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김희라

조회 수 18097 추천 수 1 2014.11.02 19:59:51

 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영화배우 김희라

 

“바람피운 게 아니고 여자들에게 봉사한 거지, 그래서 난 ‘남자 춘향이’야”

 

 - 거지왕 김춘삼 밑에서 구걸하며 건달 생활하다 영화 데뷔
- 전두환 대통령 때 밤마다 청와대 들어가 고스톱
- 영화배우 박노식 복수하러 부산 갔다 칠성파 이강환과 담판
- 뇌졸중 충격, ‘사생결단’ ‘시’로 재기…“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어”
- “미워도 내 사랑”…부인 휴대전화 속 김희라는 ‘귀염둥이’
- 김승호→김희라→김기주…“3대째 영화가문이란 게 자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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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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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건 많았는데 오는 게 적었다. 긴 질문과 짧은 대답이 힘겹게 이어졌다. 인터뷰라기보단 교장선생님 훈시 같았다. 학생이 된 기자는 각을 잡고 앉아 경청했다.         
  몸이 불편한 노(老)배우 김희라(64)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꾹꾹 글씨를 눌러쓰듯 내놓는 말이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졌다. 군더더기 없는 말투와 툭툭 던지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쌍소리’는 사람을 설득하는 묘한 힘을 담고 있었다. ‘뻥’인 게 분명하지만, 어느새 믿게 되는 그런, 인터뷰 내내 옆자리를 지킨 부인 김은정(57)씨는 몇 번이나 “원래 그래요”라며 눈치를 줬다. 검은색 중절모와 희끗희끗한 수염, 회색 양복에선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영화 속 낭만파 건달의 포스가 흘렀다. 멋있고 좋았다. 1970~8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액션배우 김희라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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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들 
 

김희라를 영화배우로 만든 사람은 임권택(76) 감독이다. 1968년 12월 작고한, 김희라의 부친인 영화배우 고(故)김승호의 49재가 있던 날, 23세의 열혈청년은 임 감독에게서 영화배우를 제안받았다. “배우의 자질이 있어 보인다. 그냥 느낌이 온다”는 이유였다. 김희라는 거절했다.         
  “아버지 초상 때 임 감독을 처음 봤거든. 난 아니라고 했지. 돈 벌어서 재벌이 되려고 생각 중이었어. 배우는 생각도 안 해봤고. 그런데도 자꾸 배우 하라고 하더라고. 정말 열심히 버텼지.”
 

▼ 그런데 결국 영화배우가 되셨잖아요.
 
“초상 치르고 얼마 안 됐는데 임 감독이 촬영감독 하던 서정민씨하고 나를 잡으러 왔어. 그래서 잡혀갔지. 충무로에 있는 무슨 빌딩 옥상에 끌려가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어. 테스트하더니 좋다는 거야. 필름장사들이. 그때는 필름장사들이 좋다고 해야 영화를 만들었거든.”        
 
▼ 해보니 어떠셨어요.
 
“내가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데뷔했어. 1969년에. 해보니까 할 만해. 돈도 없었을 때니까. 그냥 했지.”
 
▼ 당대 최고 배우였던 김승호씨의 외아들이 돈이 없었다?
        
“아버지가 부도가 났잖아. 대학도 그만뒀어. 2년 다니고. 그 당시 86억이 부도가 났으니까. 1968년에. 한 달 이자만 2200만원이었어. 가난해서 밥을 못 먹었어. 아버지가 남긴 빚을 한 10년 갚았나? 그런데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니까 학교에서 졸업장 준다고 하대. 근데 싫다고 했어. 난 그런 부정한 거 싫어해. 난 영화 하면서도 한번도 출연시켜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얼마 전 ‘시’ 찍을 때 처음 부탁을 했지. 그러고 보면 이제 나도 끝난 거지.”        
 
▼ 초창기 출연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요.
 
“임권택 감독이 만든 ‘짝코’, 액션배우로서는 ‘왼손잡이 시리즈’가 제일 기억에 남아. ‘벙어리 삼룡이’도 좋은 영화야. 삼룡이 그거 만들 때는 정말 불에 타죽는 줄 알았어. 한옥을 불지르고 거기에 들락날락했으니까 불에 타 죽을 뻔했지. 대역 같은 것도 없을 때고, 난 그런 거 싫어했으니까. 그냥 얘기만 들어. 왼손잡이 시리즈를 할 때는 물에 빠져 죽는 줄 알았어. 근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영화 찍었어.”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영화 ‘짝코’는 30년 동안을 쫓고 쫓긴 두 남자의 기묘한 인간관계를 엮은 영화로 1980년에 개봉됐다. 쫓는 사람은 6·25 때 공비 소탕전에 참가했던 전투경찰 송기열(최윤석 분), 쫓기는 사람은 좌익분자로 만행을 저지르던 짝코 백공산(김희라 분)이다. 이 영화는 제19회 대종상 우수반공영화상, 각색상, 제20회 대종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김희라는 “난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그냥 주저앉데”라며 요즘 일처럼 아쉬워했다.        
 
