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송이

조회 수 1510 추천 수 1 2018.04.01 23: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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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꽃송이


                                                                                                                                                            정순옥


하얀 눈꽃송이- 삶의 환희를 느낀다.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오는 하얀 눈송이도 아름답지만, 하늘에서 펑펑 내려와 겨울나무 위에서 겸손하게 군락을 이루어 만들어진 눈꽃송이는 참으로 더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하여 신에게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꽃송이를 단 한 번만이라도 피워 낼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 )이 만들어 낸 미()의 완성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은혜라 생각한다. 나에게 삶의 환희를 준 눈꽃송이처럼 나도 한평생 살면서 누군가에게 하얀 눈꽃송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소녀에서 처녀로 생리적인 탈바꿈 할 때 삶의 환희를 준, 겨울 마당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참사랑이 모여 만들어진 겸손하고 탐스러운 하이얀 눈꽃송이처럼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어서인지 사계절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 겨울철에도 꽃이 피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나에게 동부 보스턴에서 살고 있는 문우, 언제나 친절한 금자 시인한테서 참으로 멋진 설경을 담은 사진들이 카톡으로 왔다. ~~, 정말 멋있다. 너무너무 멋진 사진 속의 설경을 감상하는 내 심장에 새로운 세포들이 살아나 통통 뛰는 것 같이 감동을 주는 수많은 사진 중 내 마음을 앗아가 버린 사진, 사철나무 위에서 눈꽃들이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고 성스럽게 피어 있는 눈꽃송이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느낌 속에 나의 사랑의 계절에 보았던 삶의 환희를 준 눈꽃송이가 눈에 어린다. 첫눈이 수북이 내린 그 해, 시골집 마당에서 아버지의 겸손한 참사랑이 피워 낸 탐스럽고 성스러운 하이얀 눈꽃송이가.

시간에 흔들리며 떠오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초가집 속에서의 설렘과 교회당 모퉁이에서 서럽게 울던 하얀 눈물을 추억 속에서 펼쳐본다. 노년이 되어서도 표현하기가 조금은 쑥스러운 여성만의 특성인 매달 치러야 하는 생리가 있다. 온몸의 신경이 떨리는 설렘과 부끄러움 속에서 초경을 맞이했다. 아랫배가 더부룩하고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때 발견한 붉은 초경의 놀람과 가슴 두근거림은 나에게 추위에 얼어붙어 손이 닿는 순간 쩍쩍 들러붙는 느낌을 주는 방문 고리를 만지게 했다. 밖으로 나오니 낮부터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한 첫눈이 함박눈으로 변해 평화가 고요하게 넘치는 넓은 마당에 내리고 있었다.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겨울나무에 겸손하게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환상적인 하이얀 눈꽃송이에서 나는 신기하게도 삶의 환희를 느끼고 있을 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 ~, 첫눈이구나. 첫눈이 이렇게도 많이 내리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다.” 내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알아챈 아버지가 나에게 안도감을 주시기 위해서 안방 문을 열면서 조금은 흥분된 어조로 하신 말씀이다.

전깃불도 없던 시골집엔 뒷간 혹은 칫간이라고 불리는 화장실이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넓은 마당 한구석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밤이면 사람들이 말하는 몽달귀신이 나올 것 같아 늘 머리가 쭈뼛쭈뼛해지고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 간다. 우리 집에선 밤이 되면 달항아리처럼 예쁘게 생긴 요강을 마루 한쪽에 늘 두고 있기에 소변은 문제가 없었는데, 대변을 보려면 언제나 아버지가 마당에 서 계셨다. 내 사춘기 때, 초경이 시작된 그 다음 날도 나는 잠을 설치고 요강 위에 앉아 있으니 뭉클하게 핏덩이가 배출됨을 느꼈다. 첫 경험이라 나는 무척 당황했고 이른 아침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요강을 비우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후끈거리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도록 온 신경이 곤두세워져 안절부절 새벽을 기다렸다.

방문 창호지가 환해 질 무렵 나는 가만히 얼음장같이 차가운 무쇠 방문 고리를 열고 방을 나섰다. 그때에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도 들렸다. 나는 설광 속에서 뽀독뽀독 눈 위를 걷는 소리를 혼자 들으며 요강을 비우기 전에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재래식 화장실인지라 두 다리를 구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함박눈 구경을 할 요량으로 듬성듬성하게 짜인 화장실 판잣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뿔싸,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 눈에 확 들어온 모습은 아버지였다. 하이얀 한복을 입으신 아버지가 달항아리 같은 요강을 두 손으로 보듬고서 고개를 조금 숙인 체 조심조심 하이얀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하고 계셨다. 순간적으로 나는 느꼈다.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게 내 붉은 피가 오줌에 섞여 있는 요강을 비우려고 화장실 옆 회색 재가 있는 곳을 향하고 있음을. 나는 그때 따스하면서도 속 깊은 아버지의 참사랑이 모여 겸손하게 피어난 하이얀 눈꽃송이를 보았다. 나는 요강을 보듬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와 성이 다른 남자라서 부끄러우면서도, 겸손한 하이얀 눈꽃송이로 보이는 아버지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참사랑을 받고 있다는 행복감과 생의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아무한테도 내색하지 않으신 진실된 사랑이 보석으로 변해 내 가슴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내 생애에 아버지께서 피운 눈꽃송이처럼 겸손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미주이민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해 드리지 못한 소중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교회당 모퉁이에서 서럽게 울었던 그 시절을 상기해 본다. 이 세상에서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해 주셨던 겸손한 하이얀 눈꽃송이, 아버지를 영원세계에서 만나면 나는 꼭 말하리라. “첫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던 그날, 내 붉은 초경의 부끄러움을 어느 사람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던 속 깊은 은밀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었노라고. 추워서 오돌 거리던 겨울날, 부끄러움에 움츠려진 나의 가슴속에 참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소담스러운 하얀 눈꽃송이 되어 피어난 아버지의 참사랑은 신기하게도 나에게 삶의 환희를 주었노라고.”


이금자

2018.04.03 14:04:51
*.119.80.80

고침: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동북부  보스톤입니다. ㅎㅎ

내가 보내드린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 눈 사진을 보시고.  살아쟁전의 아버님을 생각 하셨군요.

선생님의 글 중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아버지인것을 보니 어릴 때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초경을 사춘기 때 치르시고. 그것을 아버님이 버리시고.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도 19세 겨울방학 때 시골가는 버스 안에서 초경을 맞이 했는데.  그때의 서툰 뒷처리 때문에 아버지에게

먼져 들켰던 생각이 납니다.   고향 냄새가 듬뿍 묻어나는 글 잘 읽고 나갑니다,

建强하시고 幸福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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