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좋아

조회 수 5497 추천 수 14 2014.10.06 19:28:29
                                                                                   
                                                                                “ 그래도 좋아!”

   내 친구 무명초의 떨리는 음성이 내 가슴을 찡하게 한다.
  “ 미안, 미안, 너무도 무심해서 정말 미안해. 30년이 넘게 함께 살아오면서 아직도 이름을 몰라. 너를 무명초라 불러서.” 
무명초는 내가 무심해도, 자기 이름을 내 마음대로 지어서 불러도 날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내가 그래도 좋다고 단호히 말한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한 난데, 내 무심함과 허물을 덮어 주는 무명초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무명초는 나와 날마다 얼굴을 수없이 대면하면서 침묵의 대화를 즐기는 친구다. 우리 집 거라지에서 살고 있는데 옆에는 항상 행운목이 자리하고 있다. 행운목은 누군가 나에게 알려주어서 알고 있고 무명초는 그 사람도 이름을 모른다는 바람에 지금까지 나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내 이민생활의 역사를 거의 알고 있는 무명초일 것이다. 꼭 이름을 알아야 한다면 지금이라도 꽃집에 가서 알아보면 될 테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30여 년이란 세월을 이름을 몰라 무심한 나는 그냥 무명초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쁜 꽃을 피워 내 시각을 즐겁게 하면서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꽃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맛있는 열매를 맺어 내 입맛을 돋워 줄 나무도 아니고 한결같은 푸름만 간직한 상록수기에, 나는 사실상 무언가 이루고 싶은 내 꿈을 무명초에 걸지 않았기에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같은 실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명초는 대나무 비슷하게 생겼고 꽃은 피지 않고 늘 초록 이파리만 달고 있는데 기다란 이파리 가운데로 하얀 선들이 나란히 개가 줄지어 안정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무명초는 제2세가 된다. 제1세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의 초창기 이민 시절에 처음으로 집을 사서 집들이할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나는 둘이 나란히 있어 한 쌍의 부부 같은 이 무명초를 햇빛이 잘 드는 2층 배스 실에 두고서 커다란 화분으로 갈아 주었더니, 꼭 자기들 닮은 개의 새끼도 치고 쑥쑥 잘 자라나 키가 천장에 닿으려 했다. 나는 물을 줄 때마다 부모와 두 자녀가 똑같이 생겼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월이 지나니 제2세가 되는 두 개의 무명초는 싱싱하게 잘 자라고 제1세가 되는 부부 무명초는 흐므끄레하게 빛도 바랜 것 같고 억세고 키만 멋없이 너무나 자라 천장을 찌를 것 같은 불안감을 주었다. 나는 마침내 새끼 무명초가 더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 위해서 부모 무명초를 잘라 주었다. 부모들은 언제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선 내가 새집으로 이사 할 때, 무명초 화분 위에 누군가가 준 예쁜 조개껍데기들을 함께 넣어 옮겨왔다.
  지금 나와 함께 지내고 있는 제2세 무명초는 웬일인지 후계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대면하면서도 무심한 척 그저 일주일에 물 한 번 주고 가끔 미라클 영양분을 줄 뿐이다. 내가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기는 있다. 나는 웬일인지 화초를 잘 가꾸지 못한다. 나는 내심 화초를 잘 키우겠다고 정성껏 물도 주고 거름도 주는데 대부분 너무나 물을 많이 주어 물창이 들거나 거름을 너무 많이 주어 몸에 상처를 받은 화초들은 결국은 나를 떠나 버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적당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내 잘못에 가슴이 아프고 내 정성과 꿈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려 나는 허탈감에서 허우적거린다. 더 예쁘고 관심이 많은 화초일수록 빨리 내 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무명초에 신경을 안 쓰려 하는 것이다. 얼굴을 더 오래도록 보고 싶어서, 내가 사는 동안 날마다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데 나는 오늘에야 ~ 참으로 오랜 세월을 지낸 후에야 내 커다란 허물을 찾아냈다. 화분 안에, 내 눈에 예쁘게 보인 조개껍데기를 놓았으니 무명초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제2세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이 한없는 무심함과 커다란 허물을 어쩌랴! 
  내 이민생활의 희로애락을 잘 알고 있는 내 친구 무명초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새 환경으로 조성해 주지 않고 무심한 것도 관계치 않고 나를 지켜보면서 사랑만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새삼스럽게 내 친구 무명초에게 내 무관심과 허물을 말하면서 무척 미안해하고 있을 때, 무조건 ‘그래도 좋다’고 무명초는 나를 안심시킨다.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다. 특이한 내 사랑 방법을 알고 있는 무명초의 너그러움이 어쩜 우리가 삼십여 년이 넘게 같이 있을 수 있게 한 보이지 않는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무명초가 생명을 유지 하고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좋다. 
  나는 무명초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면서, 좋은 거름과 물도 자주 주고 아름다운 열매를 보리라는 내 꿈을 안고서 5년 전에 심었던 사과나무를 오늘은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뿔싸! 지금쯤 열려 있어야 할 사과가 단 개도 열려 있지 않았다. 작년엔 서너 개가 열렸기에 올해는 더 많은 사과가 열리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리라는 기대가 많았었는데---. 나는 내 정성 어린 사랑과 꿈이 무너지는 허탈감에 빠져 나도 모르게 “무심한 것~.”했다. 그런 후에 사과나무를 쳐다보니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너무도 슬퍼 보인다. 나는 그때 무명초가 떠올랐다. 내 커다란 허물과 무심함을 탓하기는커녕 ‘그래도 좋아’ 하면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했던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 졌다. 남에겐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의 무심함과 허물을 용서받기를 좋아하면서도 남에게는 옹졸했던 나의 마음까지도. 
  나는 얼른 사랑스러운 얼굴로 사과나무에 다시 말한다. 
  ‘그래도 좋아!’
  이 말은 무명초가 내 가슴을 찡하게 감동하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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