“‘짝코’ 못 봤지. 그거 꼭 봐야 된다고. 꼭 잊지 말고 보라고. 젊은 감독들이 그 영화 보고 ‘내가 영화를 만들면 김희라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대. ‘사생결단’ 만든 최호 감독도 그렇다고 하고. 영화는 원래가 감독 거야. 감독의 새끼야. 그런데 정말 좋은 영화는 상의해가면서 만든 영화야. ‘짝코’는 작가하고 임 감독님하고 나하고 다 의논해서 찍은 작품이야. 그래서 좋은 작품이 됐어.”  

 
김두한씨가 아버지 지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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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박물관에 전시된 영화배우 고 김승호 특별전 포스터 앞에 선 액션배우 김희라. 그는 김승호의 외아들이다.
김희라를 진정한 액션배우의 반열에 올린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왼손잡이 시리즈’다. 1969~70년에 걸쳐 ‘떠나가는 왼손잡이’ ‘마지막 왼손잡이’‘내일없는 왼손잡이’ 등 여러 편이 만들어졌다. 상대역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문희다. 참고로, 1969년에 데뷔한 이후 영화배우 김희라는 40년간 총 500편 가량의 영화에 출연했다. 주연작만 200편 정도 된다. 이 중 상당수가 액션영화다.        
“문희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여배우야. 연기가 좋았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일 궁금해. 왼손잡이 만든 감독이 김효천 감독이거든? 김 감독이 날 아주 좋아했어. 내가 김 감독한테 차도 사주고 차에 냉장고도 달아주고 그랬어. 당시엔 최고였지. 이런 건 적는 거 아니야. 그냥 알아만 들어. 사실 김 감독이 대구의 돈 있는 건달 출신이야. 그때 종로에서 힘을 좀 쓰고 살았거든. 내가, 그래서 더 가까웠어. 그때 깡패는 남 때리고 돈 빼앗고 그러는 게 아니야. 둘이서 맞짱 뜨고 그런 재미지.”        
 
김희라씨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이런 건 적는 게 아니야. 그냥 알아만 들어”라는 말을 했다. 특히 재밌고 흥미로운 얘기를 할 때, 앞으로 나올 얘기지만, 바람 피웠던 얘기, 정치인들 얘기, 영화계 뒷얘기를 들려주면서 꼭 그랬다. 인터뷰 때는 “알았다”고 했지만 기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 재미있어서.        
 
▼ 건달생활도 하셨어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내가 지나가면 다 꼬리 내리고 그랬어. 특히 종삼 옐로하우스. 내가 나타나면 꼼짝 못하지. 내가 오래전부터 종로를 훑고 다녔어. 지금도 살아 있는 선배가 있어. 영화계는 다 죽었는데 건달들은 많이 살아 있어. 그냥 알기만 알라고. 그러니까 내가 깡패영화를 많이 했지. 난 주로 넝마주이들 하고 어울렸어. 내가 그 사람 직계 똘마니야. 김춘삼, 거지왕 있잖아. 내가 그 사람 밑에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65년인가 처음 만났어. 김춘삼씨를. 가출해서 거지 생활하면 아버지가 날 잡으러 다니고 그랬어. 아는 사람들이 하도 우리 아버지 얘기하면서 나한테 ‘힘쓰고 돈 있는 새끼’ 어쩌고 하길래 ‘야 이, 개새끼들아’ 그러면서 집에서 나왔어.”        
 
▼ 당시 종로에는 유명한 건달이 많았는데요.        
 
“그랬지. 종로 오야붕(우두머리)이 국회의원 하던 김두한씬데,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 친구야. 애들 때부터. 이런 일도 있었어. 4·19가 났는데, 우리 아버지가 이승만 박사 부정선거 하는데 연설을 했다고 데모대가 우리 집에 쳐들어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김두한씨가 우리 집에 왔어. 문간방에서 우리 아버지를 지켜줬어. 날 무릎에 앉혀놓고 ‘넌 내 기를 받아서 대단해질 거야’ 그랬어. 그래서 내가 펄펄 뛰고 다녔나봐. 아버지 얘기로는 김두한씨가 그랬대. 소싯적에. ‘넌 잘생겼으니까 배우 해라’. 그래서 배우가 되신 거래. 김두한씨가 해방 전에 연극하던 무슨 극단의 단장한테 가서 ‘저 사람 써’ 그래서 연극배우 시켜줬다고 그러더라고. 아버지는 건달은 아니지만 힘이 장사였어.”        
 
▼ 김춘삼씨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가출해서 거지생활 하다가 그냥 만났어. 거지도 계급이 있거든. ‘걸’ 알아? ‘걸’, 음식, 걸 달아 오는 놈, 종이 주워 오는 놈. 빨래 주워 오는 놈. 다 역할이 있어. 난 처음에 걸 달아오는 놈으로 시작했어. 그때부터 종로에서는 ‘저 양아치 새끼는 무서워’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내가. 거지 노릇하고 다니다가 그냥 어떻게 만났어. 그리고 내가 운동을 많이 했지. 공인으로 지금 23단인데….”        
 
▼ 23단이요?      
 
