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⑥] 가수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는 하늘이 내린 선물”
최백호(61)는 가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를 라디오 DJ로 더 알아준다. 그가 진행하는 ‘최백호의 낭만시대(낭만시대)’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가들을 위한 콘테스트 ‘색소폰, 인생을 연주하다’를 시작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다. 강호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색소폰은 최백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와도 잘 어울린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최백호는 1977년 어머니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했다. ‘가을엔~ 떠나지 마세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노랫말은 30년이 넘은 지금도 가을 타는 남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최백호는 아주 ‘낭만’적인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베이지색 진에 갈색 구두, 진녹색의 재킷, 하얗게 센 머리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떠오른다. 짙은 경상도 사투리엔 바다냄새가 스며 있었다.
▼ 선생님은 가을에 뵀어야 하는데….
“좀 그런 느낌이 나지요? 성격은 안 그런데, 하하.”
▼ 요즘 ‘낭만시대’가 화젭니다. 색소폰 때문에.
“예. 요즘 색소폰이 상당합니다.”
▼ 하고 많은 악기 중에 왜 색소폰입니까.
“(색소폰 부는 흉내를 내며) 폼이 멋있으니까. 대단한 분이 많습니다. 이번 주엔 여성분이 1등을 했는데, 50대 중반 되신, ‘베사메 무쵸’를 아주 기가 막히게….”
▼ 하여튼 생각지도 않게 라디오에서 히트를 하셨어요.
“방송국에서도 한 1년 생각하고 맡긴 것 같은데…, 실험적인 케이스로. 그런데 저는 길게 갈 줄 알았습니다. 벌써 3년이 됐지요. FM 103.5Mhz에서 지금 최장수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짤렸는데(웃음).”
▼ 선생님은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원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려고 그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 가세가 기울어서?
“어머님이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셨어요. 그 수입으론 누나와 제가 대학에 못 가죠. ‘다음해에 대학 가라’ 그랬는데, 제가 스무 살 때, 재수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그냥 멍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러다 군대에 갔지요.”
참고로, 최백호의 부친은 29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국회의원(2대 민의원)에 당선됐던 최원봉이다. 최백호가 태어나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길을 갔다. 6·25 전쟁 당시 북진하던 연합군(터키군) 트럭과 최원봉이 탄 지프가 충돌하는 사고였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정치적인 암살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가족들은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 그럼 노래는 언제부터….
“군대도 결핵으로 의병제대했지요. 1년 만에. 나오니까 뭐, 아무 기술도 없지요. 친구들하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건 좋아했지만, 직업이 될 정도라고는 생각 못 했지요. 친구의 매형이 부산 서면에서 통기타 업소를 차렸는데, 이름이 ‘나들이’인가? 거기서 가수들 노래하는 거 보니까 ‘야, 저 정도면 나도 되겠다’ 싶더라고요.(웃음) 생활도 어려운데 그냥 ‘해보자’ 그랬죠.”
▼ 그림은 포기하시고?
“사실 중학교까지는 열심히 그렸는데,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안 했지요. 고등학교도 가야고등학교라고, 어머니가 어거지로 넣어줬는데, 그땐 이름도 가야가 아니고 항도고등학교, 3차 학교였어요. 탁 들어가니까 정말, 굉장히 독특해요.”
▼ 뭐가요?
“복싱하는 놈이 없나, 깡패들 다, 부산에서 유명한 애들 다 모여 있고.”
▼ 다니긴 다니셨어요?
“중간에 다니다 말다, 졸업하기 6개월 전에 다시 들어가서 졸업장은 받았어요. 졸업식엔 안 갔는데, 어머니가 교문 앞에서 졸업장 들고 만세를 부르셨다고(웃음).”
▼ 대학시험은….
“공부는 안 했어도 그림에 대한 어떤 그런 건 있었는데, 미대를 가겠다는. 근데 저희 때부터 예비고사가 시작된 거예요, 학력고사. 운 나쁘게, 예비고사 치러 가보니까, 뭐 시험지 받아보니까, 아는 건 하나도 없고,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와 버렸어요.”
▼ 예비고사 보다 말고?
“하나마나다 생각해서. 그러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관뒀어요. 당장 잘 곳도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최백호는 길에 나앉았다. 그는 당시를 ‘완전제로’라고 표현했다. 밥만 먹여준다면, 뭐든 다 했다. 부산 서면에 있던 동보극장에 들어가 극장 간판 그리는 일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간판 그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래 시작한 뒤로는 운이 좋았어요, 지금도 운이 좋지만. 부산에서 한 1년 반 정도 하다가 바로 서울로 올라왔고요. 같이 노래하던 친구하고 남영동에서 하숙을 했어요. 여기저기서 노래 부르면서.”
