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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325 추천 수 0 2019.02.11 14:08:03
가슴 앓이 하지 마시고
발렌타인데이가 있으니
진실한 맘 표시 하세요
===============
그 마음을 한 송이 시로
빚어 드리오리다 공주님!
===============

봄바람 살며시 일 듯
그대로 인해 살짝쿵
미소짓는 마음의 창

해넘이 홍빛 물결로 
가슴에 스며든 이맘
진실로 사랑이런가

발렌타인데이 속에
내 그대에게 진실한
사랑을 속삭이리다 

솨랄라 솨라랄라라
사랑을 표현하세요
청초한 당신의 사랑

오애숙

2019.04.17 08:51:06
*.175.56.26

좋은 시란 무엇인가 - .좋은 시가 갖춰야 할 최상의 요건 / 김동원  시 창작의 구령소리

2014. 8. 18.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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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란 무엇인가

                                            - 김동원 (시인)

① 좋은 시가 갖춰야 할 최상의 요건

좋은 시란 무엇인가. 흔히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발견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응결 혹은 형상화의 미학이 돋보여야 한다. 가독성과 흡인력이 높은 작품이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의 나태한 일상을 흔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힘(낯설게 하기)”(미당문학상심사기준)을 꼽는다. 즉, 의식의 세밀함과 구성의 치밀한 짜임, 난해성이 주는 현학을 딛고, 현실 체험과 역사·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한 모어(母語)에 대한 말의 질서가 함부로 무시되지 않는 시가, 좋은 시가 갖춰야 할 최상의 요건이다.

②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발견과 성찰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 송재학,「공중」전문

 

송재학의「공중」은, 우주가 불러준 노래를 받아쓴 신(神) 지핀 영감의 시라기 보다는, 오히려 시 장인이 한 행 한 행 시어를 갈고 닦아, 사색과 관찰, 절차와 탁마로 빚은 빼어난 기교(技巧)의 시라고나 할까. 앞 시대의 현대시에서 빠진 세밀하고 미세한 언어의 감각과 숨결이 마치 시 행간 속에 잡힐 듯, 현미경적 사실감이 생동한다.「공중」은 2009년『문학동네』겨울호에 처음 발표되어, 2010년 계간『문학 사상』이 주관한 제25회 ‘소월 시 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송재학 시인은 특유의 언어 감각과 조사법(措辭法)을 바탕으로 시적 진술의 이완과 긴장을 동시에 포괄하는 산문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왔다. 이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풍부한 감성과 섬세한 지적 통찰은 산문체의 언어와 그 율조의 변화를 통해 다채로운 이미지의 조화와 균형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히 시적대상에 대한 시인의 생태주의적 관심이 그 존재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심사위원 평)

이 시의 관전 포인트는 “허공(虛空)”과 “공중(空中)”이란 시어가 갈마들며 풍기는 기막힌 뉘앙스이다. 사전적 의미의 허공은 ‘텅 빈 공중’을 뜻한다. 불교에선 ‘다른 것을 막지 아니하고, 또한 다른 것에 의하여 막히지도 아니하며, 사물과 마음의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공간’ ‘아무것도 없는 세계. 모양도 빛도, 아무런 사량(思量)도 없는 무위(無爲), 무루(無漏)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나 공중은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곳’이란 의미가 강하다.

먼저,「공중」이란 시 제목을 보자. 만약 ‘허공’이란 제목을 붙였다면, 굉장히 공허할 뻔 했다. 나는 백 번 이상 독시(讀詩)하며, 시행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왜 이 시인이 제목을「공중」에 낙점했는지 어렴풋 감(感)을 잡았다. 두 단어가 갖는 미묘한 차이를 시인은 직관하고 있었다. “허공의 입김”, “허공의 날숨”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듯, 허공이 만질 수 없는 ‘추상어’에 가깝다면, 공중은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 등에서도 짐작되듯, 촉각과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상어’에 근접한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제목’부터 성공한 셈이다.

시「공중」의 굴대는 역시,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이 표현이다. ‘허공’이라면 당연히 텅 비어 ‘색이 없다’라고 일반 독자들은 연상한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믿었다’란 단정적 과거형을 썼다. 이 역설이 독자들의 허를 찌르며,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는 발견과 성찰’을 촉발시킨다. ‘허공은 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라는 시적 화자의 강한 암시가 행간을 메우고 있다.