“응.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공인이 지금 60단도 넘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때 부인인 김은정씨가 말했다. “그냥 하는 소리예요”라고. “이것저것 운동을 많이 하긴 했어요”라고. 기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었다.
 

 레슬링, 축구, 태권도, 택견…
  
 ▼ 무슨 운동을 하셨는데요.     

“공인은 세월 가면 되게 돼 있거든. 택견이 10단이야. 그리고 태권도도 10단이고.”        
 
▼ 태권도, 택견이 10단이 있어요? 단증을 받으셨어요?        
 
“확인해보면 알잖아. 나는 애들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저것도 했어.”    
 
▼ 뭐요?        
 
“레슬링.”        
 
▼ 레슬링?
 
“아마 레슬링. 중학교 때 했는데 프로레슬링하던 김일 선생 도장에 가서 몸도 좀 풀고 그랬어. 프로레슬링까지 넘어갔지. 근데 그만뒀어. 좀 하다가.”        
 
▼ 왜 그만두셨어요?    
 
“응, 그것도 구라(사기)거든. 그래서 안 했어. 난 구라를 싫어해. 오로지 실전으로.”  
 
▼ 건달생활 하면서 싸움 많이 하셨어요?    
 
“많이 했지. 그런데 남이 나한테는 싸움을 잘 못 걸었어. 내가 기를 쓰거든. 거의 도사 수준으로다. 기에 눌려서 못 덤벼, 아무리 싸움 잘하는 깡패도 내가 ‘야, 이 개새끼야’ 하면서 쳐다보면 꼼짝 못해.” 김희라는 갑자기 싸움판에라도 온 듯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진짜 그랬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다. 그래서 기자는 “그건 인정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김은정씨는 “결혼한 뒤로는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번은 전라도 건달 여러명이 이 사람한테 붙자고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건 그냥 알아만 들어, 또 내가 공중부양을 좀 해.”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김은정씨가 옆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냥 들어주라고 기자에게 눈치를 주면서)        
 
“공중부양 하는데 뭐냐면, 그것도 다 증거로 남아 있어. 내가 쇼를 많이 나갔거든. 그러면 나가떨어지는 것부터 시작해, 무대에서. 나가떨어진다는 그게 맞아서 나가떨어지는 게 아니야. 혼자 뜨는 거지. 붕붕 두 바퀴씩. 이만큼 뜨는 게 공중부양이야.”        
 
김희라는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높이를 강조했다.        
 
▼ 아, 네 (웃음)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축구선수였어. 몰랐지?”        
 
▼ 네, 몰랐는데요.
 
“중동고 다닐 때 축구선수를 했어. 3년 내내. 중학교 때는 레슬링하고 고등학교에선 축구. 그때 축구를 잘했어. 중동고가. 내가 하도 사고를 치고 다니니까 아버지가 축구라도 해서 먹고살라고 그랬어.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면, 집에다 축구 과외선생까지 데려다놓고 했다니까. 고등학교 2년 선배이던 골키퍼를 과외선생으로다. 서재학 선배라고 있어.”        
 
그의 화려한 운동 역사 얘기는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됐다.


 

 그건 대근이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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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김은정씨와 한국영화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는 영화배우 김희라.

 

▼ 액션배우였지만 에로영화도 많이 하셨죠. 물론 그 분야에선 이대근씨가 대표적이긴 하지만요. 

 

“난 그런 거 일절 안 했어. 아, 딱 한번 했구나. 난 그런 배역이 들어오면 그랬어. ‘그건 대근이 시켜라. 걔는 그런 거 좋아하니까 시켜라’ 그랬어.”

   

부인인 김은정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기도 많이 했잖아. 주로 강제로 하는 거.”

 

▼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그건 그래. 그래서 난 변태지, 좋아서 하는 쟁이는 아냐. 대근이가 쟁이지.”

 

▼ 이대근씨 역할이 더 좋네요. 서로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건 그렇지. 이대근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영화판에선 후배니까 내가 대근아, 대근아, 그렇게 불러. 근데 포르노 영화는 후져. 대근이말고 포르노 영화해서 출세한 놈이 누가 있어?”

 

▼ 반공영화도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 영향이 컸어. 아버지가 꿈이 있었거든. 반공센터 만든다는 꿈. 공산당을 싫어하셨으니까. 그런데 꿈만 꾸다가 돌아가셨어. 내가 그래서 그 피를 받아서 그런지 반공영화를 많이 했어. 작품성도 좋았어. 난 반공영화로 상도 많이 받고 그랬어. 1970~80년대에 만들어진 반공영화 중 내 영화가 절반쯤 돼. 그렇게 많이 했어. 난 대한민국 사람은 국방의 의무를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미국 영주권 있는 아들도 불러들여서 군대 보냈어.”

 

▼ 영화얘기 더 할게요. 2006년 복귀작이었던 영화 ‘사생결단’이 굉장히 화제가 됐죠.

 

“감독이 출연해달라고 왔어. 최호 감독이 ‘짝코’를 떠올리며 나를 생각했대. 마침 돈도 없고 했는데 좋았지. 작품도 너무 좋았어. 그래서 했어.”

 

▼ 어떠셨어요. 

 

부인 김은정씨가 대신 대답을 했다.

