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

조회 수 6612 추천 수 37 2014.10.06 19:37:30
 
베틀
                                        

  철커덩 철거더엉.
  오늘도 나는 베틀 위에 앉아서 고국을 떠나온 다른 나라의 땅에서 살면서 이민자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피륙을 짜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근본이 되는 정적인 날줄 위에 이민자라는 동적인 씨줄을 북에 담아 적당하게 뿌려주면서 힘차게 피륙을 짠다. 희망에 찬 ‘미주한인’이란 정겨운 베틀가를 부르면서.
  철커덩 철거더엉.
  이민 초기의 나는 거칠고 까슬까슬한 삼대껍질을 벗겨서 만든 실로 피륙을 짜기 시작했다. 강하고 질긴 누런 색깔의 삼실을 북에 담아서 열심히 손놀림하면서 이민 시작의 피륙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이 익숙지 못해서 당황할 때가 잦았다. 때때로 실이 끊어져서 다시금 이으면 그때마다 매듭이 생겼고 힘든 노동으로 한숨과 눈물이 흘러내려 내가 짠 피륙에 진한 얼룩이 지곤 했다.
  새로운 자격증을 따는 데 있어 언어장애 때문에 갖은 고생을 했으며, 또 직장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몇 배나 더 노력해야만 했다. 답답한 가슴은 터질 것 같았고 움츠러들기만 하는 내 영혼의 고통 탓에 피륙이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했다.
  그뿐인가! 햄버거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신토불이 김치와 고추장을 찾아 먼 길을 다녀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연민, 눈물과 외로움으로 짠 피륙은 한없이 느슨했다.
  나의 꿈나무인 아이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가기 시작하니 또 다른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자주 우울해하고 울먹거렸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싶은데 다들 피한단다. 친구를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놀고 싶지만, 부모들이 눈이 옆으로 째진 동양인들과는 놀지 말라고 했단다. 친구들로부터 상처받는 여리디여린 우리 아이들. 이민가정으로서 각박하기만 한 생활전선의 이중성에 시달리던 이민 초기의 삶, 무엇보다 경제적인 안정부터 찾아야 했다.
  아이들 말에 북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너무 들어가서 삼베실이 뚝 끊어져 버렸다. 다시금 실을 잇는 나의 손은 떨렸고 이은 자리는 또 다른 매듭으로 남았다. 북을 잡은 손과 베틀신을 신은 나의 발이 떨려서 제대로 고운 피륙은 짤 수 없었지만, 그래도 허리에 띤 베틀 띠를 더 단단히 묶어 가면서 피륙 올올이 땀과 인내와 희망을 섞어 무지개 꿈을 안고서 열심히 짜고 또 짰다. 
  이때는 내가 짠 천으로 옷을 해 입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에 실보다도 더 질긴 인내를 배웠다. 기다리므로 고달픈 이주민의 한 사람인 나의 베틀가를 부르면서.
  철커덩 철거더엉.
  어느 날부터인가는 하얀 목화송이에서 실을 뽑아낸 따뜻하고 푹신한 무명실로 피륙을 짜기 시작했다. 베틀신, 북 등 베틀에 딸린 기구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더욱더 아름다운 피륙을 짤 수 있는지 차츰 터득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이민가정과 현 생활의 이중성을 인정하고 지혜롭게 생활해 나갔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중요한 진리를 알게 한 신앙생활의 도움이 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자녀를 위해 학교에서 필요한 자원봉사를 했다.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를 보살펴 주기도 하고, 미술 시간에 학부모 교사가 되어 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사군자 그리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학교 오픈하우스 때 가보니 내가 지도해서 그린 학생들의 그림이 교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이 시기에 내가 짠 피륙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철커덩 철거더엉.
  나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서 견고하고 탄탄한 하얀 무명천을 짰다. 나의 꿈나무인 자녀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면서. 그런데 또 한 번 내 인생의 뜻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사고로 입은 상처 때문에 크게 구멍 뚫린 피륙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흠집으로 남아 있다. 응혈 된 피로 말미암아 피륙 일부분이 삭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베틀 위에 앉아서 새로운 피륙을 짜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한 순례자 이주민인 나의 베틀가를 부르면서.
  철커덩 철거더엉.
  지금, 내가 짜는 피륙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은 보드라운 명주실에 상큼한 코발트색 물감을 들인 곱디고운 명주다. 이 명주 한 필을 다 짜고 나면 양장점에 맡겨서 예쁜 옷 한 벌 지어 입을 것이다. 소매가 긴 블라우스와 무릎을 덮는 에이라인 스커트를. 그리고는 아이들이 주관하는 즐거운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이 소망을 갖고 현대적으로 개량된 베틀 위에 앉곤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이민 가정인 것조차 잊은 듯 이곳 미국생활에 동화되어 뿌리에 대한 정체성이 희박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인터내셔널 시대란다. 나는 두렵다. 너무나 토속적인 내 예쁜 실크 옷차림이 아이들이 초대해 주는 세련된 이름의 파티에서 어색하거나 어울리지 않을까 봐.
  그럼에도, 오늘도 나는 피륙을 짜는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면서 베틀 위에 앉아서 코발트색 명주를 짜고 있다. 영원세계에 계시는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쪼록 세상이 평온해져서 사랑스러운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한 여인네로 신기하고 운명적인 나의 베틀가를 부르면서….
  철커덩 철거더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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