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글 먹는 여자 (단편소설)

조회 수 69 추천 수 0 2020.09.12 12:28:35

  

 

베이글 먹는 여자

 

 

이경미

 

 

 

 아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성국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통 그런 내색은 없었는데 아내가 다 알고 있는 걸까?

 할 얘기가 있으니 급히 만나자거나 회사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으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친구들은 종종 있지만, 보통 문자를 보내온다. 바쁘다고 하거나 회의 중이라고 둘러대며, 섭섭한 표정의 이모티콘 몇 개 날리면서 대충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은 다르다.

 “당신, 지금 바빠요?”

 아내 은유는 문자가 아닌 전화를 택했다.

 “당신이 갑자기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네, 할 말이 있어요. 시내까지 나왔어요. 잠깐 만나요, 우리.”

 집에서 할 말이 아니니 아내가 나왔을 것이다. 당연하다. 성국은 아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내, 라고 성국의 핸드폰에 이름이 뜬다. 은유는 성국과 통화 하면서 만날 장소를 문자로 보냈다. 정확한 주소와 내비게이션 링크까지 함께.

 “베이글? 빵집에서 만나자고?”

 “빵집 말고요, 베이글이에요, 베이글집. 일단 그리로 와요. 와서 말해요.”

 

 

***

 

 은유에게 베이글은 특별하다.

 10년 전 남편 성국의 외도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베이글이라는 먹거리를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간통죄가 엄연한 죄목으로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라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성국은 지방 근무나 해외 장기출장 등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육아는 은유 혼자의 몫이었다. 남자아이 쌍둥이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하면서, 암 초기의 시어머니와 반신불수 시아버지의 병간호로 자신의 하루 전부를 가족을 위해 내어놓았던 시기였다. 

 은유는 초등학교 6학년 쌍둥이를 등교시킨 후 서울 변두리로 옮긴 시부모를 찾아가 살림살이 이것저것을 챙기는 것은 물론, 상주하는 요양간호인을 도와 시아버지의 아랫도리를 씻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좋은 며느리였다.

 “공기 좋은 데로 이사한다고 이리 멀리 와서 너를 더 고생시키는구나. 나도 힘에 부쳐 못하는 일을! 남사스럽게 딸도 아니고 며느리인 너에게…. 내가 못 할 짓을 시키는구나.”

“어머니도, 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은유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시아버지의 아랫도리를 닦을 때마다 시어머니 심씨는 안절부절 미안해서 어쩔 바를 모르곤 했다.

 

 은유는 성국의 외도 사실을 처음 확인 한 날에도 어김없이 시아버지의 좌욕을 돕고 아랫도리를 닦았으며, 닦다가 울음을 토해버리고는 그녀의 울음과 시아버지의 오줌이 비누 거품에 섞여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날 그런 은유에게 위로가 된 것은 심씨의 말이었다. 

 보통의 시어머니라면 ‘참아라, 아이들을 봐서라도 살아라, 하나도 아니고 쌍둥이 아니니, 어린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다 지나간다, 네가 한 번만 눈감아주면 된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심씨는 달랐다.

 “얼마나 힘들겠니. 미안하구나. 시간을 갖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다만, 너의 결정을 존중하고 너를 도우마.”

 심씨의 이런 마음에 은유는 감동했고 시간을 가지려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익스트림 스포츠를 시작했다. 명상수련원에서 하는 요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정신상담사나 변호사를 찾아다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먹는 게 문제였다.

 과식, 폭식, 과음도 문제지만 은유는 무언가를 씹어야 견딜 수 있었다. 은유는 몸속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참을 수 없는 화를 먹거리를 씹으면서 견뎌냈다. 무언가를 집어던지거나 폭력적이고 즉흥적인 과격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처음에는 은유가 평상시에도 좋아하던 구운 오징어나 쥐포를 뜯어 먹었다. 질기고 딱딱한 오징어를 씹는 것이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금세 오징어는 부드러워지면서 비린내만 남기고 사라졌다. 

