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문

조회 수 4912 추천 수 1 2016.06.15 16: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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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리문 


                                                                                                                                                                            정순옥


  눈에 삼삼하게 보이는 싸리문이 있다. 싸릿가지를 성글성글하게 엮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연결되어 출입할 수 있게 만든 빗장이 없는 낮은 문이다. 문이 울타리에 붙어 있을 수 있도록 새끼로 고리를 만들어 살짝 안과 밖을 구분해 놓았을 뿐인 출입문. 이웃과의 예의를 지키면서도 소중한 사람들 간에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정이 듬뿍 오가던 문. 시골 초가집 지붕과 함께 참 잘 어울리는 내가 언제나 간직하고 싶은 참으로 정겨운 고향집 싸리문이다.
  이 싸리문은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봄날이 오면 싸리나무 울타리에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꽃처럼 나의 꿈도 피어나게 하던 문이다. 눈 부신 햇살이 싸리나무 울타리를 덮는 여름이 오면, 활짝 피어난 호박꽃 속을 넘나드는 벌 나비처럼 나도 활기차게 집 안팎을 드나들게 하던 문. 가을이 되면 싸리문 밑으로 뒹굴던 낙엽이 좋아서 맴돌다 가기도 하는 문. 겨울이면 함박눈을 맞으면서 나를 포근히 기다려 주었고, 싸리문 주위의 잔설은 모악산 봉우리에 있는 잔설을 불러내어 서로 화답하면서 내 가슴에 정서가 서리게 하던 문이다.
  야산의 맑은 정기를 품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연결된 싸리문은 나즈막해서 사람들이 오가다가 한 번쯤 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울 안에 있는 사람도 마주 보고서 정답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아주 사랑스러운 문이었다. 시골 인심이 듬뿍 배인 쑥떡을 담은 그릇을 들고서 문고리를 살짝 벗기고 들어서는 친구가 반가워 멍멍개도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던 싸리문이 고향에 있었다. 너와 나의 한계성만 살짝이 알려 주고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나즈막하게 만든 싸리문은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평화로운 문이다.
  고학년이 되어 도회지로 주거지를 옮겼다. 내 눈에 띄는 드높은 돌담들, 시멘트블록으로 쌓아 올린 높은 담장 위에 날카롭게 깨진 유리조각이나 철조망이 있는 담벼락을 따라 달린 육중한 나무나 철재 대문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빈부의 차이를 말해 주기라도 하듯이 불법침입자를 막기 위해 빗장으로 꼭꼭 잠근 높다란 대문은 사람들의 인심이 차가워져 가는 모습처럼 보여 내 마음속도 답답하고 차가워졌다. 나는 기와지붕과 함께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는 대문 안에 사는 사람을 보고 싶어도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어 망설이면서 시골집 싸리문을 그리워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미국에 오니 집집마다 사립문이 없어 참 좋았다. 문 걸어 잠그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넓은 초록색 잔디밭에 확 트인 공간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활짝 열린 공간은 이웃 간에 쉽게 소통할 수 있어서 좋을 거라 생각 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았다. 서로 바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고, 얼굴을 본다 해도 서로의 문화가 다르니 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집이 너무도 개방되어 있어 지나가던 개가 똥오줌을 누고 가는 일이 잦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사립문이 없을 뿐이지 방문은 이중으로 잠겨 있는 집이 많고, 어떤 집은 전기 시설로 불법 침입자를 막고 있는 집도 있음을 알고 난 뒤, 나는 우리 집 정원에 빗장이 없는 나즈막한 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싸리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웃과 다정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진 빗장이 없이 고리만 걸어 둔 아늑함을 주는 싸리문이.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로 무한정 자유가 허락되는 것 같으면서도 오롯한 대화를 나누기가 힘든 이방인의 생활이 아닌가 싶다.
  상긋한 향기가 나는 귀여운 분홍색 싸리꽃이 만발했다 떨어질 때면 마을 누군가의 집에서 새 싸리문이 만들어지던 고향 마을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이중문화 속에 살지만, 어느 날엔가는 우리 집 앞뜰에 나즈막한 싸리문이 만들어지는 꿈을 가져 본다. 어느 사이에 내 마음도 낮은 싸리문이 되어 누구라도 정겹게 맞이하고 싶어진다. 너와 나의 한계성은 분명히 있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정서적인 싸리문이 내 이민생활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꼭꼭 문빗장이 잠긴 육중한 대문보다는 싸리나무로 성글성글하게 엮은 싸리문에 문고리만 살짝 걸쳐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내 가슴 속에 있는 싸리문 너머로 나를 찾기 위해서 기웃거리는 이웃들의 따스한 모습이 아른거린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마른 싸리나무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빗장이 없는 싸리문은, 나에게 아름다운 이웃들과 오손도손 정서적인 소통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소싯적 그리움이 서린 싸리문을 내 가슴 속에 달게 되니 이리도 포근하고 평화스러운 것을---.       
  싸리문은 생각만 해도 인정스런 이웃의 따스한 입김이 이마에 스치고, 정다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너와 나의 한계성만 구분해 두고 가까운 정을 나눌 수 있는 싸리문. 세상살이의 즐거움을 주는 싸리문을 생각만 해도 나는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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