시를 쓰는 것은 낡은 인식의 틀 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시인은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비범한 눈이 있어야하며, “그 눈길이 가 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안도현)”을 길어 올려야한다. 그래서 시인은 비에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를 묘사하면서‘빈 곳에서 온’이란 시어를 따왔다.‘빈 곳’은 어느 지점 쯤 일까. 나고 가는 우리들 삶의 근원을 모르 듯, 새의 생 또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날아가는지 짐작만할 뿐이다. 그런 연유로 화자는“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라며, 쓸쓸한 자답을 한다.

시「공중」이 ‘허공’과 ‘공중’이란 실패하기 쉬운 추상적 공간을 끌어들였음에도 ‘좋은 시’의 전범으로 남는 것은, 추상적 이미지를 회화적 요소와 결합시킨 시인의 탁월한 안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지의 자연스런 연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렇듯, 한 뿌리인 시와 그림을 잘만 형상화 시킨다면, 아래와 같은 멋진 수묵화적 서정을 얻겠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란 시구도 기가 막히지만, 자칫,‘허공’과‘공중’속에 와해될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허공이‘쥐수염 붓’을 들고 그리는 듯한 착시효과를 준다. 먹물이 종이에 닿는 순간 먹물의 번짐으로 인해 생긴 발묵이라는 독특한 효과를 모래강가에 내려앉는 기러기와 노을로 병치시킨 행은 환몽적이다.‘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는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인 노을을 한 폭의 한국화로 오롯이 살려냄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극대화시켰다.

 

 

마지막 시행은 비경이다.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는 기발한 화두를 독자에게 던지더니,“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라는, 비답을 내린다. 천하에 그 누가 무(無)인‘공중의 안감을 보고’만져보았을까. 현대시사에서 송재학 뿐이다. 이것이‘시’이다. 시「공중」은 ‘잘 빚은’ 작품의 텍스트만으로도 눈부시지만,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를 끝 행에 박아둠으로써,‘곤줄박이의 개체수’의 증감을 통한 문명과 환경의 문제점까지 깊이 찌른 환유(換喩)의 시법은, 시어를 부려 쓰는 시인의 예리함이 끝까지 집요하다.

 

③ 응결 혹은 형상화의 미학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엄원태,「물방울 무덤들」전문

시 작법에 있어 객관적 상관물은 시를 이해하는 요체이다. 김기택은「시 창작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 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왜, 엄원태는 시,「물방울 무덤들」에서 자신의 정서를 대신할 ‘객관적 상관물’을 “물방울들”로 표현했을까. 시는 사건이 서사에 개입하는 순간 넓고 깊어진다. 나는 우연히 대구시인협회 주관으로 통영문학기행을 엄원태 시인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때까지「물방울 무덤들」이란 시는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름날 긴 소매를 걸친 것이 이상했지만,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쓴, 아주 노래를 잘 부르는 멋진 중년 교수시인쯤으로 알았다.