 떡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일단 무언가를 씹고 싶지만, 아귀가 천근만근같이 무겁고 뻐근할 때면 떡이 생각났다. 그러나 어금니에 달라붙어 끈적끈적 늘어지는 식감이 기분을 더 가라앉히곤 했다. 

 누구의 생 살점을 씹는 양으로 고기를 뜯는다거나, 무말랭이같이 꼬들꼬들하고 사각사각 소리 나는 반찬이나 생쌀을 씹기도 했다. 특히 생쌀을 씹을 때 윗니와 아랫니를 잘 맞춰 씹지 않으면 치아가 엇갈려 부닥치고 턱에서 굉음이 날 때도 있었다.

 이것저것 씹을 거리를 찾다 지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이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런 은유에게 혜성처럼, 아니 운석처럼 나타난 베이글. 베이글은 그녀의 결혼생활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쌍둥이는 은유의 절친인 수아가 운영하는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 학원의 원어민 교사가 뉴욕 여행을 갔다 오면서 가져온 베이글을 수아는 쌍둥이 편에 몇 개 보내왔다. 하나씩 랩에 싸서 얼린 채로. 먹기 전날 해동시켜서 살짝 데워 크림치즈랑 곁들여 먹으면 맛있노라 했다.

 은유는 밀가루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돼 그리 반갑지는 않았지만 먹어보기로 했다. 윗니 아랫니 배열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턱뼈가 삐끗하거나 아귀가 뒤틀려질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있는 힘껏, 죽을힘을 다해 베이글을 씹었는데 그 힘을 베이글이 다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모든 치아를 동원해 발악이라도 하는 듯 베이글을 씹어 물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닿기는커녕 사이에 폭신한 솜이불이라도 깔아놓아 양 아귀 근육은 반동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라가게까지 했다. 미소를 지을 때 쓰는 얼굴 근육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수아 샘, 고마워. 베이글 잘 먹었어.”

 은유는 수아가 아무래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원장인 까닭에 호칭에 신경이 써지곤 했다. 쌍둥이 앞에서는 수아 샘이라고 불렀다. 

 “별말씀. 맛있었니? 뉴욕 정통 베이글이라며 우리 에밀리 샘이 가져온 거야.”

 “혹 더 있어?”

 “아니, 어쩌지. 다 나눠주고 없는데. 네가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남겨놓을 걸 그랬네.”

 수아는 에밀리 샘에게 물어 외국인들이 잘 가는 서울 시내 베이글집 몇 군데를 소개해주었다. 외국인 입맛에 맞으면 진짜 베이글이라고 했다. 은유는 시내 유명한 베이커리를 찾아다니며 베이글을 사들였다. 크림치즈를 발라 먹으면 씹을 때 치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 싫어서 살짝 토스트만 해서 먹었다. 매일 먹었다. 

 

  매일 베이글을 먹으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 들켰는데, 이상한 일이다. 은유는 조금씩 행복하기까지 했다. 은유는 그녀가 느끼고 있는 배신감이나 울분을 섞어 악을 다해 물어 씹을 때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받아내는 베이글 덕분이라고 믿었다. 쫀득쫀득한 식감에 한 번도 찢어지지 않고,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보호하는 질긴 질감. 아귀에 힘을 다 빼게 하고 입꼬리를 올라가게 하는 근육을 늘 자극하는 부드러운 맛. 버터 범벅인 크로아상이나 기름에 튀겨낸 도넛츠랑은 비교가 안 되는 담백한 맛. 심심한 공간을 많이 가진 정직한 맛. 은유에게 베이글은 엄청난 치유의 먹거리가 되었다.

 하루에 한 끼, 베이글만 먹기를 일주일.

 은유는 자신의 마음이 왜 그리도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답은 의뢰로 간단했다.