8만장 팔린 데뷔곡
▼ 어디서 노래를 하셨어요?
“명동 음악카페, 그 당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불렀던 하수영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수영씨한테 노래하는 법, 악보 보는 법 같은 걸 배웠어요.”
▼ ‘젖은 손~이 애처로워’ 그 노래?
“예, 맞아요. 그 노래가 히트한 다음에 전화가 왔어요. ‘시간 나면 올라와라, 서울에’. 그래서 올라왔지요. 하수영씨가 서라벌레코드사도 소개해주고, 거기 유명했거든요.”
▼ 바로 가수가 된 거네요.
“그 레코드사에서 피아니스트였던 최종혁씨를 만났는데, 그분이 제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작곡하셨어요. 윤시내의 ‘열애’,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같은 곡을 쓴 분이에요. 그분도 그때는 무명이셨고, 그렇게 시작했어요.”
▼ 주변에 좋은 분이 많았네요.
“그래도 ‘아, 이게 천직이구나’ 이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는.”
▼ 왜 그랬을까요.
“그땐 노래가 막 좋아서 한 게 아니니까, 먹고살려고 한 거니까. 좀 알려지고도 노래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어요.”
▼ 데뷔곡(‘내 마음 갈 곳을 잃어’)부터 대박을 쳤는데….
“그 당시 한 8만장이 팔렸다 그래요. 엄청난 거죠. 근데 돈은 못 벌었어요.”
▼ 아니, 왜요.
“레코드사 사장님이 돈을 안 주니까. 첫 앨범 히트하고 두 번째 앨범을 낼 때도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하숙비를 못 낼 정도였어요.”
▼ 히트곡이 나온 뒤에도요?
“하숙비는 사장님이 주시는데, 다른 걸 못하게 했어요. 특히 돈 버는 일은. 지방 쇼도 못 하게 했고, 그런 걸 하면 앨범이 안 팔린다고. 섭외도 많이 들어왔는데 일절 못하게 하는 거예요. 거기다 전속계약도 5년이나 했으니.”
▼ 계약금은 받았을 텐데….
“5년 계약하면서 50만원 받았어요. 꽤 괜찮은 돈이었죠. 하숙비가 해결되는…. 하숙비가 한 달에 3만~5만원 정도였어요.”
▼ 50만원이면 큰돈이네요. 1년치 하숙비.
“아~ 근데 50만원 주면서 40만원은 다시 가져갔어요. 앨범 홍보한다면서.”
▼ 그래서 하숙비를 못 내셨구나.
“그러니까 주변에서 유혹이 계속 들어오지요. 다른 레코드사에서.”
▼ 전속계약 깨고 우리랑 일하자?
“그래도 ‘계약기간, 3배 위약금 때문에 못 간다’ 그랬죠. 근데 하숙비가 한 3개월 밀리니까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레코드사에 최후통첩을 했지요. ‘이번 주까지 하숙비를 해결 안 해주시면 다른 데 갑니다’라고.”
▼ 최후통첩으로….
“그러니까 사장님이 ‘이번 주말까진 해주겠다’ 그래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약속한 날에 사장이 지방에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돈 많이 주겠다는 사장님을 만났지요. 계약금으로 900만원인가를 받고.”
▼ 엄청 받았네요. 초특급 대우로.
“지금 생각하면 한 1억원 정도의 가치가…. 그땐 850만원 주고 반포에 집을 샀으니까.”
▼ 인생역전이네요. 그래서 집을 사셨어요?
“제가 그때 세상물정을 얼마나 몰랐느냐 하면, 돈을 은행에 어떻게 넣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돈 900만원을 하숙집 이불 안에다 탁 넣어놓고 조금씩 꺼내 썼어요. 그러다 둘째누님이 서울에 올라와서 그 돈을 뺏어서 아파트를 사신 거죠, 전세를 끼고.”
▼ 하숙은 계속하면서?
“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면서….”
▼ 옮긴 곳에선 돈을 제대로 받았어요?
