 백목련 2(시 3) [3] 오애숙 2016-02-07 3347 1
5986 무제 오애숙 2017-01-18 3338 1
5985 행복이란(시백과 등록16/5/30) 은파의 메아리 24 [2] 오애숙 2017-05-30 3331 1
5984 외면하고 싶은데 [1] 오애숙 2017-04-03 3329 1
5983 사랑으로 담금질하기 위한 회상 오애숙 2016-01-23 3329 4
» 진리 안에서 자유함 [9] 오애숙 2016-09-30 3328 1
5981 오애숙 2016-05-20 3326  
5980 나르샤하는 소망 외(당분간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이 곳에 올림을 양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애숙 2016-12-20 3320  
5979 그님 동행에(사진 첨부) [1] 오애숙 2017-06-06 3317 1
5978 팔월 광복의 물결로 핀 무궁화여(사진 첨부) 오애숙 2017-08-12 3315  
5977 칠월의 길섶에서 오애숙 2017-06-27 3314 1
5976 무제 오애숙 2016-09-28 3311  
5975 촛불 집회 2 외(당분간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이 곳에 올림을 양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애숙 2016-12-20 3306 1
5974 옛 그림자 부메랑 되는 유월(첨부) [1] 오애숙 2017-06-05 3302 1
5973 [1] 오애숙 2017-05-23 3297 1
5972 삶의 끝자락에서 나부끼는 공허/팔랑개비(바람개비) [2] 오애숙 2015-08-29 3297 4
5971 당신의 어린양/ 오애숙 2017-02-02 3293 1
5970 때론(사진 첨부) 오애숙 2017-06-05 3291 1
5969 문제의 분기점 오애숙 2016-05-26 3286  

회원:
30
새 글:
0
등록일:
2014.12.07

오늘 조회수:
12
어제 조회수:
59
전체 조회수:
3,119,801

오늘 방문수:
9
어제 방문수:
36
전체 방문수:
994,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