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몬테소리

조회 수 9505 추천 수 1 2015.05.14 19: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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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0. 8. 출생인 마리아 몬테소리는 이탈리아의 안코나 지방에서 태어났다. 귀족 출신의 아버지 알레산드로(Alessandro Montessori)와 교육자 가정출신의 어머니 레닐데 스토파니(Renilde Stoppani)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외삼촌인 안토니오 스토파니(Antonio Stoppani)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성직자로서, 밀란대학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유명했다. 

 1875. 몬테소리 집안이 로마로 이주

몬테소리가 세 살때 그녀의 부모님은 딸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로마로 이사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고,  수학신동으로 불렸다.
 
1892~96. 로마의과대학 최초의 여자 입학생이 됨

그녀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189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로마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로마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을 거절당하게 된다.그러나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왕과 교황을 만나 설득해, 결국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는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최초의 여자 의대생이 되었다.

1896. 로마대학 산 지오바니(San Giovani)병원의 보조의로 실습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여성회의에 이태리 대표로 참가
1896년 26세의 나이로 몬테소리는 로마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해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1897. 로마정신병리임상대학(University of Psychiatric Clinic)의 자원 보조자

로마대학의 부속병원에서 정신과의사의 조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로마에 있는 종합 정신병원에 수용된 어린이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있던 어린이들은 마땅히 손을 놀릴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식기와 빵조각만이 유일하게 그들의 놀이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먹을 것만 찾는 동물과 같다고 여기며 멸시했다.  

그곳을 방문한 후에 몬테소리는 지능발달이 늦은 아이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이들에게 특수교육이 적합하다고 보고 이 분야의 초기 개척자인 프랑스 정신과의사 이타르(Jean Itard)와 세강(Edouard Seguin)의 업적을 연구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몬테소리는 로마에 귀국하자마자, 이탈리아 교육부는 몬테소리에게 로마에 있는 교사들을 위한 강의를 의뢰했다. 이 과정은 State Orthoprhrenic 학교에 개설되었고, 1898년에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몬테소리는 이 학교에서 2년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타르와 세강의 연구로부터 얻은 착상을 자신의 교육방법의 근거로 삼았다. 그녀는 아침 8시-저녁 7시까지 종일 교육을 하였고, 밤늦게까지 새로운 교구준비, 노트작성 및 관찰, 하루일에 대한 성찰을 하는 등 쉼없이 교육준비를 했다. 훗날 몬테소리는 여기에서 보낸 2년이야말로 ‘진정한 교육학 학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1898. 지체 어린이의 교육을 위한 국내 연맹 형성

아들 마리오 몬테소리(Mario Montessori) 출산
그 시기에 동료박사인 몬테사노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리오가 태어나자, 그들은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결혼은 하지않고 그냥 살기로 약속한다. 그후 몬테사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그녀는 아들의 성을 마리오에서 몬테소리로 바꾸었다.

이런 일들은 그 당시에 여성에겐 파멸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후 수년간 몬테소리는 여름이 되면 보로냐 근처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들과 함께 명상을 하곤했다. 그곳에서 몬테소리는 총장수녀에게 고아원을 만들어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공헌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총장수녀는 가능한한 세계 여러나라의 아이들이 혜택을 받을수 있는 일에 공헌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몬테소리는 이탈리아를 위하고 경제적 재건을 위하는 길은 정상아들을 위한 교육임을 느끼고 정상아 교육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1901. 로마대학 철학과에 재입학

 교육자로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철학, 심리학, 인류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로마대학에 재입학 했다. 

1904~8. 로마대학 교육대 자연학과 및 의학과 교수

대학의 인류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07년에 이탈리아 산 로렌소의 빈민가의 탁아소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하게 된다. 이 기회를 몬테소리는 정상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보았다.

이 어린이집에서 그녀는 유아교육을 실천한 후에, 의학계를 떠나 오로지 어린이와 함께 할 것을 굳게 결심하게 된다.

같은 해 산 로렌소의 두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다. 1908년에는 밀란에 세 번째 학교가, 로마에는 네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학교들은 처음 어린이집과는 달리 유복한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한 학교였다.

몬테소리가 세운 이 학교와 그녀의 교육방법은 금새 유명해졌고, 1909년까지 스위스에 있던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아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몬테소리의 교육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9. 스위스계 이탤리언 유치원과 고아원의 훈련, 이탤리언 몬테소리 방법의 출판

 미국 잡지사의 편집국장 맥쿨루(Mr. McClue)가 몬테소리의 교육방법을 호평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1911년 이탈리아영국에 몬테소리 학회가 설립되었고, 이탈리아-영국의 초등학교에는 정식으로 몬테소리 교육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1912년에 몬테소리는 강의를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Alexander Graham Bell을 회장으로 미국에는 몬테소리 협회가 설립되었다.
193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몬테소리 교육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히틀러는 “몬테소리 교육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독일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 몬테소리 학교를 폐쇄하였고, 무솔리니도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몬테소리 학교를 폐쇄하였다.

1936년에 바로셀로나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몬테소리는 네델란드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1939년 몬테소리는 간디,네루,드골 등의 지원을 받아 인도에서 6개월간의 훈련과정을 전수시키러 갔으나 제재를 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녀는 인도에서 이탈리아 국적자로 억류 당했지만, 은둔생활을 하며 인도에 많은 학교를 건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몬테소리는 네덜란드로 귀국한다. 이리하여 네덜란드에는 몬테소리 지부가 설립되고, 산레모에서는 제8회 국제 몬테소리 회의를 개최되었다. 이로 인해 몬테소리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노벨평화상을 정중이 사양했다.
 

1952. 5. 네덜란드에서 작고 

5월 6일 몬테소리는 82세의 나이로 네델란드에서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그후 그녀의 아들 마리오(Mario M. Montessori)와 손녀 레린드(Renilde Montessori)는 AMI 를 관장하며,세계적으로 몬테소리의 교육방법과 업적을 펼쳐나가고 있다.

                 "내 인생은 어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바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들의 세계이다."

몬테소리가 처음 세운 어린이 집에 방문한 이탈리아의 여왕은 아이들을 보고 "기적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몬테소리는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내면에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몬테소리는 자신의 교육 방법을 치켜세우기보다는 어린이들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힘을 믿었습니다. 몬테소리는 어린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했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린이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빛나는 보물을 발견하고자 노력한 진정한 교육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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