“말도 마세요. OO레코드로 간다고 하니까, 주변 가수들이 그래요. ‘그 회사에 가거든 무조건 현금을 받으라’고. ‘어음은 절대 받지 말라’고. 난 어음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진짜 계약서를 쓰려고 서대문에 있는 으리으리한 사장님 집에 갔는데, 사장님이 ‘아~ 그거 말이야. 갑자기 현금이 없어서 어음을 받아야 되겠어’ 그러는 거예요. 들은 얘기도 있고 하니까 ‘현금 준다고 약속했지 않느냐’고 따졌죠. ‘현금 아니면 못한다’ 그러면서. 그랬더니 사장님이 ‘아, 지금 현금이 필요한 거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예.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잠깐만 있어 봐’ 하면서 2층에 있는 자기 며느리를 부르는 거예요. ‘야~ 며늘아~’ 하면서. 그러곤 그 젊은 며느리한테 ‘최백호씨가 말이야, 현금이 필요하단다. 그러니 니가 와리깡 좀 해드려라’ 그러는 거예요(웃음).”
▼ 자기가 준 어음을 자기 며느리한테 깡을 해라?
“예. 이게 코미디 같은 얘기잖아요. 15% 까고 주라고.”
▼ 15% 까고 760만원 정도만 받아가라 그거네요.
“당연히 못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2층에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거지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날은 그냥 나왔고 몇 번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 현금을 받긴 했어요. 그땐 그 세계가 다 그랬어요.”
▼ 그 레코드사 이름이 뭡니까?
“그 당시 가수들은 다 알아요. 유명한 레코드사였어요.”
▼ 선생님은 예전보다 요즘이 더 목소리가 좋은 것 같아요.
“예. 훨씬 좋아졌습니다.”
▼ 더 탁하고 허스키해졌는데 듣기는 더 좋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예전보다 지금 노래를 훨씬 잘합니다. 젊었을 때는 노래를 참 못했어요. 노래가 붕붕 떠다녔다고 할까요? 노래의 맛을 몰랐다고 할까요? 자신감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땐 건강도 별로 안 좋았고.”
시가로 담배 끊기
▼ 노래에 자신이 생겼다?
“예. 제가 생각해도 요즘 노래를 훨씬 더 잘합니다.”
▼ ‘낭만에 대하여’만 봐도 1995년 첫 앨범보다 요즘 낸 앨범 버전이 더 좋습니다.
“(1995년 녹음한 노래는) 엉성합니다.”
▼ ‘궂은 비 내리던 날 / 그야말~로’ 이렇게 들어갈 때 호소력이 더 좋아졌어요.
“예. 정확합니다. 저는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런 얘길 듣는 건 처음입니다. 방송국 PD 중에도 이런 얘길 한 사람이 없었어요. 사실 제가 1997년부터 음식조절을 시작했습니다. 육식을 끊었고요. 아마 그런 영향 같습니다.”
▼ 지금도 안 해요? 육식을?
“생선하고 채소만 먹습니다. 또 뿌리 채소는 안 먹습니다. 감자, 고구마, 인삼 같은.”
▼ 특별한 이유라도….
“우연히 알게 된 한의사가 제 체질에는 그런 것이 안 좋으니까 끊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확실히 좋아졌어요. 피곤한 것도 없어지고, 호흡도 좋아졌고요. 옛날엔 목이 많이 걸리고 칼칼해서, 내가 의도하는 노래가 안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까. 보통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 키가 내려가거든요. 고음이 안 되니까. 그런데 저는 반대로 올라왔어요.”
▼ 젊었을 때보다?
“많이 올라왔어요. 옛날에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를 기타로 치면 D마이너로 불렀는데, 지금은 하나 반을 올려서 F마이너로 부르거든요.”
▼ 음식 조절의 영향일까요?
“담배도 그때쯤 끊었고요.”
이쯤에서 최백호가 담배를 끊은 사연과 방법을 소개코자 한다. 그처럼 담배를 끊은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간단히 말해, 담배(시가)로 담배를 끊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인데, 담배를 못 끊어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감히 권해본다.
▼ 담배를 끊은 계기가 있어요?
“계기는 없고,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김수현 선생님의 출판기념회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같은 테이블에 작가 최인호 선생님이 계신 거예요. 처음 뵀죠. ‘고래사냥’ 쓰신. 근데 보니까 최인호 선생님이 (한 뼘 정도를 내보이며) 이만~한 시가를 피우시는 거예요, 향이 너무너무 좋은. 그래서 ‘시가 참 좋네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큰 걸 하나 주시면서 ‘자네도 이제 나이가 됐으니까 시가 피워, 담배 피지 말고’ 그러시잖아요, 그게 꽤 비싼데. 그걸 받아 와서 피우는데 굉장히 향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가를 피웠어요. 근데 시가를 피니까 담배가 맛이 없어지는 거예요. 파는 데도 많지 않아서 사기도 힘들고, 또 비싸고요. 어떤 건 하나에 몇 십만원도 하니까.”