청마문학관 대청마루에서 음료수와 떡을 권하다가 얼핏, 그 분의 손등과 양팔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아니, 무참했다. 십 수 년 신장 투석으로 인한 삶과 죽음에 매일 직면한 엄시인의 처연한 삶을 그때 처음 목격했다. 링켈 주사바늘을 더 이상 찌를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시는 지옥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말한 15C 일본의 선승 잇큐의 하이쿠가 떠올랐다. 아무리 시인이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조차 없는 몹쓸 천명을 타고 났다 해도, 아픈 건 역시, 아픈 것이었다. 우주의 본질은 늘 현상 이면에 감춰져 있다. 시는 무의식에서 움터 불현듯 의식을 뚫고 꽃이 핀다. 엄원태의「물방울 무덤들」을 읽는 순간, 트라우마야 말로 시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물방울’을 시적 소재로 쓴 그 어떤 작품도「물방울 무덤들」만큼 ‘응결 혹은 형상화의 미학’에 견줄 만큼 성공한 예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당거리는 ‘물방울’의 비유적 이미지로 변용 수용된 ‘무덤’이란 시어는, 얼마나 슬픈 명구인가.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 맺혀 반짝이다가 /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라고, 1연에서 시적화자는 연민의 눈길로 ‘물방울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글썽인다’란 이 표현이 나의 폐부를 찔렀다. 시인의 자기 고독이 ‘물방울들’ 속에 절실하게 감정이입 되어 뭉클하다. 병(病)의 심장은 시의 고뇌가 가득 적혀 있다. 불행한 심장을 가진 시인의 현(弦)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주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결핍과 위급, 이것이야말로 시의 독이요 약이다. 병든 시인은 불행할지 모르나, 가장 슬픈 시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아무나 명시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시가 ‘하늘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엄원태의「물방울 무덤들」에서 보듯, 체험이 영감을 만나면 시는 폭발한다. 시인의 형벌 같은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시 행간에 화인(火印)처럼 찍혀있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 하지만 너는 /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아그배란 명사가 꼭 누군가를 애절히 찾는, 슬픈 이름 같다. 봄의 흰 꽃과 가을의 홍황색 붉은 쪼그만 배를 매달고 있는 아그배. 정지용의 옥천 생가 마당에도 달려 있던 그 아그배의 밑동을 툭 차면, 수천 개의 물방울들이 ‘쟁강쟁강’ 소리 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고 화자는 독백한다. 2연의 ‘쟁강쟁강’의 의성어는 이승에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시인의 숙명 같아 긴 여운을 남긴다. 왜, 글썽거리는 것들 속에는 유리우주가 들었을까.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표명 장력처럼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는’ 화자의 애처로운 모습 앞에, 나는 침묵한다. 마치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 다리 위에서의 부르짖는「절규」처럼, 죽음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시인의 비명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물방울 무덤들」처럼 절제된 시는, 섬광 같은 한 시구를 위해 시 행간의 팽창된 힘을 균형에 모아, 그 어떤 행간의 느슨함과 속임도 없이 본질을 향해 곧바로 일획을 찌른다. 삶은 어쩌면 그림자요, 죽음이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 너는, 하면서 /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 저 안에 이미 알알이 /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물방울 무덤’이란 제목도 서럽지만,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신산고초(辛酸苦楚)는, 어쩐지 이승 밖의 노래처럼 들린다. 말은 끝났어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좋은 시듯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매일 매일의 급박한 삶은, 인간 삶이 고해(苦海)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 시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웅얼거림이요, 겨자씨마한 언어 속에 우주를 능히 집어넣을 수 있는 오묘한 이치가 담겼다. 슬픔의 밑바닥을 훑다보면, 언제나 그곳엔 ‘물방울 무덤’처럼 진짜배기 시가 옹송그리고 쳐다보고 있다.

④ 가독성과 흡인력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 도종환,「멀리 가는 물」전문

현대시가 어렵다고 시 독자들은 불평한다. 해독 불가능은 차치하고, 난해하여 시 한 편을 온전히 읽는 것만도 힘들다고 토로한다.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좋은 시’는 우선, 읽기 편해야 한다(가독성)는데 동의한다. 언어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소통의 도구이다. 시인 역시 그 사회, 문화적 상황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듯, 작품을 통해서 자신이 의도한 바를 끊임없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좋은 작품 속엔 그 시인의 개인적 삶과 가치관, 세계관과 미적 눈높이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시는 읽자마자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져 저절로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즉, 서경과 서정이 감동의 꼭지 점에서 만나, 시의 ‘가독성과 흡인력’을 극대화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도종환의「멀리 가는 물」은 그 좋은 예이다.

시의 소재가 ‘물’이 등장하면 우선 ‘흡인력’이 배가된다. 대개 고대 문학에서의 “물(강물)은 인간이 만난 최초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강은 죽음의 상징이다. 기독의 ‘요단강’, 불교의 현세의 의미인 ‘차안(此岸)’과 내세를 가리키는 피안(彼岸)은, 모두 물의 상징이다. 강물은 시간적으로 보면, 흘러내려가고 흘러오는 생의 지속성과 순환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죽음과 영원한 생을 상징한다.”(이어령,『고전의 바다』)

