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1887~1965)…시처럼 아름다운 건축을 열망했던 도시계획가

■건축물에 휴머니즘을 불어넣은 '감동을 위한 건축' 창시

"물질의 힘이 절정에 이른 듯한 이 시대에 인간들은 올바른 전망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언젠가 운명의 시각이 오면 인류는 폐허더미에 앉아 철학적 결론을 끌어낼 것이다. 양심이라고 할 그 어떤 결론을…. 이때 건축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돼버린 이 지구를 다시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1887~1965). 건축물에 휴머니즘을 불어넣은 그는 '건축은 살아있는 기계'라고 일갈했던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화가, 도시계획가이다. 예술과 인간애를 지향한 그의 '감동을 위한 건축'은 지금도 큰 울림으로 남는다. 르 코르뷔지에는 '한국 근대건축의 거목(巨木)' 김중업의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스위스 10프랑짜리 지폐 앞면에 실려 있는 르 코르뷔지에 인물초상(왼쪽).개인의 욕구와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선(善)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이른바 '사회적 주거양식'을 주창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인간과 자연을 위한 드라마이자 시(詩)'로 여겼다. 그가 이처럼 명징한 건축관을 갖게 된 것은 스위스 쥐라산맥의 우거진 숲과 너른 초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과 교감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1887년 르 코르뷔지에가 태어난 스위스 라쇼드퐁은 쥐라산맥 기슭의 인구 2만7,000명의 소도시였다. 18세기 정밀시계 산업의 중심지였던 라쇼드퐁의 청교도적인 문화환경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르 코르뷔지에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문자판에 에나멜을 입히는 칠공이었다. 그의 부계(父系) 조상들은 원래 프랑스 남서부에 살았는데 종교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넘어왔다. 피아노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샤를 에두아르의 형 알베르는 훗날 음악가가 된다.

그러나 샤를 에두아르는 피아노 연습보다는 데생에 몰두할 때가 더 많았다. 그는 열세살 때 시계장식과 조각공예를 가르치는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다니다 라쇼드퐁으로 돌아온 스물여섯살의 화가 샤를 레플라트니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1903년 라쇼드퐁 미술학교 교장이 된 레플라트니는 샤를 에두아르의 후견인 역할을 톡톡히 한다. 화가가 되고 싶어했던 샤를 에두아르를 설득해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도 레플라트니였고, 예술가란 자연으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도 그였다.

레플라트니의 충고로 샤를 에두아르는 1904년부터 4년간 피렌체, 빈, 파리, 뮌헨, 스트라스부르 등을 여행한다. 이 여행은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다시피 한 샤를 에두아르에게 평생의 자산으로 남게 된다. 토스카나 지방의 에마 수도원에서는 '집단 공간의 미학'을, 이탈리아 베토토 지방의 16세기 르네상스 건축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에서는 '고전적인 비례'를,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민중 건축물에서는 '기하학적인 구조'를 체득했다.

1910년 독일로 건너가 건축가 페터 베렌스 밑에서 6개월가량 일하기도 했던 샤를 에두아르는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1917년 파리에 정착한다. 그는 1년 뒤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을 만나면서 건축세계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오장팡은 입체파의 난해한 추상개념을 거부하고, 일상적 사물이 갖는 순수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였다.

1920년 폴 데르메와 함께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하면서 샤를 에두아르는 '르 코르뷔지에'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시(詩)처럼 아름다운 공간'을 추구했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평론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물질과 자본 만능의 세태가 인간들을 공허하게 하고, 그 정신의 허기 상태가 폭력과 파괴행위를 불러올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현대도시를 뒤덮고 있는 거대하고 추한 건물들이 인간의 마음을 거칠고 더럽게 만들고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1923년 <에스프리 누보>에 발표한 자신의 글 10편을 모아 <건축을 향하여>를 출간한다. 이 책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다. 자신의 건축관을 집약한 <건축을 향하여>에서 그는 자연을 조화와 아름다움이 일치된 '기계'로 인식하고, 그러한 자연의 완전한 기계 윤리를 건축과 연결시켜 새로운 환경창조의 도구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며, 이때 기계는 합리적이고 완벽한 조화의 기하학적 법칙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책에서 '구부러진 거리는 당나귀가 다니는 길이지만, 곧게 뻗은 거리는 인간을 위한 도로'라고 적었다.

