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쥐의 꾀 / 고상안

조회 수 1294 추천 수 2 2017.03.12 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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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쥐의 꾀/효빈잡기(效嚬雜記)


                                                                                                   고상안


옛날에 음식을 훔쳐먹는데 귀신이 다된 쥐가 있었다. 그러나 늙으면서부터 차츰 눈이 침침해지고 힘이 부쳐서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무엇을 훔쳐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젊은 쥐들이 찾아와서 그에게서 훔치는 기술을 배워 그 기술로 훔친 음식물을 나누어 늙은 쥐를 먹여 살렸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쥐들이 말했다.

"이제는 저 늙은 쥐의 기술도 바닥이 나서 우리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리고는 그 뒤로 다시는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늙은 쥐는 몹시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솥 속에 넣은 다음 무거운 돌로 뚜껑을 눌러 놓고 밖으로 나갔다. 쥐들은 그 음식을 훔쳐먹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 쥐가 말했다.

"늙은 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그게 좋겠다"고 하고는 함께 가서 묘안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늙은 쥐는 화를 발끈 내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서 기술을 배워서 항상 배불리 먹고살면서도 지금까지 나를 본체만체했으니 괘씸해서라도 말해 줄 수 없다."

쥐들은 모두 절하며 사죄하고 간청했다.

"저희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잘 모실테니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늙은 쥐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일러주마. 솥에 발이 세 개 있지? 그 중 하나가 얹혀 있는 곳을 모두 합쳐서 파내거라. 몇 치 파내려가지 않아 솥은 자연히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그러면 솥뚜껑은 저절로 벗겨질 것이다."

쥐들이 달려가서 파내려가자 과연 늙은 쥐의 말대로 되었다. 쥐들은 배불리 먹고 돌아오면서도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늙은 쥐를 대접했다.


아, 쥐와 같은 미물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있어서겠는가! 이신의 계책이 노장 왕전의 심사숙고함에 미치지 못했고, 무현의 지모가 충국만 못했으니,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사리 판단이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다만 전쟁터에서 병사를 부리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도 젊은이가 어른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나라 목공이 "어른에게 자문을 구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가 되어 가는 꼴을 보면 국권은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만 맡기고 늙은이들은 수수방관하며 입을 꼭 다문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다 요긴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도리어 견책이나 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을 앞에 말한 쥐의 일과 견주어 보면, 사람이 하는 짓이 쥐가 하는 짓보다 못하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고상안(高尙顔)

1553(명종 8)∼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 이후 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 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그의 소작이라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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