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센 머리카락 인생

조회 수 7775 추천 수 1 2014.12.13 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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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센 머리카락 인생
                                                                                                  

                                                                                                                                                     蒑池    정순옥

                                                      

  드물게 보는 억센 머리카락이란다. 이 지역에서 멋쟁이 권사님으로 통하는 박 권사님이 손가락을 활짝 펴 풍성한 머리카락을 만지시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어 가슴 아프고 힘들게 살았던 한 여인의 억센 머리카락 인생이, 삶의 무늬가 되어 손가락을 따라서 잔잔한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미용사가 그러는데 이렇게 억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드물데. 태몽 꿈도 이상하게 부스스하게 털 많은 수탉이 우리 집 마당에 가득했다더군. 그래서 팔자가 센가 봐. 나는 이 사회에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 그래서 남은 인생은 죄를 갚으면서 살아야 해. 지금까지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억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화사한 미소에 곱게 화장한 얼굴과 조화를 이루어 지금도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구십 수를 바라보시는 권사님을 멋져 보이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나는 가발로 착각할 만큼 풍성한 머리카락에 외모를 멋지게 꾸미고 다니시는 멋쟁이 권사님이 마음도 멋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게 변화된 마음으로 숨기고 싶은 억센 머리카락 같은 인생사를 한 편의 드라마를 이야기하듯이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마음이.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하늘나라로 떠나버리신 세상은 공허했다. 그렇지만 윤기나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이화여전 다니던 시절까진 이 세상에서 재물은 부러운 게 없었다. 은행을 가진 아버지가 계셨기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한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일어나기 전날도 애인과 함께 한강에서 배를 타고 청춘을 즐길 정도였다. 그 후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 노처녀가 되게 한 첫사랑은 많은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이북으로 끌려가 흑백사진 한 장만 남겨두고 지금까지 무소식이다. 
  아버지는 은행은 인민의 피를 착취한다는 죄로 이북으로 납치된 후 무소식. 1953년 이 차 후퇴 때 춘천이 회복되어 흩어졌던 가족도 찾고 여경으로 취직도 되었다. 그 시절에 억지로 선을 보아 약혼했던 남자에게 단 한 번 속살을 보여준 역사가 운명을 바꾸어 놓은 셈이다. 한국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억센 철조망으로 된 삼팔선이 가까운 고지에서 군복무하고 있는 결혼 날짜가 잡힌 약혼자를 찾아갔을 때, 이성理性이 마비될 정도로 아름다운 함박눈이 너무 많이 내려 여관에서 묵게 되어 일어난 일이다. 
  약혼자는 알고 보니 어느 마담과 동거하고 있는 사이였다. 미련도 없이 사주 보따리를 그의 누나 집에 갖다 주고서 새벽 4시에 서울로 올라왔다.
 새로운 직장이 필요했는데 다행히도 예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 부평에 있는 PX에 취직할 수 있었다. 영어가 부족하여 새벽 2시까지 공부하며 아침에 출근할 정도로 겨우겨우 직장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청천벼락이랄까! 어느 날 임신 5개월이 된 것을 알았다. 낙태시키기엔 너무 늦은 시기여서 출산을 했는데 솟아낸 피보다도 더 붉은 상처의 흔적을 품고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이 애가 소아마비를 앓아 3살까지 서지를 못했다. 장애아를 보듬고서 죄인처럼 사는 미혼모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던지 아이와 함께 자살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짓도 못했다. 
 PX에서 열심히 일했더니 인정을 받아 육군 인사과로 이동되니 생활이 넉넉해졌다. 승진함에 따라 미군 부대 사무직에 일하게 되자 부하 직원이 생겼는데 총각인 하사병이었다. 장애인 복지가 천국이라는 미국에 가면 장애인 딸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위에 힘입어 젊은 미국사람 부하직원을 초대해서 딸아이를 보여주며 사정을 하여 결혼하였다.
  미국에 와서 딸과 아들을 낳고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딸도 장애인 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인지라 학교생활도 무난했다. 그런데 군대 생활을 하는 젊은 남편이 필리핀으로 파견을 나가선 바람을 피웠단다. 이유는 나이가 많고 상사였던 부인이 항상 어렵고 부담스웠다나.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직장 생활하며 애들 셋을 아파트에서 키우는데 집이 있어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새집을 산 것이 무리였다. 비행장 시큐리티 패트롤로 15시간씩 일을 해도 생활이 점점 어려워져 그 당시에 집세를 감당할 수가 없어 5년이나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고 졸라댄 이혼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애들 셋 결혼시키고 노년의 행복한 삶을 선사해 준 남편은 세 번이나 심장 수술을 한 탓인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 권사님은 이 시절 유치원 시절부터 알기는 했으나 소홀히 했었던,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주님 곁으로 온전히 돌아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됨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하신다. 
  오늘날 박 권사님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신앙인의 본을 보이며 선한 생각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참 멋쟁이시다. 이 세상에서 숨 쉬는 동안에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통일, 납북된 아버지는 돌아가셨겠지만, 첫사랑을 만나보는 일이다.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는 흑백사진들을 보는 눈망울은 언제나 촉촉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이산가족의 슬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조국에 남겨둔 채 이민생활 하는 나 자신을 본다. 
  날마다 알게 모르게 이 세상에 지은 죄가 너무 커 부끄러움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볼 수도 없는 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으면 살아있을 수 없는 나다. 핏덩이를 토해낼 정도로 너무나 괴롭고 슬퍼서 명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의 괴로워하는 인물을 표현한 <절규>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았던가. 삶의 모양만 다를 뿐이지 공기를 마시듯 죄와 함께 살면서, 어렵고 슬프고 가슴 아팠던 일들이 더 심했던 내 인생살이가 한 편의 소설 같은 멋쟁이 박 권사님의 억센 머리카락 인생사에 오버랩 된다. 나는 어느새 손가락을 펴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르며 쓸어 올리고 있다. 머리카락을 감지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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