 

“아빠가 촬영장에서 울었어요. 너무 좋아서.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나이가 좀 있는 조명감독은 이 사람 마음을 아는지 같이 울더라고요. 젊은 애들은 그 마음 모르죠. 그 애절한 마음.”

 

▼ 한때 대한민국 남자를 대표하던 액션스타였는데, 불편한 몸을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게 고민되지는 않았어요? 영화 ‘시’도 마찬가지고.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 장면, 그 사람이 그 영화에 꼭 필요했어, 그거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야. 그런 장면, 그런 모습은 지금 나한테 딱 맞아. 사람들한테 ‘연기자는 이런 거다’라고 보여주고 싶었어. 인간은 결국 다 늙는 거야.”

 

▼ ‘시’에선 윤정희씨와의 정사신이 굉장히 화제가 됐어요,

 

“글쎄, 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어. 봤어? 내가 할 만했지? 안 그래?”(웃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시’에서 김희라는 몸이 불편한 노인 역을 맡았다. 발기부전치료제를 복용하고 윤정희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죽기 전에 한 번만 (섹스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희라의 어눌한 말투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늙어간다는 게 안타까우세요?


 “안타깝지, 근데 뭐 어떻게 해, 인생이 그런 걸. 영화처럼 늙지 못한 건 좀 아쉬워.”  


 전국구 깡패들과 친해  


 ▼ 제가 보기엔 충분히 영화 같은 삶인데요. 그건 그렇고 액션배우로 평생을 사셨는데요. 액션은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원래 주먹 쓰는 걸 좋아했으니까 뭐 배울 것도 없었어. 천성이지. 박노식 선배한테 많이 배웠고. 그 양반 죽기 전까지 내가 보디가드를 했어. 몰랐지? 죽기 전까지 내가 모시고 다녔어. 그런데 주사(酒邪)가 심해서 죽었어.”      


 ▼ 그건 무슨 얘기예요?        


 “응, 주사가 심해서. 술 먹으면 꼭 싸움을 해, 때려 부수고. 죽던 해에 그 양반 부산에 일하러 갔다가 부산 제일 깡패가 하는 업소에서 술 마시다가 사고가 났어. 원래는 노래를 부르러 가셨대. 근데, 그 호텔에, 그 호텔 책임자, 지배인이 박 선배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그만 올라가시지요’ 그랬다는 거야. 술이 너무 취했으니까. 근데 박 선배가 지배인한테 ‘야 이 새끼야. 술 한 병 더 가져와’ 그러면서 싸우고 지배인 뒤통수를 때렸다나봐. 그걸 보고 거기 웨이터 놈이 다른 데 배달하러 가다가 자기 지배인 뒤통수 맞는 걸 보고 술병으로 박노식 선배 머리통을 까버린 거야. (손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짚으며) 그때 여기가 터져 가지고 밤새도록 악악거리고 울다가 서울 올라왔다는 거야. 그래서 서울 올라오니까 ‘당신 뇌 핏줄이 터졌다’고, 의사가. 뇌일혈이지.”        


 ▼ 어떻게 되셨어요?        


 “하루는 병원에서 날 부르더라고. ‘왜요’ 그랬더니 휠체어 타고서는 ‘야, 나 부산 가서 깡패들한테 매 맞아서 다 죽게 됐다. 니가 좀 해결해라’ 그래. 그래서 내가 ‘알았어요’ 그러고 부산에 전화를 했어. ‘야, 이 새끼들아. 깡패 새끼가 연기자를 건드려? 전쟁 한번 하자, 개새끼들아’ 그랬어. 근데 부산 제일 깡패, 그게 누구야. 맞아, 이강환이, 원래 나하고 친한 사람인데, 전화를 해서는 ‘이 새끼야, 너 내려와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갔지.”        


 ▼ 싸우셨어요?        


 “지금은 그 사람도 반신불수 돼 가지고 휠체어 타고 다녀. 갔는데 얘기하더라고. ‘이러저러해서 잘못해서 웨이터가 병으로 깠다’고. 사고였다고. 그렇게 말로 해결이 됐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박노식 선배가 죽었어.”        

  광복 이후 최고 액션배우로 불렸던 영화배우 박노식씨는 1995년 4월 별세했다. “머리를 다친 뒤로는 제대로 못 걸으셨어요. 인사하러 가니까 한 걸음 앞으로 걷다가 두 걸음 뒤로 걷더라고요. 이강환씨 하고는 지금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래요.” 부인 김은정씨가 덧붙여 설명을 해줬다.        


 ▼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연기자들하고 깡패들하고 친해. 특히 전국구들하고. 이강환이는 내가 부산에 좀 살 때 친했어. 대구에 있던 조창조 선배도 친하고. 요즘은 사무실 하나 얻어서 바둑 두고 마작하고 놀아.”   

