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

조회 수 3932 추천 수 1 2016.08.14 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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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터
                                                                                                                                                                      정순옥


  이곳이다. 빨래터. 우리나라가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된 원천(源泉) 말이다.
  지금은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생활풍경엔 여인네들의 삶의 터전인 빨래터가 있다. 동네 우물가에나 물이 흐르는 시냇가, 또는 저수지에서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 더러워진 옷가지들이나 각종 물건을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금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내는 곳이다. 우리 민족이 순결한 백의민족으로 불리게 한 아름다운 생활풍경이다. 순결하고 정갈한 마음은 순백의 한복을 즐겨 입던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유산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 민족처럼 깨끗하고 단아한 미(美)를 창출해 내는 민족은 없다. 물에 빨고 빨아서 더러워진 옷가지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또다시 양잿물로 삶아서 밝은 햇살 아래서 광택을 내게 하는 빨래터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서 일상생활의 이야기꽃을 피우던 빨래터가 자꾸만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아낙네들의 사랑방 같은 빨래터에 가 보고 싶다. 내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싶을 때는 더욱더 그렇다. 수많은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서 빨래하는 곳. 특히 전주천을 따라서 있는 빨래터에서 빨래한 후에 큰 가마솥에 양잿물을 넣고 푹푹 삶아진 하얀 무명 이불 호청을 햇빛 아래서 바람에 말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을 전주에서 보냈기에 전주천을 자주 보면서 살았다. 가장 아름다운 여고 시절에 전주천 둑을 따라서 맑은 물과 빨래터를 바라보면서 자주색 교복 치마 속으로 미풍을 맞으며 홀로 걸을 때 느꼈던 그 상쾌하고 즐거웠던 기분은 내 평생 지니고 싶은 행복함이다.
  시냇가에서 여인들이 모여 앉아 빨래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박수근 화가의 ‘빨래터’를 늘 생각한다. 한국사람이 그린 그림으로는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에서 팔렸다니, 우리 민족성을 대변해 주는 그림이 아니겠는가 싶다. 한국적인 화강암 질감으로 한국적인 소재를 그린 화가, 참 자랑스러운 화백은 빨래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순결하고 정갈한 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빨래터에서는 서민의 애환 보다는 풍류적인 색채가 많은 걸 보면, 여인네들의 흥미로운 얘깃거리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기에 그랬을 성싶다. 여인들이 긴 머리카락을 감기도 하고 달빛에 속살을 내놓고 목욕을 하기도 했기에 남정네들이 기를 쓰고 훔쳐보고 싶기도 했을 거다. 시집살이의 고충으로부터 사랑방 이야기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이 빨래터.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인들이 더러워진 옷가지들만 빨아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찌든 몸과 정신적인 찌꺼기들까지 정화하는 곳이었기에 여인네들의 삶의 터전이요,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 된 원천이 아니겠는가.
  백의민족이면서도 동방 예의지국인 우리 나라는 빨래터에서도 은근한 예의가 있다. 냇가에서 맑은 물길을 따라 빨래를 할 수 있는 돌을 차지 할 때도 서로서로 배려하여 자리에 앉는다. 흰 색이나 비교적 가벼운 빨래를 하는 사람은 물줄기 윗쪽에 앉고, 옷에서 물감이 빠지거나 똥이 묻은 기저귀를 빨때는 아랫쪽으로 앉는다. 그뿐인가! 시집살이의 한을 풀어 내면서 빨래방망이로 빨래를 후려찔 때는 옆사람이 다치치 않도록 가급적이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다. 정감 넘치는 우물가에서 빨래를 할때는 줄줄이 골을 내어 우둘투둘하게 만들어진 빨래판 위에서 빨래에 비누칠해 북북 문질러 얼룩을 빨기도 한다. 어느새 깨끗하게 빨아진 빨래를 펼쳐서 바라보는 여인네의 마음이 빨래 보다도 더 맑고 깨끗해져 서로 만난다. 이 깨끗해진 마음이 살아 움직여 나라를 형성하는 가족들을 돌보왔기에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라 칭함을 받지 않았나 싶다.
 지금 시대는 세탁소나 대부분의 가정엔 세탁기가 있어 기계로 빨래를 한다. 그 시간에 대부분의 주부들은 조용한 시간을 가져서도 좋지만 빨래터에서 느끼는 풋풋한 삶의 향기를 맛볼 수가 없어 외로워지기가 쉽다. 이 시간에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하면서 정신을 정화시키지만 팽팽한 삶의 리듬이 주는 맛이 없어선지 나는 가끔씩 빨래터가 그립다. 촌스럽다는 말을 듣는게 일쑤인 나는 지금도 하얀 목화솜 이불을 선호한다.  때에 따라서 이불 호청을 표백제를 넣고 빨아 인스탄트 풀을 뿌리고 다리미로 대린 후에 덮을 때 들리는 바삭거리는 소리는 빨래터에서 바람에 빨래 말리는 소리로 살아난다. 삶의 향기가 풀풀 살아나는 정갈스러운 소리로 들려 내 마음도 하이얀 목화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고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빨래터의 여인네들은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옷에 묻은 때와 얼룩을 인내를 갖고 힘들게 주물러 씻어 내면서 어느사이에 마음의 때와 얼룩들도 함께 씻어낸다. 깨끗하게 빨래를 하는 정성스런 마음은 진실한 삶의 발견으로 목화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인생의 꽃을 피워 내고 있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흰 색을 선호해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될 수 있었던 원천은 빨래터의 힘이 크다. 더러워진 옷들을 빨고 또 빨아 깨끗하게 만드는 빨래터에서 만나는 마음들이 모이면 우리들의 인생살이도 깨끗해 지지 않겠는가. 백의민족답게 모든 사람들이 몸도 마음도 생활도 항상 정갈했으면 좋겠다. 가끔 세상살이의 찌들은 옷을 빨고 싶어 전주천에 있는 빨래터가 생각 날 때는 하얀 이불호청이 바람에 날리고, 빨래방망이 소리,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내 귀를 즐겁게 해 준다. 그리고 내 마음이 아름다운 목화꽃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빨래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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