보통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 키를 낮춰 노래를 부르는데 최백호는 반대로 키를 높였다. ‘낭만에 대하여’도 D마이너에서 F마이너로 하나 반을 올려 부른다.
▼ 시가가 더 독하지 않나요?
“시가는 안 마시거든요. 입으로 뿜어서 코로 향기를 맡는 거예요. 그거를 피기 시작하면 진짜 담배가 맛이 없어져요. 쓰게 느껴진다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2주 만인가? 그냥 시가만 피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떨어지면 며칠씩 안 피우게 되고. 어느 날 보니까 한 사흘을 안 피웠더라고요. 그렇게 끊었어요. 힘들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시가요법’으로 담배를 끊은 친구들이 꽤 있어요.”
▼ 좋은 방법이네요.
“시가는 또 함부로 못 피워요, 향이 강하니까. 냄새 때문에 눈치도 보이고. 담배 못 끊는 사람들은 한번 해볼 만해요.”
▼ ‘낭만에 대하여’ 얘기 좀 더 하죠. 일단 가사가 아주 좋은데, 뭘 생각하며 쓰신 거죠? (‘낭만에 대하여’는 1996년 KBS 가요대상 작사상을 받았다)
“제목은 노래를 다 만들고 난 뒤에 붙였어요. 노래를 다 만들고 나서 가사를 읽어보니 ‘아~ 이게 낭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노래 맨 마지막에 ‘낭만에 대하여’라고 붙였죠. 옛날 다방, 색소폰, 도라지 위스키 같은 기억들을….”
김자옥과의 첫 결혼
▼ 특별한 장소가 있는 건 아니고요?
“부산 동래에 한 다방이 있어요. 내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우연히 갔던, 비가 막~ 오던 날, 우산도 없이 쑥 들어간 다방인데, 손님도 없고. 다방 구석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신 거죠, 음악다방도 아닌 그냥 다방에서. 그때 색소폰 음악이 하나 들려오는데,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여자 종업원에게 LP재킷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니까, 에이스 캐논의 ‘Laura’라는 연주곡이었어요. ‘바바밤~’ 이렇게 시작하는, 그걸 한 20번 이상은 들었을 거예요.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서 만든 노래예요.”
▼ 첫사랑 여인은요.
“그건 정확지 않아요. 대상자가 한 댓명 되는데, 아마 그 친구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다 자기 얘기라고 생각할 거예요.(웃음)”
▼ 첫 결혼에는 실패하셨죠. 아주 떠들썩한 결혼이었는데….
“예. 그 사람과는 한 3년 정도…, 짧았어요. 가수로서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막 떨어질 때였어요.”
▼ 어떻게 만나 결혼까지 하셨어요?
“그땐 막 아무 공연이나 가고, 술 마시고 다니고, 그런 때였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공연에서 만났고, 제게 참 잘 해줬어요. 하루는 전화가 왔는데, 하숙집으로. 홍은동에서 하숙할 땐데, 얘기를 참 많이 했고…, 너무 어렸죠.”
▼ 연애는 얼마나 하셨어요?
“한 5~6개월? 그쪽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지만, 결혼한 그 순간에 이미 ‘아, 이거 잘못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을 텐데….
“성격 차이로 헤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어요.”
▼ 짧은 시간 정말 불꽃같은 사랑을….
“예. 하여튼 굉장히…. 외로울 때니까. 그쪽도 마찬가지고.”
▼ 헤어질 땐 어땠어요?
“감정이 대립해서 막 싸우고 그런 게 아니고,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냥 편안하게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나쁜 감정이 없어요, 지금도. 그 사람하고 같이 살았던 기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안 믿겠지만.”
▼ 3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닌데….
“실질적으로 한 1년 반 정도 살았지요. 그 외에는 제가 집에 거의 안 들어갔고, 지방공연을 가서 거기서 뭐 오래 있다든지 그랬고. 나쁜 감정 전혀 없고, 뭐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야…. 지금도 방송국에서 간혹 마주치면 서로 안부 묻고 하지요.”
▼ 두 분이 갈라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건 사고라도.
