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문득, 겨울 산이 그리웠다.

누군가 겨울 산은 황량하다고 했다. 겨울산에는 아무것도 없어 허한 가슴에 찬 바람만 불어온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잎사귀 우거진 여름 날의 산을 생각했던 것 같다.

겨울 산이 그리운 건, 겨울 나무가 사무쳐서였다. 한 사진작가는 겨울 산에 들어가야 나무가 보인다고 했다. 잎사귀 떨어내고 알몸이 된 나무가 자신을 닮은 것 같아 눈에 밟힌다고 했다. 풍진 세상에 맨몸으로 맞서는 제 신세가 강마른 겨울 나무에서 얼비친다고 했다.

 

joongang_20150130000205062.jpeg

 

  ↑ 운이 좋았다. 주목을 보고 싶어 태백산에 들었다가 장엄한 일출을 마주했다. 이미 죽은 주목이 새벽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다. 휘어지고 굽은 모양이 허구한 날 치이는 우리네 삶을 닮았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글귀에 밑줄을 친 적이 있다. 작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를 조망하라는 가르침으로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한 그루 나무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숲에 들어서도 나무의 거친 껍질을 어루만진다. 전체로 뭉뚱그려지는 세상이 이제는 싫다.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곁을 떠났다. 나이를 먹는 건, 혼자 남는 것이었다.

나무는 이미 하나의 전체다. 거대한 세상이고, 신성한 말씀이다. 나무 한 그루가 들려주는 먼 시간을 우리네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나무 한 그루의 우주도 나에겐 벅차다.

겨울이 깊으면 늘 푸른 소나무도 생각나고, 붉은 꽃잎 터뜨리는 동백나무도 생각난다. 하나 눈 덮인 겨울 산을 올라 기어이 마주해야 하는 나무는 따로 있다.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 주목과, 허연 알몸으로 겨울에 맞서는 자작나무다. 두 나무 모두 거친 숨 몰아쉬며 겨울을 상대한 다음에야 조우할 수 있다.

주목이 가로의 나무라면, 자작나무는 세로의 나무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은 겨울 바람에 떠밀려 제 몸을 비틀고 서 있다.

길게 누운 가지 위에 겨울이면 이 쌓이고 서리가 얹힌다. 그렇게 제 몸을 고 휘어서 주목은 천 년 세월을 견딘다.

자작나무는 길고 정갈한 모양으로 하늘만 한다. 잎사귀를 버리는 것도 모자라 곁가지도 스스로 끊어내고 겨울을 난다. 벌(罰)서는 처럼 그렇게 순수한 수직선으로 서서 북방의 혹독한 겨울을 감내한다. 순전히 하얘서, 눈 덮인 겨울에 더 도드라진다.

나무 아래에 앉아 봤으면 안다. 나무 아래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간다. 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속상했던 일, 서러웠던 일, 배고팠던 일 한참이나 지울 수 있다. 온갖 투정 다 부려도 나무는 오랜 친구처럼 잠자코 귀를 기울인다. 나이를 제 몸에 새기듯이, 나무는 우리의 울분도 제 몸에 담아둔다. 이따금 가지를 흔들어 고개만 끄덕인다. 나무를 만나고 오면, 한 계절 살아낼 힘을 얻는다.

팔순의 시인이 자작나무 숲을 갔다와서 노래했다. 겨울 나무만이 타락을 모른다. 비단 늙은 시인에게만 험한 계절 버티고 선 나무가 티 없이 맑아 보인 건 아니었다. 그래, 나이 먹어도 더럽지는 말자. 늙어도 썩지는 말자. 나무처럼 살자. 나무처럼 늙자.

겨울 나무를 보고 왔다. 이제 나이에 관한한은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박영숙영

2015.01.29 15:35:40
*.56.30.200

나이만 먹는 게 아니라 삶의 폭도 나이만큼 익어 간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엄경춘

2015.01.30 14:16:36
*.56.21.67

가슴에 와 닿는 글입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의 주목처럼 우리 문학의 글도 천 년을 남기는 글이 되고 싶습니다.

 

이주혁

2015.02.10 21:08:46
*.9.186.75

숲이 아니라 나무. 그것도 거친 나무 껍질을 어루만지며,

전체로 뭉둥그려진 세상이 아닌, 한 구루 나신의 나무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삶의 성찰이 가슴 뿌듯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미국 질병예방 통제국(CDC) 강조하는 코로나91 증상과 주의 사항 file 웹담당관리자 2020-03-15 7614 3
공지 문예진흥원에서의 <한미문단> 지원금과 강정실에 대한 의혹 file [6] 강정실 2017-12-15 29741 12
공지 2017년 <한미문단> 행사를 끝내고 나서 file [5] 강정실 2017-12-14 27307 7
공지 미주 한국문인협회에 대하여 질문드립니다 file [9] 홍마가 2016-07-08 47346 12
공지 자유게시판 이용안내 웹관리자 2014-09-27 44008 5
1935 수석 감상과 봄나들이 file 석송 2015-03-10 9733  
1934 목구멍까지 차 오른 절박한 말들을 신작으로 빨리 쏟아내고 싶었다. file 최용완 2015-03-11 5951 3
1933 서머타임 무용론 file 석송 2015-03-11 6662 2
1932 스마트폰 폭팔 막을 수 있다. file 지상문 2015-03-11 7262 1
1931 글사랑 샘터 소식 file 최용완 2015-03-11 8190 2
1930 '사람 크기' 초대형 랍스터 화석 모로코서 발견 file 석송 2015-03-12 7502 1
1929 미국에 곧 등장할 가루 알콜: 팔콜(Palcohol) file 석송 2015-03-12 10476 1
1928 글 읽는 개 [1] 강정실 2015-03-13 17464 2
1927 “한국어 교육 체계적으로” file 석송 2015-03-14 7720  
1926 ‘꽃밭에서’작곡가 권길상 박사 별세 file [1] 석송 2015-03-14 8655  
1925 겨울왕국 동부 탈출 file 석송 2015-03-14 7646 1
1924 쓰레기로 만든 오케스트라 file [1] 정덕수 2015-03-14 12463 2
1923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 [1] 석송 2015-03-16 37226 3
1922 셀카봉 ‘전시품 훼손 가능’ 이유 박물관 등서 ‘금지’ file 석송 2015-03-16 8635 1
1921 고흐의 그림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 file 강정실 2015-03-16 11912 1
1920 색채로 영적 감동…‘마크 로스코’ 한국 나들이 file [1] 강정실 2015-03-17 17724 3
1919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유골 발견 file 석송 2015-03-17 10294 1
1918 문학계 부흥 위한 문학진흥법 법안 추진 안지현 2015-03-18 6101 1
1917 “문학은 문화 전반의 초석…문학진흥법 꼭 필요” file 안지현 2015-03-18 6974 1
1916 한복화가 김정현 file 석송 2015-03-19 2010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