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님이 오시네

조회 수 3567 추천 수 2 2015.07.24 10: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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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님이 오시네

 

                                                                                                                                                           정순옥 
                                                                                                                                     

 “ 오! 이제서야 빗님이 오시네~ “
 후드득~ 후드득!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 좋아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향해 두 손 뻗고 함성을 하시던 모습이 내 눈에 어린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빗소리였으면 과묵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젠 살았다’라고 하시면서 그리도 좋아하셨겠는가.
  오랜 가뭄 끝에 들리는 빗소리는, 농부이신 우리 부모님들에겐 가뭄 속에서 목숨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냥 단순한 비가 아니라 ‘빗님’이라고 부르면서 기뻐하시던 우리 부모님들의 울음에 가까운 감격의 음성이, 지금도 하늘에서 내려와 내 가슴을 타고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나는 그때 인간은 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을 절실히 느꼈었다.
   그 빗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져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안에 있는 그릇 중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모두를 내어다가 처마 밑에 놓는 일이다. 처마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그릇그릇에 받아 두었다가 빨래도 하고 청소하는데도 사용했다. 빗님이신 빗소리가 들리면 모든 것들이 풍요로워지고 생기가 돌았다. 두레박으로 물을 조금씩 떠올리던 우물은 빗물로 넘쳐나고, 마을 사람들은 농기구를 들고서 비를 흠뻑 맞으며 들녘으로 나가는 소리로 부산했다. 가뭄 속에서 빗소리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생각해 본다. 꼭 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아 내가 어느 누군가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운 적은 없는지-.
   빗님이신 빗소리는 계절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봄에는 보슬비로 산천초목들을 싱싱하게 눈을 트이게 하고, 여름날엔 소낙비로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가을날엔 가랑비로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게 해 정서를 주고 겨울날엔 진눈깨비로 벌거벗은 나목이 되어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게 하는 인내를 준다. 이렇게 계절을 따라 알맞게 내리는 단비는 사람의 마음을 아늑하고 감미롭게 하여 낭만적인 정서를 주기도 한다. 빗소리가 들리면 좋은 음악을 틀어 놓고 추억 속에 있는 사랑했던 사람과 우산 속에서 속삭였던 사랑의 말들을 다시 들어 보기도 하고 상념에 젖기도 한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는 마음이 차분해지며, 더러워진 몸과 마음도 씻겨서 정화되는 기분이다. 적당하게 주룩주룩 내리는 단비는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다. 나도 누구를 위해서 아름다운 소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빗님이신 빗소리가 천둥·번개에 휩싸이게 되고 사나운 바람에 휘몰아치게 되면 폭우로 변한다. 폭우가 많이 쏟아지면 결국 홍수가 되고 만다. 빗소리가 넘쳐나면 인명피해, 재산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내가 살던 고장에선 홍수가 나면 허술한 오두막집은 지붕이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아예 흙탕물에 휩싸여 집이 무너져 냇가로 둥둥 떠내려가기도 한다. 홍수로 냇물을 건널 수가 없어 학교에 갈 수 없어서 학교는 휴학하고 빗소리가 멎기를 기다린다. 이래저래 빗소리가 너무 오래 나면 장마철이 되어 빗소리가 지긋지긋해지고 모든 활동이 줄어드니 싫어질 수밖에. 내 소리는 어떤가. 지나치게 소리를 많이 내어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는가. 너무 지나친 빗소리 때문에 일어나는 홍수는 너무 빗소리가 들리지 않은 가뭄 때보다도 더 심각한 피해를 낸다고 한다. 남에게 지겹게 들리는 내 소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내 소리보다도 더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는 미국, 몬터레이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 물 한 방울이 아까울 정도로 지독한 가뭄이 들어 난리다. 이런 와중에서도 새로운 친구인 정원에 있는 선인장은 이슬만 먹고도 빨갛고 노랗고 하얗게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 바라보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각종 미디어에선 가뭄이 들어 지구촌이 신음하며, 애가 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해 주기에 바쁘다. 나는 쩍쩍 가라진 논 위에서 푸석푸석한 흙을 만지며 타는 농작물을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늙은 농촌 할아버지 사진이 실린 기사를,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더는 읽을 수가 없다. 그 늙은 할아버지는 곧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물이 있어야 농사를 짓는 시골에선 농부들이 얼마나 애가 탈까 생각만 해도 내 목이 탄다.
  오직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로만 농사를 짓는 천수답(天水畓)을 가지고 있는 산촌 농부들은 날마다 하늘만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안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라도 있는 논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 최상급의 농토다. 피부가 까맣게 타고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양쪽으로 노끈이 달린 커다란 두레박으로 웅덩이에서 물을 퍼 올리는 농부들에겐 빗님이신 빗소리가 신의 소리 같으리라.
    상사병이라도 걸린 듯이 주룩주룩 내 가슴에 내리는 단비 소리가 참으로 듣기에 좋다. 나도 가뭄과 홍수의 틈새에서 아름다운 단비 소리로 남에게 정서를 줄 수 있는 단비 소리를 닮은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느 사람을 위해서 참으로 꼭 필요한 소리가 되어 봤던가. 내 정서까지 메말라 가는 심한 가뭄 속에서 나는 내 인생길에서 낸 소리를 생각해 본다. 내 소리가 있어야 할 곳에서 묵묵부답하여 남의 가슴을 태우게 한 적은 없는지, 내 소리가 너무 커서 남에게 진저리가 나게 들린 적은 없는지를 말이다.
  적당한 시기에 주룩주룩 내려 산천초목을 살리고 희망을 주고 아름다운 정서를 주는 반가운 단비 소리 같이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소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저러나, 빗님이신 빗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에 구름이 일어나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여 비를 내리게 한 것처럼, 이 세대에도 누군가에게 임(臨)하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시방(時方), 으~응? 정말로 빗님이 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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