우선, 도종환은 ‘강물’을 민중의 의미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또 ‘강물’을 인간 삶과 빗대 의인화한다.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노자는 ‘가장 선한 것이 물’이라고 했다. 그는 물을 인간 본성을 꿰뚫는 지혜로 파악했다. 산골짝 흐르는 물만큼 맑은 소리로 기분이 달뜬 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어린 시절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오줌 소리엔 개울물소리가 나나 보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고인 물은 죽음과 늪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자는 인간을 ‘물’과 동일시했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서로가 섞이면 혼탁해지게 마련이다. 개인이나 국가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개개의 물방울들이 모여 강을 이룬다. 범람하는 탁류 속에는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꿈틀거린다. 흐름이 멈추거나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죽는 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살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어디든 제 자리를 잡는다. ‘길 잃은 물’은 타인의 물과 뒤섞여 돌게 마련이다. 물도 독불장군은 흔적 없이 증발한다. 물은 인간 사회를 통해 어떤 때는 훌륭한 인물로, 때로는 악한 자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물이 탁한 사회는 언제나 악한 인물을 지도자로 뽑지만, 물이 맑고 밝은 건강한 사회는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 한다.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 먼 길을 가지 않는가 /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물이 병들면 지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시체에서 가장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공기와 물이다. 물은 순환하다 결국 물로 되돌아간다. 물도 감정이 있어 뒤틀려지거나 흐려지거나 하면 격렬하게 요동친다. 물론 그 끝은 고요하다. 물은 세계의 모든 진동을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 생명은 물의 파동에 의해 움직인다. 물 역시 생각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에모토 마사루는 물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아름다운 결정체로 미소한다고 했다. 물질적으로 볼 때 인간의 육체는 70%가 물이다. 최초의 양수 속 수정란 때는 99%가 물이다. 혈액의 83%, 뇌의 75%, 신장 83%, 피부의 72%, 세포는 90%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이 곧 피와 뼈, 100조의 세포를 생성한다. 알고 보면, 사람은 걸어 다니는 물이다.

시속 화자는 아무리 탁한 물이라도 끊임없이 정화하면 순해진다고 보았다.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것이 물의 생리다. 마치, 더러운 진흙물을 빨아올려 곱게 피는 연꽃처럼, 물은 스스로를 정화한다. 물은 기어서 가기에 편견이 없다. 이따금 제 몸에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국민을 상징한 물은, 독재자를 만나면 그 배를 뒤엎어 버리기도 한다. 세상이치가 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물은 합치면 오래 가고, 오래가면 반드시 갈라지고, 가득차면 흘러넘치고, 모자라면 채워지고, 일순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는” 물은, 개체이자 전체이다. 불이 수직을 강요한다면, 물은 수평을 유지한다. 불이 권력을 지향한다면, 물은 끝없이 평등을 추구한다. “같은 물이라도 하늘나라 사람이 보면 보석으로 장식된 연못으로 보이고, 인간이 보면 물로 보이고, 아귀가 보면 피로 보이고, 물고기가 보면 자기가 사는 세상으로”(법화경) 보이는 법이다.

간 사회란 실로 더러운 강물이 모인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바다에 이르면 또다시 깨끗한 물로 순환한다. 여자와 남자, 사람과 사물이 서로 이끌리는 것도 똑같은 물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지구 속의 바다가 우주 밖 소행성에서 물과 얼음덩어리가 날아와 고인 것이라고 보면, 물속에는 태양계의 46억년 우주 정보가 고스란히 저장된 셈이다. 도종환의「멀리 가는 물」은, 잠시 지구에 머물었다가 지구란 별이 소멸하면 이내 다른 별로 이동하는 물이 아니라, 역사의 탁류 속에서도 제 본성을 잃지 않는 도도한 ‘강물’로 상징된 ‘민중의 물’을 시로 형상화했다.

⑤ 낯설게 하기

해운대 백사장 여기저기에

얼굴들이

박혀 있다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머리통만 내놓고 온몸이 모래로 묻힌 사람들……

두어 삽 모래 끌어다 얼굴만 묻어버리면

주검―

영락없이 주검이겠다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모래 속에 누워

고요히 명상에 잠긴―

(오, 주검의 저 평온한 얼굴들!)

 

 

올 여름에도

해운대 백사장엔 인산인해,

벌거벗은 비키니 상주들과 문상객들이 어울려

웃고 떠들고 마신다 주검 곁에서

무더기 무더기 평토제 지낸 음식과 술을 나누고 수박을 쪼갠다

어이쿠 이놈의 염천지옥―

잘못 걸어가다간

덜커덩,

주검의 얼굴을 밟겠다

땅 밖으로 불거져나온 주검의 얼굴을 밟고 기절초풍하겠다

― 유홍준,「모래 속의 얼굴」전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친숙한 사물엔 주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중에 흘러가버리는 ‘죽은’ 사물이다. 죽은 사물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그걸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망각된 존재를 일깨워준다. 러시아 형식주의들도 예술로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낯설게 하기’ 사물을 낯설게 만들 때 비로소 인간은 거기에 주목한다. 이때 죽었던 사물들은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냥 보고 지나쳤던 사물들이 실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 존재인가!”(진중권,『미학오디세이 2권 중에서』)