 

  구걸 많이 해서 맛을 알아        


 “그분은 감옥 갔다 온 뒤로 코가 새빨개졌어요. 감옥 갔다 오면 추우니까 다 그렇게 되나 봐요. 얼마 전에도 전화해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자주 연락해요.”(김은정)        


 “그리고 연기자 중에도 오야붕이 많았어. 장동휘 알아? 그 선배는 정말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야. 특히 왜정 때 날렸대. 아편으로 죽은 최봉씨도. 나하고 술 먹던 영화배우 장혁은 원래 형사 출신이야. 어떤 극단이 지방에 와서 떼먹고 도망간 여관값, 밥값 받아달라는 신고받고 쫓아다니다가 그 극단에서 배우가 됐어. 재밌지?”        


 ▼ 좀전에 영화배우가 아니라 재벌이 되려고 하셨다고 했는데. 뭘 해서 재벌이 되려고 하셨어요.

 

“시장에서 음식장사 하려고 했어. 콩나물국밥, 두부라든지, 그런 거 만들어 팔아서 재벌 되려고 했어. 내가 음식 장사 많이 했어. 한 20번 차렸지 아마.”        


 ▼ 콩나물국밥 팔아서 어떻게 재벌이 돼요?        


 “돼. 보면 알아.”        


 부인 김은정씨가 말을 받았다.        

“노바다야키 같은 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했어요. 신사동에서, 발 넣는 다다미를 제일 먼저 들여왔어요. 일본에서. ‘장비네’라고 체인점도 내고 그랬는데, 찌개집도 하고 충주에서 횟집도 하고. 하여간 돈만 모이면 식당을 차렸어요. 그런데 연예인들이 와서 다 그냥 먹고 가고, 그러다 망했어요.” 김희라씨가 발끈했다.      


 “아니, 연예인들이 무슨 돈이 있어. 그냥 먹고 가면 되는 거지. 근데 다 망했어도 한방이 있는 거야. 한 번은 터질 거야. 난 지금도 포기 안 해. 그리고 난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는 부도는 안 냈어. 다 내가 책임지고 끝냈지. 연기자들 다 개폼만 잡을 줄 알지, 돈이 없어.”        


 김은정씨가 어느새 남편 편을 들고 나섰다.        


 “우리 아빠가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햄버거 같은 것도 애들한테 다 만들어서 주고 그랬어요. 갈비 재우고, 생선 다듬고 그런 것도 잘해요. 신혼 초에는 제사 때 음식도 아빠가 다 했어요.”        


 신이 난 김희라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난 구걸을 많이 해봐서 맛을 알아. 맛을 보면 주방장이 어디 사람인지 알아. 지금도. 난 원래 돈 욕심이 없어. 이런 건 기사에 쓰는 거 아냐. 그냥 알고만 있어. 내가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 고향에 가서 노인네들한테 다 봉사했어. 내가 복지법인도 만들었어. 대한민국 복지법인 1호야.”        


 제3회 ‘서울노인영화제’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노인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 무슨 복지법인이었어요?


 “‘효실천운동본부.’한 30년 됐어. 같이 일하던 사람이 교회에다가 팔아먹었지만.”


 ▼ 들어보니 술도 많이 드셨다고. 일화도 많으시고.


 “짝으로 마셨지. 대한민국 연기자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마셨을 거야. 두세 사람이서 소주 한 짝씩 먹고 그랬어. 24병.”


 ▼ 그걸 어떻게 드세요.


 “어떻게 먹긴 뭐 술처럼 먹지. 술은 술술 넘어가잖아. 며칠씩 밤을 새우고 마시고 그랬어. 그 당시 연기자들은 다 그렇게 놀았어. 그러니까 내가 아파서 자빠졌지. 일본 같은 곳에 촬영 갈 때도 소주 두 박스씩 들고 갔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두 병까지만. 공항에서 빡빡 우기다가 라디오에도 나오고 그랬어, 그때. 그래도 난 애국자야. 소주만 마시니까.”
 
▼ 지금은 어떻게 드세요.    


 “반주만 해. 석 잔씩. 그것도 취해 이제는. 그래서 이제는 임권택 감독님이 술 못 먹게 된 이유를 알았어. 아, 나이 드니까 못 먹는구나.”        


 부인인 김은정씨가 “어제도 엄청 마셨거든요” 하면서 남편을 흘겼다.        


 대종상은 1,000만원        


 ▼ 한창때는 주로 누구랑 술을 드셨어요.


 “죽은 장혁 선배, 임권택 감독님하고도 많이 먹었지. ‘바보들의 행진’ 만든 하길종 감독은 내가 죽였는지도 몰라. 하도 술을 먹여서, 그 사람 동생이 하명중이라고 영화배운데 지금은 극장 사장 하고 있지. 술만 많이 먹은 게 아니고 밥도 많이 먹었어. 김영인 같은 사람들하고, 제주도 돼지갈비집에서 3명이서 100인분씩 먹고 그랬어.”        


 ▼ 에이, 어떻게 100인분을 먹어요.


 “먹었다니까.”


 ▼ 술은 주로 어디서 드셨어요.       