“아니오. 그런 건 없었어요. 내가 워낙 밖으로 도니까, 그러다 어느 날 ‘조금 별거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 먼저 제안하셨어요?
“아니, 난 ‘별거하지 말고 그냥 (이혼)하자’, 그게 낫지 않겠느냐’ 그랬고.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 바람 피우셨어요?
“아니에요. 그 얘기는 그 정도만 하시죠.(웃음)”
▼ 지금 부인도 음악을 하셨죠?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콘트라베이스 전공했죠. 제가 이태원에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아는 분 소개로 만났어요. 그 사람이 처음엔 자기 처제라고, 나이 차이가 10년이나 나서 처음엔 (결혼은) 생각도 안 했어요. 내가 결혼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까. 그런데 점점 가까워졌죠.”
하루에 딱 10분 방송
▼ 결혼에 이른 계기가 있을 텐데….
“와이프하고 내가 만나는 걸 알고 처갓집에서 되레 막 일을 벌인 거예요.”
▼ 좋다고요?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야단이 난 거지요, 우리 둘을 못 만나게 하려고….”
▼ 반대가 심했군요.
“장인어른이 찾아오시고, 장모님도 험악하게…, 결국 결혼식에도 안 오셨어요.”
▼ 누가요?
“장인어른이, 장모님만 오시고. 내가 직업도 그렇고, 결혼도 한 번 했고, 그것도 아주 떠들썩하게…. 하여튼 결사반대하셨죠.”
▼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딸을 낳고 나니까, 그때 장인이 제주도에 계셨는데, 전화를 하셨어요. 굉장히 무뚝뚝한 전라도분이신데, ‘술 담가놨으니까, 애기 데리고 한 번 와라’ 이러곤 탁 끊어버리시는 거예요. 그 일 이후로 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고….”
▼ 1990년대 초 미국에 이민을 가셨죠.
“1990년에 가서 92년에 나왔죠. 가서 방송국 일도 하고.”
▼ 미국엔 왜 가셨던 거예요?
“뭐, 여기서는 벌이가 없으니까, 생활이 어려우니까. 마침 박 사장이라고 아는 분이 LA에다 방송국을 차리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DJ 이○○씨하고 했던 방송, 이○○씨는 기술적인 부분을 맡고, 박 사장이 투자를 했죠. 그때 처가도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냥 보따리 싸 가지고 간 거죠.”
▼ 일은 잘되셨어요?
“생각처럼 안 됐어요. 이○○씨하고 박 사장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전 박 사장파니까 이○○씨가 날 굉장히 경계했죠. 못살게 굴었어요.”
▼ 거기선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제가 월급도 아주 많이 받았는데, 하루에 딱 10분짜리 방송을 했어요. 편성은 이종환씨가 다 책임지니까.”
▼ 그래도 이름이 난 가순데….
“그러게요. 낮 11시50분에서 12시까지 딱 10분. 광고주였던 한인타운의 식당, 자동차 정비소, 슈퍼마켓 주인들을 불러 가지고 자기 PR을 하는 코너였어요. 우리 식당은 뭐가 맛있다, 이런 거. 시간은 10분인데, 노래 하나 걸고, 광고 나가면 실제론 5분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난 괜찮은데 오히려 교민들이 항의전화를 했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방송을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가수하던 사람인데 그러면 되느냐’고…(웃음).”
▼ 기분 나쁘셨겠네요.
“난 좋죠. 하루에 딱 5분만 일하니까. 그때 골프를 배웠어요(웃음).”
▼ 방송국은 어떻게 됐어요?
“금방 망했죠.(웃음) 사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가수라는 직업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언제든지 빨리 그만둬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누구의 아들인데’ 같은 그런 생각도 있고. 내가 가수를 한다는 게 사실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은 했지만….”
▼ 천직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예. 그러니까 열성적으로 하지를 않았지요. 그런데 미국에 가 있는 2년 동안 ‘야,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걸 느낀 거예요. 한 6개월간 노래를 안 하고 있으니까, 노래가 막 하고 싶은 거예요. 노래방엘 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2년 만에 나와버렸어요.”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 혼자 나오셨어요?
“1년 정도는 혼자 나와 있으면서 준비를 했죠. 미사리 같은 곳에서 일하고요. 그러다가 딱 나온 게 ‘낭만에 대하여’예요. 갑자기 왔죠, 하루아침에. 앨범 내놓고 1년 반 동안 PR을 전혀 안 했는데….”
