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었구나!

조회 수 5114 추천 수 13 2014.10.06 19:29:51
                그랬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그래서 내가 양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고.”
 나는 신기한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이 흥분된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손뼉을 치니, 무언가 막혔던 것이 순식간에 시원히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잊어버리고 산 일인데, 참으로 우연히 내가 양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이 초 향기 좀 맡아봐, 흠- 너무도 좋다. 라일락 꽃향기야.” 사랑하는 친구가 예쁜 코를 벌렁거리면서 양초 향내를 몽땅 오목하게 생긴 콧속으로 빨아드릴 듯이 냄새를 맡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초 냄새를 별로 몰라. 좋아하지도 않고.” 친구가 초를 내 앞으로 내미는 찰나에, 나는 순간적으로 친구를 밀쳐버렸다. 향기에 매료되어 들뜬 친구의 감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듣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그 순간에 나는 내 오른손 안쪽으로 촛농이 떨어져서 굳어버린 듯이 울퉁불퉁하게 생긴 흉터를 본 것이다. 내 과거사를 들은 친구는, 무안해하던 표정을 짓고 ‘그랬었구나!’ 하면서 내 잘못된 행동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촛대를 사 들고서 우리 집을 즐겁게 오신 속 깊은 초강 언니한테 나는 별로 달갑지 않게 말했다. “ 나는 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촛대 사왔네.” “그래?’ 어쩜 좋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서운한 표정의 언니를 보면서 나는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내 말은 공중으로 쏘아버린 화살과 같았다. 나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 촛대가 참 예쁘네, 언니가 만들었어?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두고서 오래도록 잘 간직할게.”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는 안다. 지금은 멀리 떠나 살고 계시는, 촛불을 두 손으로 받들고 서 있는 수호천사같이 신실한 도예가 언니가, 내 과거사를 알게 되면 틀림없이 나를 이해하여 주실 것이다. 그랬었구나- 하시면서.
 그러니까, 지금 시대보다도 훨씬 더 전력이 덜 풍부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가장 지겹게 살았던 여고 졸업반 시절이기도 하다. 그 시절엔, 밤늦도록 전등불을 켜놓고 공부하기엔 엄청난 전기세도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절약시대의 국가에 대해서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호롱불 보다는 편리한 촛불을 켜놓고 공부할 때가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오른손을 촛불에 덴 날도. 피곤했던 나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촛불을 켜 놓고서 시험공부를 하다간 잠이 들어 버렸다. 내가 무언가 타는 냄새에 놀라서 눈을 떴을 땐, 책상 위에 놓인 양초가 다 타고 조금 남은 촛물이 나무책상을 태우고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엉겁결에 오른손으로 촛불을 덮는 순간에, 뜨겁게 녹아내린 양초가 내 손에 달라붙어서, 피부가 홀랑 벗겨져 버릴 정도로 데어 버린 것이다. 나는 손에 화상을 입고서 고생한 후로, 아픈 상처에 대한 흔적을 남긴 양초에 대한 거부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었나 보다. 양초가 있는 곳에선 어느 사이엔가 내 몸이 움츠러지고, 도사려질 정도로. 
 근래에 난 오른손에 있는 흉터를 볼 때면, 초와 관련해서 내 생활을 반추시켜 보곤 한다. 
 파르르 떨면서 꺼져가는 순간까지, 자기 몸을 태워서 한 줄기 빛으로 남을 밝게 해주는 촛불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비록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랬었구나-‘하고 남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여 주는 너그러움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오해로 남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누구든지 무슨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실수한 일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도 있을진대, ‘그랬었구나-‘ 하고 나는 더욱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나의 잘못과 실수에 남이 나를 용서해 주고,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더불어 살아가면서,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랑스러운 한 사람인 내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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