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만큼 점 수 받은 날

조회 수 1200 추천 수 0 2014.12.05 08:31:23

 콩만큼 점수 받은 날

                                                        이 숙 이

 

  나이 탓인지 불면증세가 이따금 찾아온다. 아픈 곳은 없는데 나른해지며 뒤척거리다 늦잠 자는 횟수가 부쩍 잦아졌다. 온종일 낮잠도 안 자고 부지런을 떨었는데 새벽까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늦게 잠이 들었다. 아침인데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 침대 위에서 마냥 뒤척인다. 그런데 남편이 양복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부부는 교회 갈 때 말고는 정장할 일이 거의 없다. 시대가 변한 탓에 교회에도 평상복을 입고 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특별한 날, 예를 들면 길흉사 초청, 부활 주일, 감사 주일, 성탄 주일, 남편의 대표기도가 있는 날은 반드시 양복을 입는다. 나는 ‘이상하다. 왜 남편이 양복을 입고 있지.’ 생각하면서 커피부터 마셔야겠다 싶어 부엌으로 갔다.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남편의 모습을 보자, 어이쿠 교회에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남편이 대표기도가 있는 날이다. 이 모든 것을 깜빡하고 잊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불가능했다. 커피고 뭐고 식탁에 있는 땅콩이 눈에 띄어 한 줌 쥐고는 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치아가 약한 남편은 넛(nuts) 종류는 먹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땅콩을 남편에게 권했다. 미안하다는 시늉을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 대표기도 있지?”
  “…….”
  남편은 이미 삐쳐 있다. 남편과 같이 있을 때 이유 없이 끼니를 거른 적은 50여 년 가까이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요즈음 군기가 많이 빠져 있나 보다. 남편의 아침을 거르게 하다니, 더구나 오늘은 대표기도가 있는 날인데 말이다.
  남편은 멋있는 풍채는 아니라도 이렇게 측은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기운이 없어 보인다. 나이가 들면 먹는 힘으로 산다는데 차라리 나를 깨우지, 아니면 냉장고를 열어 뭐라도 먹지, 뭘 했나 앙탈 부리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의 대표기도가 첫말은 들리고 뒷말은 흐물흐물 안 들리는 게 아니한가. 큰일이지 싶다. 좀 간단하게 기도를 끝내면 좋으련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길기도 하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남편에게 죄송해지기 시작했다. 땀은 이내 눈물로 변해 소리는 못 내고, 밥 못 먹인 죄송한 마음에 눈물만 흘러내렸다.
  예배가 끝나고 교제시간이다. 나는 많은 성도 앞에서 이실직고했다. 아침밥을 굶겼더니 대표기도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목사님을 비롯해 자초지종 사연을 들은 교인들은 배꼽을 잡는다. 다들 “대표기도해야 할 막중한 남편을 굶기고 먹지도 못하는 콩을 권한 마누라의 상급은 콩만큼만 받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에 “오늘만큼은 콩만큼 점수 받아도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보다는 교우들과의 화제는 불면증에 관한 이야기다.
  불면증을 경험한 사람의 고충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처방법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처방 중 유독 호박씨와 늙은 상춧대를 달여 먹는 방법이다. 여린 기간이 지난 상춧대가 하얀 진이 나올 때쯤 상추를 뽑아, 뿌리 부분의 흙을 깨끗이 씻은 다음, 그늘에 말려 두었다가 끓여 먹으면 불면에 도움된다는 민간요법에 눈이 번쩍 띄었다.

  교회공동체의 필요성과 사랑을 새삼 느껴 본 주일이라 싶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오늘, 내가 미안했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운전대 잡은 남편의 입 가장자리는 천정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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