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

조회 수 3829 추천 수 4 2016.02.02 10: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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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레빗

 

                                                                                                                                                                           정순옥

 


  옛날 어머니가 쓰시던 장롱 밑에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항상 꼭 한 가지가 놓여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머리빗 그릇이었는데 그 속에는 얼레빗, 참빗 그리고 머리 가르마를 타는 가늘게 잘 다듬어진 대나무 꼬챙이가 담겨 있었다.
  얼레빗은 선이 굵고 엉성하고 간격이 넓게 만들어진 굵은 빗이고, 참빗은 가운데로 버팀목이 있어 균형을 잡아주면서 양쪽으로 촘촘하게 빗살이 선을 이루게 한 얇은 대나무 빗이다.
  거울 앞에 앉은 어머니는 기다란 머리를 앞에서 뒤까지 대나무 꼬챙이로 한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양어깨 앞으로 머리를 내려뜨린 후에 복잡한 생활을 가다듬듯 헝클어진 머리를 얼레빗으로 먼저 빗으셨다. 그리고 메마른 삶에 윤기라도 주려는 듯 동백기름을 손에 묻혀서 두 손으로 서너 번 문지른 후엔 머리카락에 촉촉이 바르신 후 천천히 꼼꼼하게 다시금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으셨다. 그 모습이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로움으로 보였다.
  그런 후엔 정성스럽게 빗겨진 머리카락 전체를 한 묶음으로 똬리를 틀어서 뒤통수에 붙이고 옥비녀 은비녀 금비녀를 번갈아 가면서 꽂은 어머니의 낭자 머리는 참으로 단아하고 아름다웠는데 가냘픈 여인의 고단한 삶이 빗어낸 영롱한 예술품 같았다. 한 가닥 흐트러짐 없이 곱게 빗어 낭자를 친 우리 어머니는 손거울을 들고서 요리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셨다. 아버지께서 곁으로 지나치시게 되면 “내 낭자 어때요?.” 하면서 살짝 몸을 움직여 남편의 표정을 살필 때 어머니의 표정은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날부턴가 늘 쓰시던 얼레빗이 하나둘씩 빗살이 떨어져 나가 엉성하여져 가는데도 어머니는 그대로 사용하셨다.
  “머리빗이 오래 쓰니까 내 이빨처럼 삭아서 빠져나간다.”
  “엄마, 그럼 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 새로 사오시라고 부탁하세요.”
  “애~애는 이렇게 쓸 수 있는데 뭐 하러 새로 사느냐? 쓸 수 있을 때까정 써야지 무엇이든지 아껴야 살림이 되지 이까짓 것 별것 아니다 생각하고 그냥 버리기만 좋아하면 살림이 안 되는 것이여.
  많은 자식을 키우시면서 일본강점기의 궁핍을 견디셨고 6․25 동란을 겪어내신 어머님의 몸에 밴 삶의 비결은 오직 ‘절약’뿐이셨으리라. 동란 이후의 가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절약정신을 기본으로 한 새마을 운동에 뒤따라 플라스틱 제품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는 값이 쌌으며 엄청나게 질기고 다양한 모양과 색깔을 가진 플라스틱 제품 중에는 머리빗이 단연 판을 쳤다.
  시장 입구나 가게 어느 곳을 가든지 흔히 눈에 띄는 머리빗이 어느 날 육교를 지나던 내 눈에 유난히 띄었다. 아니 마술에 걸린 것처럼 평생 하나만 사면 끝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머리빗을 두 손으로 세차게 밀쳐도 보이고 두들겨대기도 하면서 선전하는 머리빗 장수의 마법사 같은 흥미로운 소리에 흡입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성글성글하게 빗살이 빠져있는 어머니의 얼레빗이 생각나서 얼른 하나를 샀다.
  그리고 내 지갑에 넣고 다니기에 좋을 아주 작은 얼레빗도 샀다. 하나 사면 평생 쓸 수 있다는 말에 무엇이든지 아끼시는 어머니에게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물을 받으신 어머니는 기쁜 표정으로 받기는 하셨는데 사용하시지 않고 계속 대나무 향이 나는 이빨 빠진 얼레빗을 쓰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어머니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하고 무척 행복해 보였다.
  “느이 아버지가 무심한 것 같아도 내심 자상하시느니라. 얼레빗만 사와도 되는디.”
  5일 만에 서는 장날에 아버지께서 머리빗 한 벌을 새로 사 오셨다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녀자의 행복스런 모습을 나는 그때 들뜬 어머니의 모습에서 처음 보았다. 앞머리 한가운데에 드러난 하얀 가르마와 하얀색 명주로 지은 치마저고리 한복을 곱게 입고 하얀 버선에 코빼기가 나온 하얀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어우러져 눈이 시릴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한 어머니는 내 눈엔 이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미인이셨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의 일이다. 한여름 몹시 따가운 날 시골 사람들이 말하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 소위 햇볕은 쨍쨍 쬐면서도 잠깐 동안 소낙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미장원이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신식바람이 났는지 아니면 남편이 없는 허전함에 견디지 못함이었는지 머리를 싹둑 짧게 잘라 버리고선 파마머리를 하셨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서 기가 막혀 있는 막내딸의 표정이 멋쩍으셨던지 짧은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으면서 “이젠 늙어가니 낭자 치기도 귀찮아서 머리를 잘랐더니 이렇게 더운 날인데도 시원하고 머리 빗기에 편해서 좋다.” 하시며 내 시선을 피해버리셨다.
그 후론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주신 대나무 얼레빗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새로 산 빨강 플라스틱 머리빗을 사용하셨다. 한쪽으론 얼레빗 또 한쪽으론 참빗이 함께 있도록 만들어진 소위 신식 머리빗을.
  머리에 착 달라붙어서 더욱더 까맣게 번들번들 윤이 나게 보이던 낭자 머리를 잘라버리고 푸수수하고 꼬불꼬불하게 지져 붙인 파마머리를 하신 어머니, 그날 나는 세월 따라 어쩔 수 없이 고운 자태가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의 변색하여 가는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프도록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어머니의 숨결도 낭자 머리를 위하여 어머니가 쓰시던 얼레빗도 사라졌지만,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플라스틱 얼레빗을 샀을 때 함께 샀던 내 조그만 얼레빗으로 상처받은 삶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나는 가끔 부드럽게 머리를 빗곤 한다. 특히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이 시간도 나는 대나무 향내에 동백기름이 배어서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엉성엉성 빗살이 빠져나갔던 어머니의 혼(魂)이 어린 듯한 어머니의 손때 묻은 얼레빗이 눈에 어른거리고 참으로 사랑스럽던 어머니의 음성이 되살아난다.
  “버리기만 좋아하면 살림 안 되는 것이여.”
  낡은 머리빗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아끼고 절약하신 것처럼 우리 집 대문가에 찾아드는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끼고 함부로 저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어머니, 그분의 발자취를 생각하게 하는 오래된 내 얼레빗을 손에 들고서 나는 어떤 생활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내 딸에게 어떠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본다.


이금자

2016.02.28 15:44:53
*.17.30.152

 얼레빗을 읽다  보니  마치 과거속에 살고 있는 착각을 하게 하네요.

 빗 한쌍을 선물 받으시고 기뻐 하셨다는 선생님의 어머니.  참으로 욕심 없고 소박하신 분 같아요.

 재미있게 읽고 나갑니다.  큰 문운 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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