  “충무로지 어디야. 진고개식당, 평양냉면 같은 데서 많이 먹었어. 안주 잘 주는 곳 찾아다니면서. 갈비집에 가서 술 먹으면 갈비는 비싸니까 일하는 애한테 ‘갈비 재운 국물 좀 줘라’ 해서 먹고 그랬어. 소금 찍어 먹으면서 소주 마셨어. 돌소금. 아니면 오징어 한 마리 갖다놓고 뜯어 먹으면서. 유명했던 조명감독 하나는 술 먹고 다방에 있는 어항에서 금붕어 주워 먹고 죽었어. 간디스토마로. 나하고 술 먹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지.”        


 ▼ 최고의 액션배우가 돈이 없어서….        


 “무슨 돈이 있어. 없어. 아무리 활동 많이 할 때도 돈 없었어. 그때 충무로는 다 그랬어. 다들 어려웠으니까 친한 감독이 ‘야, 이번에 나 영화 하는데 좀 도와다오’ 그러면 ‘예, 그래요’하고 영화 했어. 뭐 묻지도 않고. 주면 받고 아니면 뭐 그냥 해주고. ‘야, 망했다’ 그러면 ‘됐어요’ 그랬지 뭐. 많이 받았지만 상 같은 것에도 난 관심이 없었어.”        


 이때 부인 김은정씨가 대화에 끼었다.


 “그때는 상 받으려면 돈을 내야 했어요. 옛날에는 대종상이다 뭐다 상 준다고 하면 뭐가 날아와요. 얼마 내라, 이렇게. 한번은 대종상에 일곱 작품이 노미네이트 됐는데, 그중 여섯 작품이 이 사람 작품이었어요. 주인공으로만, 그런데 상은 나머지 한 작품이 받았어요. 이 사람은 돈을 안 내니까. 그런데도 대종상 같은 영화상을 수십 개 받았어요. 그때는 정말 대단했으니까.”        


 ▼ 얼마를 내라? 그럼 상 준다.        


 “예, 그 당시에는 거의 뭐 1000만원씩, 70년대 1000만원은 큰돈이에요.” 김희라씨가 다시 대화에 들어왔다. “그럼. 한 작품을 만들 정도는 되지, 한 작품 제작할 만큼. 그런데 그런 건 적는 게 아냐. 그냥 알아듣기만 하라고.” 
 저거 너 가져라


▼ 참,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길거리에서 만났지, 뭐.” 김희라씨의 대답에 김은정씨가 픽 웃었다. 그리고 대신 설명을 했다. “아니에요. 혹시 옛날에 ‘영상시대’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 아니요.      

 

“이장호, 홍파, 김호성, 하길종 감독 같은 분 6명이 영상시대라는 걸 만들어서 전국에서 배우를 공모했어요, 영화배우를요. 죽은 임성민씨, 지금 영화사 사장하는 최민희씨, 그리고 제가 1기로 뽑혔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출연한 작품이 설태호 감독님 작품이었는데, ‘보르네오에서 돌아온 덕팔이’라고. 거기서 제가 아빠(김희라)와 부부로 나왔어요. 그렇게 처음 만났죠.”        

 

가만히 듣던 김희라씨가 대화에 다시 끼었다. “설 감독이 나한테 ‘저거 너 가져라’ 그런 거야. 그래서 가졌지 뭐.” 기자는 웃음이 났다. 하지만 꾹 참고 진지하게 물었다.

 

▼ 그래서 얼른 가지셨어요?

 

“응. 근데 내가 그때 눈깔이 삐었어.”

 

▼ 왜요? “더 좋은 년들이 많았는데.”        


얼굴이 어두워진 김은정씨가 “아빠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라며 김희라씨의 겨드랑이를 쿡 찔렀다. 김희라씨가 말했다. “응, 나는 정신 죽어도 못 차려.”


김은정씨는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이런 얘기도 들려줬다.


“연애할 때 처음에는 약속을 너무 잘 지키는 거예요. 어디 뭐 이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딱 그 시간에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마냥 기다리게 하고. 작전에 걸린 거지.”


김은정씨가 말한 그 다음부터란 ‘마음을 준 뒤’다. 김희라씨 표현대로라면 ‘가진 뒤’가 된다. 김은정씨에게 물었다.        


▼ 김 선생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두 손을 모아 큰 동그라미를 만들며) 그때는 이 사람 팔이 정말 이만했어요. 제 허리하고 똑같았어요. 21인치. 자이언트, 그래서 나는 아빠가 불사신인 줄 알았어요. 미스터코리아 대회에도 나간 사람이니까. 기자들 때문에 주로 수원에서 연애를 했는데, 거기에 프로권투 심판하던 윤석환씨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저희를 데리고 다니면서 연애하게 해줬어요.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주먹이었어요. 도장도 큰 걸 가지고 있고.” 
 
바람, 바람, 바람


▼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셨는데, 김 선생님께서 바람을 많이 피우셨죠. 세상이 다 아는 얘긴데요. 부인이 고생을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바람기에 질려서 김은정씨가 미국으로 도망갔었다는 얘기도 있고.


김은정씨는 “누가 그래요? 근데 이 얘기를 시작하면 너무 적나라해지는데…”라며 걱정했다. 김희라씨가 아무렇지 않은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맞아. 도망갔어.”      


이때부터 두 부부는 ‘외도’를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는 주로 들었다.        