▼ 최백호란 이름도 거의 사라져가고….
“예. 사라졌죠. 그런데 어느 날 제작사 여직원이 전화를 해서 ‘선생님, 이상해요’ 그러는 거예요. ‘왜?’ 물으니까 ‘갑자기 주문이 1500장 들어왔어요’ 그래요. 한 달에 20장 팔리던 게.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야, 임마, 그게 뭐가 이상해, 이제 정상이지’ 그랬다고요. 그러곤 잊어버렸지요. 그런데 또 전화가 왔어요, 추석 전날. ‘선생님, 1만5000장 주문이 들어왔어요’ 하는 거예요. 그제야 ‘아~ 장난이 아니구나’ 했죠.”
▼ 이유를 물어보셨을 텐데….
“‘왜 그런데?’ 물어보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회사가 야단났다고. 공장을 풀로 돌려야 한다고.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인터뷰하자는 전화가 왔어요.”
▼ 어디서요?
“어느 신문에서.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얘길 하더라고요. 무슨 TV드라마에 내 노래가 나온다고.”
▼ 아~‘목욕탕집 남자들’?
“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 선생님이 그 노래를 부른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35만장이 나갔어요.”
▼ 35만장이요?
“제작사 대표였던 유OO씨가 처음 앨범 낼 때 나하고 농담하면서 ‘이게 15만장 나가면 한양컨트리클럽 회원권을 사드릴게요’ 그랬는데, 35만장 나가니까 보너스로 딱 500만원 주더라고요(웃음). 그 사람하고는 그걸로 끝났죠.”
▼ 그래도 돈을 좀 버셨죠?
“그 앨범 때문에 제가 다시 살아났죠. 그 노래는 참 묘해요. 14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앨범이 팔려요. 그래서 생각하죠. 이건 진짜 나한테 하늘이 던져준 거다. 고생했으니까 ‘너 가져라’ 하고.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이 대목이 전 참 좋아요, 내가 썼지만. 이 노래 만들 때, 제가 거실 한쪽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다가, 설거지하는 와이프에게 이 노래를 불러줬거든요. 그랬더니 집사람이 그러대요. ‘첫사랑 소녀를 못 잊어서 이제는 노래까지 부르는구나’(웃음).”
▼ 이 노래 하나로 고생이 끝나셨네요.
“배철수씨는 ‘고목에 꽃피었다’고 표현하던데, 정말로 모든 게 다, 돈도 벌었고. 이 노래로 제가 지금도 굉장히 비싼 출연료를 받고 있고. 뭐랄까, 이 노래는 제게 큰 존재로 느껴져요.”
▼ ‘목욕탕집 남자들’ 쓰신 김수현 작가님은 이 노래를 어떻게 아셨대요?
“아~ 그것도 참, 선생님이 어느 날 차에 딱 탔는데,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그 대목이 라디오에서 나오더래요. 그래서 운전기사한테 ‘이게 무슨 노래냐?’ 물으니까 운전기사도 모르는 거지요. ‘야, 이거 알아봐라’ 그래서 카세트를 구해서 들으셨대요. 그러고 바로 드라마에 넣으셨고요. 사실 가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죠. 내가 불러 히트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장용)이 불러서 히트한 거니까(웃음).”
골프에 미쳤다
▼ 아까 미국에서 골프를 배우셨다고 했는데요.
최백호의 골프실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래 기사 하나가 모든 걸 말해준다.
“(최백호는) 백스윙을 짧게 하면서 임팩트 위주로 친다. 입문 6개월 만에 77타의 ‘싱글 스코어’를 냈다. 베스트 스코어는 3언더파 69타. 미국과 한국(88CC)에서 한 차례씩 기록해봤다.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가 240~250야드에 달하는 장타자다. 파5홀 페어웨이에서 세컨드샷을 할 때도 드라이버를 사용할 정도로 드라이버에 자신이 있다.”(한국경제, 2002년 9월 17일)
“미국에 살 때, 저희 집 바로 옆이 골프장이었어요. 딱 10분 방송하고 12시에 끝나니까, 할 일이 없잖아요? 집에 가기도 그렇고. 친한 선배 따라갔다 골프를 배웠죠. 가보니까 15달러예요, 한 번 치는데. 그때 환율이 한 850원 됐으니까 만원 남짓이면 5시간을 재미나게 노는 거지요.”
▼ 그러네요.