<도시계획>(1925), <성당은 언제 회색이 됐는가>(1937), <아테네 헌장>(1943), <도시계획론>(1946) 등을 잇달아 펴냈던 그는 건축이 신을 위해 바쳐진 것이거나 권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1927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관의 현상설계에서 자신의 응모작이 최종 단계에서 심사위원단에게 거부된 것을 계기로,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 건축가의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는 이듬해 근대건축국제회의를 주재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건축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주장에 의견을 같이 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나의 의무와 연구과제는 이 시대 사람들을 불행과 재난으로부터 막아주고, 그들에게 행복과 일상생활에서의 기쁨, 조화를 가져다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축관은 1940년대 들어서면서 미세한 변화를 겪는다. '인간을 위한 건축'이야말로 건축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집은 사람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은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쾌적하게 일하고, 편히 쉬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인간중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른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일본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우파에겐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좌파에겐 파시스트로 몰리기도

그에게 시련의 시기도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무실 문을 닫고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인 오종에서 은둔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1941년 프랑스 내무부 장관의 눈에 띄어 대실업투쟁위원회에서 건축 부문의 일을 맡는다. 그러나 관료들은 그의 혁신적인 구상과 야심적인 설계, 독단적인 표현에 대해 자주 시비를 걸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우파 정치인들에게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좌파 정치인들로부터는 파시스트로 몰렸다. 그러나 그는 도시를 정비해 건설하고 싶었을 뿐 그 어떤 정치적 색깔을 띠려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세계는 개화기를 맞는다. 그는 서구 산업사회의 새로운 파르테논 신전이란 평가를 받은 '사보아' 주택을 비롯, 사회적 주거단위를 구체화시킨 마르세유의 '위니테', 자연의 질서 위에 인간 의지를 구현한 '노트르담 뒤오 성당'에 이르기까지 약동하는 생명력을 건축물 속에 새겨넣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뒤오 성당'(1950)은 프랑스 롱샹 지방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교회 건물이다. 그는 세 개의 탑과 널찍한 창문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들여 순백색의 예배당을 축복과 은총이 넘치는 성스런 공간처럼 보이게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예배당을 지으면서 "침묵과 내적인 환희의 장소를 창조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신과 영혼에 대해, 죽음과 사랑에 대해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건축물에 그의 감정과 인생경험을 모두 쏟아부었다.

1957년 르 코르뷔지에는 아내 이본을 잃는다. 그는 이본에 대해 "관대하고 청렴결백했으며, 내 가정의 수호천사 역할을 했던 연인"이라고 했다.2년 뒤인 1959년 르 코르뷔지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그의 어머니는 100살 넘게 장수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해와 달, 산 위에서 군림하고 계셨다"고 말할 정도로 일종의 숭배심을 갖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1950년 인도 펀잡 지역에 세운 찬디가르의 공공건물들은 이른바 '모듈러' 개념이 적용됐다. '모듈러'는 기하학적 법칙으로 가장 기능적이고 이상적인, 주택의 황금분할을 말한다. 인간이 살고 움직이기 편하게 정의해놓은 건축의 비례체계인 셈이다. 따라서 찬디가르 공공건물들은 '건축 구성=기하학'이라고 말한 그의 건축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51년 바다와 모나코가 마주보이는 마르탱갑에 작은 별장을 짓는다. 그는 그 별장을 자주 찾았다. 일본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60), 이탈리아 밀라노 올리베티 컴퓨터센터(1963) 등을 지을 때도 그는 마르탱갑 별장을 수시로 찾았다.

1964년 미국 하버드대 카펜터 시각예술센터를 완공한 이듬해 7월 르 코르뷔지에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마르탱갑으로 휴가를 떠난다. 1965년 8월27일 그는 평소 좋아했던 지중해에서 수영하다 사망한다. 78세 때였다. 그의 시신은 파리로 옮겨졌고,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조사(弔辭)에서 '피디아스, 미켈란젤로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 라는 표현을 쓴다. 르 코르뷔지에가 인류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사망하기 몇 주 전에 펴낸 <조정(調整)>이란 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인간은 투쟁, 일, 노력을 통해 개인적인 자산을 획득한다. 그 모든 것은 인내와 용기에 달려 있다. 하늘이 내려준 영광의 표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스 지폐는

스위스 지폐는 한 폭의 파스텔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유럽 국가의 은행권 중 가장 화려한 색상을 자랑한다. 스위스에서는 1000, 200, 100, 50, 20, 10프랑 등 6권종이 통용되고 있다. 스위스의 모든 지폐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은행권 도안구성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돼 있다. 도안구성을 세로로 한 것은 사람들이 지폐를 가로가 아닌 세로로 주고 받기 때문에 세로 방향이 은행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 도안을 세로로 인쇄하면 은행권에 도안배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여백을 채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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