“1990년인가 어느 날, 아빠가 ‘미국에 가서 애들 밥도 해주고 살아라’ 그래요. 그때 우리 애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자기가 돈을 매달 보내준다고. 당시 살던 집을 전세 주고 한 10만달러 준비하면 미국에서 작은 가게도 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죠. 전 정말 모르니까요.”(김은정)


“모르긴 뭘 몰라, 미국이 좋으니까 간 거지.”(김희라)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전 저녁 해가 넘어가면 못 다녔어요.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이 사람이 새벽 2시, 3시에 와도 그냥 앉아서 기다리고. 그 정도로 바보 같았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편이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국 가는 비행기표를 사온 거예요. 그것도 바로 내일 가는 표를.”(김은정)        


“우린 원래 일을 그렇게 해. 속전속결로다.”(김희라)        


“근데 그런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매일 어떤 여자들이 집으로 전화를 하는 거예요. 밤에, 울며불며. 우리 아빠 찾는 전화를. ‘자기는 어떻게 하냐. 책임져라’라면서. 결국 생각해보면 여자들 때문에 절 미국으로 보낸 거죠.”(김은정)        


▼ 그런 걸 알면서도 가셨어요. 가란다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웃겨. 내일 미국으로 가란다고 가고. 내가 바보예요. 그런데 가야지 어떻게 해요. 표까지 다 사왔는데. 난 그거 무르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미국에 가 있으니까 아는 사람들이 전화를 해 주는 거예요. ‘아빠가 어디에서 뭐 어떤 여자하고 뭘 어떻게 한다더라’, 그런 얘기를.”        


“다 구라야, 그거.”(김희라)


“진짜예요. 진짜.”(김은정)


“전화한 사람들이 괜히 전화한 거야, 심심하니까.”(김희라)        


▼ 어쨌건 바람은 많이 피우신 건 맞잖아요.


“그건 바람이 아니고 봉사야. 응, 혼자 있는 사람은 불쌍해서 도저히 그냥 못 봐서….”


▼ 불쌍한 여자가 많았어요?


“그때 명동에 가면 널렸어, 그런 애들.”(김희라)        


“나 하나만 입 딱 다물고 있으면 이 사람은 그냥 명예로,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았어요. 나중에 알면 우리 아이들도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 동안 바람 피운 여자가 손가락 발가락으로는 다 못 세고 머리카락으로 세야 할 거예요.”(김은정)
 


▼ 미국에 가신 뒤로 왕래는 자주 있었어요?

 

“아빠가 자주 오지는 않았어요. 워낙 바빴고. 근데 가끔 와도 하루 있다가 돌아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하루 사이에도 미국 집으로 여자들이 전화를 해대고. 아빠 찾고 난리가 나는 거야.”


▼ 이혼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이혼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이혼 하면 난 절대로 못 사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바보였다니까.”(김은정)


뇌졸중, KBS 인간극장


▼ 미국에서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에는 돈을 보내줘서 살았고 나중에는 제가 거기서 노래교실을 했어요. 작곡가 김학송, 이인섭 선생님하고요. 아빠는 골프숍 같은 거 하면서 여자들한테 봉사하고 다니고. 어떤 여자는 아빠가 벤츠를 사 줘서 끌고 다닌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언젠가는 제가 한국에 와 있는데도 안 만나줬어요. 미국에 와도 여자들하고 계속 연락하고. 진짜 나쁜 남자였지, 아주.”(김은정)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곧 부부싸움이 날 것 같았다.        


▼ 어떻게 그렇게 사셨어요, 그걸 다 감내하면서….        


“한때는 그 문제로 우울증도 걸린 적이 있어요. 그래도 내색은 안 했어요. 자존심이 상해서.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누구 마누란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전화를 하신 거야. ‘김 서방 용서해주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팔자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김은정)        


▼ 김희라씨가 2000년경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죠. 그 후에 부인께서 한국에 오신 걸로 아는데. 얼마 있다가 어려워진 모습이 방송에도 나왔고….        


KBS 인간극장에 김희라씨가 나온 건 2001년 5월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였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돈이 없어 여관방을 전전하는 모습이 시청자를 울렸다.        


“미국에 있어도 전화는 꾸준히 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는 스님한테 이 사람 좀 찾아달라고 부탁 했더니 병원에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쓰러진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전화를 했더니 어떤 여자가 받는 거예요. 사무실에 있는 미스 김이라면서. 그때는 정말 고마웠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자가, 하여튼 귀국했을 때는 아빠는 벌써 퇴원한 뒤였고요.”(김은정)


▼ 어디에서 쓰러지신 거예요.        