 은유는 성국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 성국의 외도 사실을 확인한 지 한 달이 지나고, 은유는 다시 시아버지 아랫도리 닦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가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자립할 경제력도 없고, 재취업 가능성도 희박하다. 쌍둥이를 키워내야 하고 시어머니는 암, 시아버지는 반신불수이다. 점잖은 시부모는 은유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시집살이를 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딸처럼 대해주셨다. 부엌일을 시킨 적도 없고, 언성을 높이거나 타박을 준 적도 없다. 친정 탓을 하거나 무언의 신경전으로 힘들게 한 적도 없다. 시부모는 성국이 은유를 집으로 처음 데려간 날부터 은유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둘이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처럼 여겨졌다. 성국도 은유와 같은 마음이었다. 부모가 환영하는 좋은 여자, 착하고 무난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성국은 착하고 성실한 남자다. 좋은 남자다. 그래서 은유가 결혼을 결정하는 데 수월했다. 좋은 사람이라도 바람을 피울 수 있다. 바람을 피운다고 해서 다 나쁜 남자는 아니다. 은유는 간통죄 고소나 이혼소송 대신, 결혼상담소를 찾아가 카운슬링을 받을 것, 새로운 시작을 위해 새집으로 이사할 것, 그리고 새집의 명의를 부부 공동명의에서 그녀 단독명의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성국은 그저 다행일 뿐이었다. 은유의 모든 제의에 흔쾌히 협조했고 용서를 빌면서 가정에 충실하겠다 다짐했다. 은유의 시부모는 은유를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는 불쌍한 딸 대하듯 했고, 친아들인 성국은 바람 핀 몹쓸 사위 대하듯 못마땅해했다.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아 보였다.

 둘은 6개월간 결혼 카운슬링을 받았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은유의 요구대로 그들이 사는 집은 은유 개인의 단독명의로 바꿨다. 성국은 그가 만에 하나 다시 바람을 피우거나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 은유 앞으로 되어 있는 재산에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 변호사를 통해 공증까지 해 두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미안해요.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해놓으면 내가 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이 집이 내 집이라는 안도감 같은 거요.”

 “그래, 알아. 난 괜찮아.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거야. 아이들 키우면서 여기서 우리가 함께 살 텐데, 그 명의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앞으로 잘할게.”

 “그래도 이렇게 변호사까지 선임해서 각서를 쓰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 부모님이 꼭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요.”

 “어머니 아버지가?”

 “네. 나도 당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려 하는데, 두 분은 당신을 용서하기 힘드신가 봐요. 당신은 그래도 사회생활도 하고 직장도 있으니 어디서 밥벌이야 못 하겠냐고 하시면서……. 혹 우리가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뭐, 제가 혼자 아이들 키우면서 집 걱정은 안 하게 하신다면서…….”

 “참 노인네들도!”

 

  새로 이사를 한 집은 방이 4개이어서 부부가 각방을 쓸 수도 있었지만, 한방을 쓴다 해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살과 말을 안 섞고 살아도, 또는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가끔 섞고 산대도 상관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상관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어떻게 방을 같이 써. 말도 안 돼. 그게 돼? 그런 게 사랑인가?”

 은유의 사정을 잘 아는 수아는 가끔 집에 찾아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조용히 말해. 애들 듣겠어.”

 “아니야, 걔들은 지금 이어폰 끼고 에밀리 샘이 준 숙제 하고 있을 거야. 안 들려. 걱정 마.”

 은유는 토스트한 베이글에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발라 수아 앞으로 놓아주고 커피를 준비하면서 대답했다.

“사랑하면 그렇게 못하지. 미워해도 못하고.”

 “그럼?”

 “난 애들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 밉지도 않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배신감이나 미움이 오래가겠어? 난 괜찮아.”

 “그럼, 막 같이 자?”

 “우린 쌍둥이 낳고 각자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가족일 뿐이야. 애들 아빠에게는 일과를 마치고 그 여자 만나고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잠을 청하는 공간일 뿐이고. 나도 마찬가지이고. 넓은 침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선명한 선, 서로 넘지 않는 선이 있지. 난 괜찮아.”

 “그럼 차라리 각방을 쓰지?”

 “그럴 때도 있고. 애들이 예민할 때잖아. 애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게 싫어서. 난 아무런 상관없어.”

 “여하튼 너의 시어머니도 대단한 분이시더라.”

 “왜?”

 “사실은 오늘 그 말 하러 온 거야. 어제, 너의 시어머니 다녀가셨어.”

 “너의 학원엘?”