 

시「모래 속의 얼굴」의 화자는 작품 밖에서 개입한다. 모래 속에 묻힌 “산자”를 “주검”과 바꿔놓음으로써 삶과 죽음의 공간이 역설적으로 ‘낯 섬’으로 다가선다. 오늘날 새로운 경향의 시가 전혀 동떨어진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파탄적 실험으로 치달아 독자들을 질식시킨다면, 유홍준의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2004, 실천문학사),『나는, 웃는다』(2006, 창비) 속의 일군의 시편들은 한국현대서정시가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짚었다. 향토 서정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로운 시선으로 내밀화함으로써, 읽히지 않는 난해성을 훌륭하게 극복했다.

바다가 삶과 죽음을 함께 포용하는 재생 순환 공간이라면, 해수욕장은 인간의 욕망과 배설을 쏟아내는 현실 공간이다. 우리의 인체는 폐쇄적인 사회와 같다. 끊임없이 다채로운 놀이를 통해 해방구를 찾는다. 발가벗기를 강요하는 바다는 아담과 이브의 자유 공간이자, 성(性) 해방의 혼돈 공간이다. 근래까지 서정시가 자연과 인간 내면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추구해 왔다면, 유홍준은 오히려 변화무상한 우연성을 통해 사물 속에 내재한 본질을 ‘역설’이란 시법을 통해 찾아낸다.

“해운대 백사장 여기저기에 / 얼굴들이 / 박혀 있다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 머리통만 내놓고 온몸이 모래로 묻힌 사람들……”

“좋은 시가 되고 못 되고는 착상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착상이 좋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착상이 평범하거나 상투적이면 그 시도 역시 그러할 것”(이승주)이다. 유홍준의「모래 속의 얼굴」은 ‘착상’에서부터 벌써, 기존 서정시의 인식을 확 바꾼다. 해수욕장에서 흔히 보는 모래찜질 풍경을 ‘지뢰처럼 매설’ 되어있다 라고 뒤집어 본 시선처리는 환상적이다. 독시자의 ‘관습과 상투의 의표’를 찌른 세계에 대한 시적 통찰은, 유홍준의 시적 내공이 정점으로 팽창함을 엿보게 한다.

“두어 삽 모래 끌어다 얼굴만 묻어버리면 / 주검― / 영락없이 주검이겠다 //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모래 속에 누워 / 고요히 명상에 잠긴― // (오, 주검의 저 평온한 얼굴들!)”

흔히, 타인의 생각이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을 ‘공감’(共感)이라 하고, 어떤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감응(感應)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감과 감응은 슬픔이나 고통의 상황 속에서 사물과 자연물 그리고 다른 세계의 존재와의 사이에서도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산자의 얼굴을 그대로 묻으면, ’영락없이 주검’이다. 삶은 근본적으로 죽음의 다른 얼굴이다. 모래 속에 묻혀있어도,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주검의 저 평온한 얼굴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삶의 세계이자 동시에 시적 표현의 영역임을 공감한다. 물론, 공감에서 한발 짝 더 나가면 그렇다. 예술은 견자(見者)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시 작품의 감상과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벌거벗은 비키니 상주들과 문상객들이 어울려 / 웃고 떠들고 마신다 주검 곁에서 / 무더기 무더기 평토제 지낸 음식과 술을 나누고 수박을 쪼갠다 // 어이쿠 이놈의 염천지옥― / 잘못 걸어가다간 / 덜커덩, / 주검의 얼굴을 밟겠다 / 땅 밖으로 불거져나온 주검의 얼굴을 밟고 기절초풍하겠다”

「모래 속의 얼굴」의 시적 화자가 가리키는 궁극은 무엇일까. ‘벌거벗은 비키니 상주들과 문상객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통해 생사(生死)의 일탈을 꿈꾼 것은 아닐까. 기존의 획일된 서정의 시관(詩觀)으론 도저히 형상화시켜낼 수 없는 시가「모래 속의 얼굴」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

단도직입하면, 유홍준은 고전서정시의 코드를 현대서정시의 코드로 멋지게 변환시킨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킨 독창적 서정 시인임에는 틀림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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