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봉선화

조회 수 5484 추천 수 13 2014.10.06 19:30:56

그리운 봉선화


봉선화.

왜 이리 고향의 봉선화가 보고 싶은 걸까? 내가 고향에 두고 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요즈음도 눈 감고 고향 생각을 하면 봉숭아가 터지고 눈 뜨고 숟가락을 만져도 따다닥 터지는 소리로 변한다. 손을 살짝이라도 대면 씨방을 터트리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봉선화 생각뿐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재미동포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를 앙다물고 살아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씀 따라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 힘의 근원은 어쩜 한여름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시들시들 처량한 모습이었다가도 밤이슬에 다시 힘을 얻어 살아났던 봉선화 때문이라 싶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나의 손톱을 빨갛게 물들게 한 봉선화. 어쩌면 어린 가슴을 신기함으로 들뜨게 했던 내 고향 봉선화의 혼이 내 가슴에 항상 잠재했기 때문이리다.

나는 오늘도 이곳에 있는 봉선화가 아닌 줄기를 따라 마디마디에 소박한 꽃을 피우는 그리운 내 고향 토종봉숭아나 접봉숭아를 찾아 눈을 크게 뜬다. 그리하여 귀를 나발통처럼 넓게 열고서 이리저리 헤맨다. 언젠가는 그리운 내 고향 봉숭아꽃을 이곳 뜨락에 심어 꽃핀 빨강·주홍·흰색봉숭아 얼굴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기에 그렇다.

내가 살던 소쿠리 마을은 낮은 구릉과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시골이라기보다는 산골에 가깝다. 나무가 많고 잡풀이 많아서인지 집 안에서 지네나 뱀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장독대에 뱀이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어머니 말씀대로 신기하게 봉선화 꽃이 있는 곳엔 해충과 파충류들이 얼씬도 못했다. 그 탓에 마을 집집마다 장독대 둘레나 울 밑 이곳저곳에 봉숭아꽃이 심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소쿠리 마을 전체가 봉선화로 물들인 마을이었다.

아름다운 정서를 제공해 주던 내 유년시절의 우리 집은 봄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가슴에서부터 만들어지곤 했다. 봄이 오기 전 토담 아래에 있는 꽃밭은 겨우내 쌓아 두었던 땔감과 볏단이 치워지고, 아버지의 말씀에 오빠가 삽으로 땅을 깊게 판 후 흙을 골라 보송보송하게 만들었다.

토담 아래 있는 꽃밭에 마지막 잔설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둔 봉선화 꽃씨와 다른 꽃씨들을 꺼낸다. 그리고는 언니에게 건네주면서 꽃밭에 심으라 하셨다. 언니는 물론이고 나의 손에도 호미를 쥐게 했다. 어느 사이에 꽃밭에 온 새언니랑 언니와 나는 촉촉한 땅을 호미로 파고 골을 만들었다. 우리는 봉선화 꽃씨를 구분해서 심고 곁에는 다른 꽃씨들도 함께 뿌리곤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매일 아침저녁 꽃밭에 새싹이 나오기를 고대하며 물을 준다. 일주일이 지나면 연초록 봉선화 새싹이 땅을 헤집고 고개를 쏙 내밀고 나온다. 그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명의 환희를 주곤 했다. 키도 아담하게 자라고 가지가지마다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자란 후엔 옆구리마다 봉선화 꽃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면서 활짝 피기 시작하면, 비바람과 소나기가 뭉친 태풍이 한 번씩 불어와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때아닌 재난에 봉선화의 몸이 흔들리고 가지들이 시련을 이기지 못해 찢어져 피를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상처를 부여안고 수많은 역경을 견뎌낸 후 마침내 소담한 꽃을 피워 내는 행복의 화신, 그게 바로 봉선화였다.

우리 집 여자들은 한 여름날 봉선화 꽃을 물들이는 날로 잡는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하얀 차돌 같은 백반을 사오신다. 새언니는 봉선화 꽃을 따서 꽃물이 진하게 들도록 수분을 증발시키려고 시들시들하게 장독대 위에다 말린다. 언니는 텃밭에서 아주까리잎을 따고 굵직한 무명실 꾸리를 챙긴다. 나는 주먹만 한 돌을 야산에서 주워와 해가 질 무렵에 봉선화 꽃과 이파리 몇 개를 백반이랑 함께 넣어 토방에서 돌로 찧는다.

산골 집 마당 멍석 위에서 각종 풀냄새가 향기로운 모깃불을 켜놓고 저녁을 먹은 후엔 가족이 봉선화 꽃물들이기 위해서 고개를 맞댄다. 늙어 보이는 어머니도 수줍은 처녀처럼 꽃물이 예쁘게 들어야 할틴디!” 하시면서 손가락을 내미신다. 새언니는 우리 예쁜 아가씨들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신랑감을 만날 수 있도록,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꽃물이 잘 들게 해 달라!”라고 익살스럽게 말한다. 그리고는 언니와 나의 손톱 위에 잘 찧어놓은 봉숭아꽃을 얹고서 아주까리잎으로 싸맨 후 물이 흐르지 않도록 새언니는 무명실로 꼭꼭 묶어 주었다.

그 다음 날이면 아빠의 흐뭇해하시는 미소, 오빠들의 장난스러운 말, 손톱이 빨갛게 꽃물들인 보며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다. 이게 고향 소쿠리 마을 여름날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이렇게 봉숭아 손톱과 발톱에 꽃물을 들이면서 가족 간의 사랑과 소중함을 느끼면서 행복했던 추억이다.

이제는 이를 앙다물고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 가슴 속에 서려 있는 고향의 토종 봉선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보며 살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딸들의 손톱에도 봉선화 꽃물들이기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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