 “시내에 모임이 있어서 나오신 길에 애들도 볼 겸 들르셨다고는 했지만, 나를 만나러 일부러 오신 것 같았어.”

 “왜? 뭐라셨는데?”

 “너를 잘 부탁한다고. 아들 허물이 너무 부끄러워서 학원까지 날 찾아오는 게 어려우셨지만, 너희 부부 사정 아는 친구는 나 하나뿐인 걸 아셨는지 너를 자주 들여다보고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가시더라.”

 “어머니가 그려셨구나. 우리 일, 친정에도 얘기했냐고 물으셔서 너만 안다고 말씀드렸거든.”

 “어쩜 그런 시어머니가 다 있니?”

 “좋으신 분이야.”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 아직도 익스트림 스포츠 센터에 나가고? 요가 배우러 다니고?”

 “응, 그렇지 뭐….”

 “어떤 여자래? 네 남편이 만나던 여자는?”

 “만나던 여자가 아니고, 만나는 여자. 아직도 만나고 있어.”

 “뭐? 너희 결혼 카운슬링도 받고, 이사도 하고, 다시 새 출발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깨끗이 정리된 거 아냐? 그걸 알고도 넌?”

 “대학교수래, 그 여자. 예쁘고 능력 있는. 성국씨 회사에서 하는 큰 프로젝트에 컨설턴트로 있으면서 아무래도 왕래가 잦겠지. 지방으로 같이 많이 다녔대. 어떨 때는 해외 출장도 프로젝트 때문에 함께 가고.”

 “넌, 참 어쩌려고! 네가 이렇게 모른 체하고 방심하고 있으니 애들 아빠가 정신을 차리겠니?”

 “어디 사랑이 하루아침에 식겠어. 그들은 사랑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뭐?”

 “애들 아빠는 사랑하는 여자를 결혼 후에 찾은 죄밖에 없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이번 기회에 그 좋은 사람을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그 여자가 매달리나 보지?”

 “그 여자도 당장 이혼 못 해. 가정이 있고, 대학교수인데 쉬이 구설에 오를 수 없는 일이겠지. 그 여자 남편은 몰라.”

 “남편도 있는 여자가, 세상에! 나였다면 그 여자 남편을 찾아가서 난장판을 벌였을 텐데.”

 “그렇게 안 하겠다고 했어, 내가. 그 여자 인생에까지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그게 그 여자 인생에 끼어드는 거야? 그 여자가 네 인생에 끼어든 거지?”

 “우리는 모두 엇박자로 각자 함께 사는 것뿐이야. 안 어울리지만 열심히.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 사람은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면서 위태롭게 살아가야 하고. 내 눈을 피해서,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에게 들키지 않게.”

 “그럼, 너는?”

 “난 아이들 클 때까지 지킬래. 뛰쳐나간다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십 원 한 장을 못 벌어. 겁도 나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성국씨는 나를 금쪽같이 아끼는 시부모의 아들이고, 쌍둥이의 아빠이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야. 난 시간이 필요해.”

 “언제까지?”

 “적어도 내가 먼저 아는 체는 안 할래.”

 “왜? 그건 무슨 심보야?”

 “말했잖아. 그 여자도 당장 이혼 못 해, 안 해. 그런데 내가 아는 체 해 봐. 방법이 안 나오기는 마찬가지야.” 

 

 그 후 5년 동안 은유는 시부모 병간호와 쌍둥이 키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시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시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두 분이 사시던 집과 전 재산을 은유 앞으로 해놓으셨다. 쌍둥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가정을 꼭 지켜달라는 조건부 거래이자 부탁이었다. 성국이 그 여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해간다는 것을 아셨기에 가시는 날까지 은유와 쌍둥이를 걱정하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에 시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암은 초기 때 수술과 치료를 잘 받아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치매와 합병증이 동시에 찾아왔다. 시어머니는 치매가 심해져서 아무도 못 알아보는 지경이 됐을 때도 은유만은 알아봤다. 은유가 딸인지 며느리인지 간호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은유만 찾았다. 은유는 어머니가 사시던 집을 팔아 정리하고 자기 집으로 모셨다. 상주하는 요양간호인의 도움을 받으며 24시간 교대로 시어머니를 보살폈다. 시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은 은유였다.