“그래서 배웠죠. 그리고 매일매일 치는 거지요. 방송 끝나면 가서 치고. 선배들한테 배운 거니까 순엉터리로. 그래도 실력이 늘 수밖에 없어요. 바보를 갖다놔도 늘 수밖에 없죠. 매일 치니까. 나중엔 미쳐 가지고 새벽에 나가요, 5시쯤에. 골프백을 쭉 세워놓으면 순서대로 내보내는데, 그게 8달러였나 그랬을 거예요. 9홀만 치는 거지요, 새벽부터. 방송국에 가서 10분간 방송하고 와서 또 18홀 치고.”
▼ 그럼 하루에 27홀?
“매일 27홀씩 거의 한 1년을 쳤어요.”
▼ 하루도 안 빼고?
“주말에는 더 치죠. 선배들하고 다니면서 주말에는 36홀도 치는 거예요. LA에서 한 시간쯤 올라가면 랭캐스터라는 시골마을이 있는데, 거긴 일요일에도 텅텅 비는 골프장이 많아요. 굉장히 싸요. 클럽하우스도 없고, 돈 넣는 통만 하나 있는 곳도 많고.”
▼ 무인 골프장?
“‘5달러 내고 들어가서 치시오’ 이렇게 되어 있죠. 20달러 정도를 내고 하루 종일 치는 데도 있어요. 그런 데선 하루에 4라운드 정도를 치기도 해요.”
▼ 72홀?
“새벽부터, 72홀 치죠. 그래도 싫증이 안 났어요.”
▼ 한국에선 그렇게 못했을 텐데….
“일단 비싸서. 자주 못 쳤지요,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웠으니까. 골프 끝나고 목욕하는 것도 적응이 안 됐어요. 가서 밥 먹는 것도. 돈이 많이 드니까. 그래서 ‘그만둘까’ 생각도 했고.”
▼ 요즘은 얼마나 자주 치세요?
“일주일에 한 번 칩니다. 멤버들이 있어요.”
▼ 누구예요?
“배철수씨하고, 구창모, 주병진, 권인하 이런 친구들이지요.”
▼ 지금은 얼마나 치세요?
“거의 80대 중반. 많이 줄었지요, 연습을 안 하니까. 드라이버 거리도 줄고, 230야드 정도.”
▼ 멤버들 중엔 누가 제일 잘 치세요?
“권인하가 제일 잘 치지요. 거의 세미프로 실력이에요. 매주 수요일에 치는데, 20년이 넘은 편한 사람들이고, 나이는 제가 제일 많지만. 그래서 우리는 골프를 치면 첫 티샷은 항상 저부터 합니다, 나이순으로(웃음).”
‘화가’ 최백호
▼ 그림도 그리시잖아요? 얼마 전엔 전시회도 하시고.
“예. 개인전 한 번 했고, 두 번째 준비 중입니다.”
▼ 주로 뭘 그리세요?
“전 나무밖에 그릴 줄 몰라요.”
▼ 나무?
“나무는, 사람의 모습이랄까요? 우리도 다 고향을 떠나와서 살고 있잖아요. 나무가 고향인 산을 떠나서 사는 것처럼, 그런 느낌. 또 나무를 좋아해요. 나무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찾아가도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사람들과 달리 옮겨 다니지 않고. 그런 모습이 좋아서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앞으로도 당분간은 나무만 그릴 생각이에요. 동질감을 느낀다고 할까요? 나무에서.”
▼ 작품을 팔기도 하세요?
“팔았지요. 개인전 때 27점 중에 25점 팔았어요.”
▼ 엄청나네요. 얼마에 파셨어요?
“제일 싼 게 100만원짜리였고, 보통 300만~400만원. 1200만원짜리도 있었어요. 120호짜리가 석 점 있었는데, 그중 한 점이 팔렸어요(웃음).”
▼ 누가 샀어요?
“1200만원짜리는 모르는 분이 샀고요. 사실 강매도 많이 했고요(웃음). 부산국세청에 기증도 했고요, 현관에 걸려 있다는데…. 근데 120호짜리 중에서 사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그림은 안 팔렸어요.”
▼ 너무 비싸서 그런가요?
“저도 너무 비싸다고 했는데, 기획자가 그러대요. ‘싸게 내놓으면 안 팔린다’고. 그런데 정말내가 좋아했던 작품 말고는 금세 팔렸어요.”
▼ 돈 좀 버셨겠네요.