 성국은 그 여자와의 사랑을 지속해서 키웠고 은유는 모르는 체했다. 은유가 시부모 병간호와 아이들 보살피는 일에 늘 바빴고 성국에게는 무덤덤하지만 불친절하게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성국은 자기 부모를 헌신적으로 병간호하는 은유를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은유가 고마웠다. 큰 문제 없이 잘 자라주는 쌍둥이도 고마울 뿐이었다.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은유는 베이글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매일 먹었다. 쌍둥이는 상급생이 될수록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은유의 잔손 빌릴 일도 마다하는 나이가 되었다. 은유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우울해졌다.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베이글을 먹었다. 

 자근자근.

 오물오물. 

 씹어서 꾸역꾸역 넘겼다. 

 시부모와 한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쌍둥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가정을 지키기로 했으니까 그냥 이대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끔 성국처럼 자신만의 사랑을 찾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떨까? 무엇이 다를까? 더 웃게 될까? 더 행복할까? 뛰쳐나간다면, 뛰쳐나간다면, 뛰쳐나간다면,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귀에 온 힘을 쏟아 베이글을 씹어먹었다.

 턱뼈가 뻐근해질 때까지 씹다 보면, 다행히 우울함이나 별 잡다한 생각은 사라졌다. 베이글이란 참 묘한 먹거리이다. 이러한 치유는 베이글 덕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은유는 베이글을 먹으며 안정을 찾고, 조금이라도 행복해졌다. 행복할 때마다 베이글을 베어먹으며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굴 근육을 많이 움직였다. 특히 일부러라도 웃을 때 쓰는 얼굴 근육을 자주 움직여주려 노력했다. 

 “너 그렇게 탄수화물만 먹으면 어떻게 해?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베이글만 먹고 어떻게 사니? 도대체 이게 몇 년째니? 너 어쩌려고 그래?”

 수아는 은유가 베이글로만 끼니를 해결하는 게 걱정이었다.

 “건강상 아무 문제 없대.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나오고, 골다공증도 없어. 살도 안 찌고.”

 “그러면 베이글 샌드위치라도 해서 먹어라. 사이에 계란, 훈제연어, 베이컨 뭐 그런 거 넣고, 야채 올려서.”

 “베이글 샌드위치?”

 “뉴욕에서는 그렇게들 먹는다더라.”

 “뉴욕식으로? 한 번 뉴욕에 가보고 싶네.”

 “그래? 같이 갈까? 기억나니? 우리 학원에 원어민 교사로 있었던 에밀리 샘? 뉴욕에서 다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초대장 보내왔던데, 잘됐네. 혼자 가려니 엄두가 안 났었는데, 잘됐다. 같이 가자. 여행하려면 체력부터 길러야지. 너 그러다가 영양실조 걸릴라. 잘 챙겨 먹어.”

 은유는 꼭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다. 베이글로 샌드위치를 해 먹으니 그것도 먹을 만했다. 특별한 우울증이나 갱년기 증세 없이 은유는 건강하게 지냈다. 쌍둥이 한 녀석은 군대에 입대했고, 다른 한 녀석은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에 진학했다. 모두 집을 떠났다. 그렇게 5년이 또 지난 것이다.

 

 

***

 

 성국이 은유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은유가 미리 창이 보이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무리 구석에 있는 테이블이라고는 해도, 대낮에 치욕적인 가정사 이야기를 이런 베이글 집에서 하다니. 성국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굳어져 옴을 느낀다.

 “당신, 먼저 와 있었네.”

 “네, 차 시키세요.”

 성국은 커피를 주문했고, 곧이어 종업원이 커피 한 잔과 베이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아, 이건 안 시켰는데?”

 “아니에요, 샌드위치는 제가 시킨 거예요. 당신 오기 전에 미리 주문해놓은 거예요.”

 은유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받아들면서 말을 꺼낸다.

 “제가 오늘 왜 만나자고 했느냐면은요….”

 “은유야, 쌍둥이 엄마, 알아. 알아.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 여자랑 헤어지지 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이런 데서 말고, 우리 나중에 집에 가서 조용히 얘기합시다. 내가 다 자초지종을 얘기할게, 제발.”

 성국은 여기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막말이 오가고 큰소리로 따지면서 망신스러운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은유는 태연히 베이글 샌드위치만 바라본다. 그녀는 식사 기도라도 하는 듯 눈을 살짝 감다 뜨더니 베이글 샌드위치를 집어 올린다. 

 먹는다. 

 베이글 사이에 든 내용물이 조금이라도 떨어질세라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벌려가며 암팡스럽게 먹는다. 은유는 한입 가득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베이글을 접시에 내려놓지 않는다. 씹는 내내 성물을 대하듯 두 손으로 잡고 베이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맛을 음미한다. 치아를 베이글 속 깊숙이 박아넣고는 그 끝 힘을 모아 얼굴 근육까지 움직이며 먹는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거의 미소에 가깝다.

 그렇게 베이글에 빠져서 먹기를 한 10분.

 성국은 멍하게 은유를 바라보고만 앉아 있다.

 

 “당신 몰랐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이 베이글이라는 걸요.”

 “어….”

 “그래서 오늘, 이 베이글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당신을 만나자고 한 건데. 당신의 외도 소식을 당신 입을 통해 듣네요.”

 “뭐?”

 “간통죄 있을 때는 그렇게 들키더니, 이제 간통죄도 없어진 마당에 당신의 자백을 듣다니요….”

 “그런데 당신, 혹시 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당신은 어떻게 나의 외도가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그, 그렇게 앉아 있는지?”

 “난 오늘, 이 베이글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했어요.”

 “베이글?”

 “그래요. 쌍둥이도 다 성인이 돼서, 한 놈은 군대에 또 한 놈은 지방대 다니면서 독립해 있는 상태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해요. 뉴욕에 가려고요. 누구 결혼식이 있어 따라갔다가, 저는 더 오래 있다가 오려고요. 뉴욕에 있는 제빵학원에서 베이글 만드는 수업도 듣고 유명한 베이글 가게는 다 돌아보려고요. 그걸 얘기하려고 불렸죠.”

 “뉴, 뉴욕엘 간다고?”

 “오랫동안 그 여자를 못 잊고, 불륜으로 살게 해서 미안해요. 나 살자고 당신의 사랑을 챙겨주지 못했어요. 당신이 말할 때가 되면 말하겠지 했어요.”

 “쌍둥이 엄마….”

 “그러나 당신 알죠? 지난번 우리 결혼 카운슬링 받던 마지막 날, 변호사랑 서로 각서 쓴 거요. 제 명의로 된 집과 재산, 절대 손대지 않기로 한 거 말예요. 당신은 훌륭한 직장이 있고 그 여자도 대학교수라면 어느 정도 살겠죠. 어머님 아버님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유언대로 전 했어요. 쌍둥이 성인 될 때까지 이혼하지 말고 가정을 지키라는 조건으로 제게 미리 주시고 간 파주 땅, 건물, 사시던 집의 명의. 그분들의 유언, 저는 지켰어요. 법적으로 깨끗이 했으면 좋겠어요.”

 “돌아가신 두 분 임종까지 지키고, 그 고된 병간호 마다치 않고 헌신적으로 보살펴드린 건 당신이야. 난 자식 도리도 제대로 못 했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두 분의 결정을 내가 어찌하겠어. 그래도, 이 못난 자식이 가질 죄스러운 마음을 덜어주시려고 그리 당신 앞으로 다 남겨놓고 돌아가셨나 싶네.”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줘요.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회사, 들어가 보세요.”

 

 

 성국은 먼저 자리를 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목덜미가 뻐근하고 온몸에 힘이 빠진다. 은유라는 여자,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나 성국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가족으로 살았는데 말이다. 성국은 은유가 뉴욕 거리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면서 베이글 맛집 투어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은유는 아직 베이글집 안에 있다. 진열대에 묶음으로 포장된 베이글 몇 봉지를 사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다. 왜 저렇게 많이 사는 걸까? 은유에게 베이글이 어떤 의미일지 성국은 알 길이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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