“여러 사람이 다 나눠 가졌어요. 제가 가져가지는 않았고. 인사동에 친한 분들이 좀 계신데. 작가들, 사진작가들, 화가들. 그분들이 다 힘들어요. 시인이라고 해봐야, 시집이 팔려야 되는데, 그게 얼마나 팔리겠어요. 그런 분들 모였을 때 썼어요.”
▼ 좋은 일 하셨네요. 그림은 주로 언제 그려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려요. 또 방송 마치고 새벽 1시쯤 들어와서 한 1시간 정도, 그 시간이 굉장히 좋아요. 음악이나 노래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어떤 대상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데 그림은 완벽하게 자기 혼자의 시간이에요. 그게 참 좋아요. 제 딸아이하고도 그림 덕분에 사이가 좋아졌고요. 어릴 때부터 미국에 떨어져 살았던 딸하고 잘 안 맞았거든요. 굉장한 갭이 있었어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새벽에도 그리고, 밤에 일어나보면 아빠가 그림 그리고 있으니까, 딸아이가 ‘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매달릴 수 있을까’ 그랬대요, 존경심 비슷한. 그러면서 사이가 좋아졌어요.”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딸 하나만 두셨어요?
“기운이 없어서(웃음).”
선배들 돕고 싶다
안 그래 보이는데, 최백호는 가수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해왔다. 원로 가수 남진을 회장으로 추대해 ‘가수협회’를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밴드 ‘4월과 5월’ 출신의 가수 백순진씨와 함께 ‘싱어송라이터협회’라는 것도 만들었다. 이 협회에는 김도향, 서수남, 서유석, 송창식, 윤항기, 윤형주, 엄인호, 한대수 등 쟁쟁한 원로가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협회는 지난해 가을 창립 첫 작품으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원로가수 한명숙을 위한 헌정공연을 기획했다.
▼ 가수들의 권익을 위한 사업도 많이 하시는데….
“사실 체질에는 잘 안 맞는데, 선배 가수들 중에 너무 힘들게 사는 분이 많거든요. 저도 방송하면서 알았어요. ‘홍콩아가씨’를 부른 금사향 선생님도 힘든 생활을 하십니다. 그래서 뭔가를 좀 해야 되겠다 생각한 거예요.”
▼ 몰라서 그렇지 그런 사례가 많겠죠.
“얼마 전에도 한 후배가 방송국에 찾아와서 앉아서 울어요.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면서. 지금 그런 판이에요. 구제역이니, 연평도 포격이니 하는 사건들 때문에 이런저런 행사가 취소되면서 가수들이 설 자리가 더 없어졌지요. 자살하는 가수들이 앞으로 더 나올지 몰라요. 한명숙 선배 공연 땐 대통령께서 비서 두 분을 보내 ‘돕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필요한 걸 말씀드렸는데, 아직 소식은 없네요(웃음). 그리고 사실 금사향 선생님 같은 분은 나라에서 도와야 해요. 6·25 전쟁 때 제주도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 찾아다니며 노래했던 분이거든요, 나라를 위해서.”
▼ ‘죽기 전 마지막 소원’ 같은 거 혹시 생각해 보셨어요?
“특별한 건 없어요. 없는데, 자다가 죽기는 싫어요. 그거는 정말 비참한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을 의식하면, 갈 때도 의식을 하고. 그러니까 내 식구들 쫙 다 세워두고, 한 놈 한 놈 얘기 다 해주고 가고 싶어요. 살면서 행복했던 일들 얘기 다 하고,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에요.”
▼ 하여튼 건강이 제일 중요하죠.
“난 오래 살 것 같아요. 내가 55살에 내시경 검사를 한번 받아봤는데, 마취 안 하고, 의사하고 모니터 같이 보면서 했는데, 제가 ‘저건 뭐예요? 저거 암 아니에요?’ 그러니까 의사가 굉장히 짜증을 내면서 ‘아니, 내가 암 나오면 이야기할 테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그러더라고요.(웃음) 젊었을 땐 워낙 몸이 안 좋아서 ‘분명 내 장이나 위에는 암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깨끗하더라고요.”
▼ 살면서 이루고 싶은 소원도 있으세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고, 노래도. ‘낭만에 대하여’를 40대에 썼으니까, 50대, 60대에는 아직 좋은 노래를 못 만들었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는 있어요. 한 90쯤 되어서 멋진 히트곡을 하나 내고 싶어요. 90쯤 살아보면 세상이 좀 보일 것 같아. 그럼 좀 건방진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요. 인생은 이런 거다, 까불지 마라 이것들아 그러면서(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