 

“길거리, 어딘지는 몰라. 매니저가 병원에 실어다줬어.”(김희라)      


▼ 당시 방송을 보면 김희라씨가 여관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나오는데…. “KBS ‘인간극장’에서 그렇게 찍었지. 사실이야.”(김희라)        


“처음에는 말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길거리 간판을 읽게 했어요. 큰소리로. 차에 둘만 있으니까 큰소리로 읽어도 부끄러울 게 없잖아요. 지금은 정말 좋아진 거예요. 그런데 몸이 그렇게 된 뒤에도 바람 피운 여자들한테 연락이 오는 거야. 특히 그 미스 김한테. 처음 병원으로 제가 전화했을 때 받았던 그 여자애가 사실은 아빠가 만나던 여자였는데 이 여자애가 아빠 돈을 다 가져간 걸 나중에 알았지. 아빠한테 사채놀이까지 했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아빠가 여관방을 전전했다는 것도 사실은 날 피하려고 도망 다닌 거더라고요. 그 여자애가 그때 스물여섯 살밖에 안 먹었는데 얼마나 나를 살살 놀리고, 속이고 했는지, 아주 못된 여자였어요. 한 3년 전까지 연락을 했다니까요. 아빠가 몸이 이런데도.”(김은정)


“내가 봉사를 너무 잘해줬나봐, 내가.”(김희라)        


“그래서 내가 아빠하고 그 여자애가 살던 집에 가서 다 때려 부쉈잖아. 난생 처음으로. 그래도 이 사람은 여자 등치고 그러진 않았어요. 웬만한 남자 배우들은 다 돈 있는 여자들 등치고 살았거든. 젊으나 늙으나, 근데 이 사람은 다 퍼주고 살았죠. 그건 내가 인정해. 그리고 여자도 한 번에 한 명씩만 만나요. 한 3년씩. 나만 빼고 보면 지조가 있었다고 봐야지.(웃음)”(김은정)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여자들한테 열심히 봉사를 했지. 그래서 내가 ‘남자춘향이’야.”(김희라)        


지가 무슨 공주라고


▼ 미스 김 찾아가서 때려 부순 게 언제예요?      


“2007년인가.”(김은정)


“(부인을 가리키며) 그래서 전과자야.”(김희라)       

 

 “내가 남대문경찰서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아, 그건 형님이 잘못했네, 그러면 형님을 그 집 문 앞에 세워놓고 형수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더라고. 그건 괜찮대. 왜냐하면 이 사람이 살던 집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있으면 다 부숴도 괜찮다는 거예요. 대신 혼자 들어가면 안 된대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아빠를 앞장세웠지. 내가 너무 볶으니까, 어린 것이 너무 약을 올리니까.”(김은정)        

 

“내가 오죽하면 앞장을 섰겠어.”(김희라)


“아파트까지 갔는데 문이 잠겼잖아요. 자기네끼리 약속하고 어디다 뭐 열쇠를 놓는 데가 있나봐, 아빠가 ‘잠깐만’ 그러더라고. 근데 내가 열쇠 따는 사람을 불렀어요. 그런데 열쇠를 딴 게 아니고 ‘열쇠뭉치 주변을 뚫어달라’고 했지. 새 아파트였는데. 정말 드릴로 뚫었어요.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이만큼.”(김은정)


       
▼ 들어가서 어떻게 하셨어요.

 

“들어갔는데 마침 망치가 문 앞에 이렇게 있더라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들어가서 다 깼지.”(김은정)        


▼ 잘하셨네요.        


“커튼도 뭐 지가 공주라고 공주 커튼을 해놓고 있어요. 가위를 가져와서 중앙을 다 자르고 계란 있는 거 전부 다 온 사방에다 다, 아무것도 못쓰게 만들어 놨어. 김치니 뭐 반찬 이런 거 다 쏟아 붓고. 침대를 칼로 다 뜯어놓고, 아주 난리가 났지. 그때가 9월8일이니까, 냄새 때문에 그 아파트 주민들이 난리가 났어요. 김치니 뭐 간장, 기름 이런 거 냄새 때문에. 내가 그렇게 했다니까요. 그러고는 내가 여자애한테 전화를 했어, ‘나 지금 너네 집에 왔다’고. 그랬더니 전화를 딱 끊어버려요. 그 다음에 지가 와봤나 보지, 너무나 기가 막히잖아. 나중에 그 여자가 나한테 내용증명을 보냈어요, 어디다 감히, 나보고 800만원을 물어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해라’ 그랬어요. 그랬는데도 계속 전화를 해요. 지금은 결혼했는데, 내가 조만간 그 여자 남편 찾아가서 또 뒤집어놓을 거예요.”(김은정)          


기자와 김은정씨가 대화를 하는 동안 김희라씨는 계속 딴청을 피웠다. 옛날 생각을 하며 화가 잔뜩 난 부인의 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저 탁자보를 만지작거리거나 창밖만 쳐다봤다.
 


▼ 그런데 여자는 그 여자 한 명 뿐이었어요?

 

“아니요, 많아요. 그 여자는 제일 마지막 여자.”(김은정)        


▼ 선생님은 왜 그렇게 바람을 피우셨어요?     


 “나는 바람 피우는 걸 좋아해. 바람 안 피우는 새끼는 나쁜 놈들이야. 여자들을 즐겁게 해줘야지, 남자가.”(김희라)      


▼ 가족은 그만큼 힘들잖아요. “뭐, 저도 바람 피웠겠지.”(김희라)        


“이 사람이 바람 피운 여자 시집도 보내주고 그랬어요. 뉴질랜드로. 그래도 아이들 아빠니까 결국은 다시 돌아왔죠.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사람을 어떻게 버려요.(웃음). 난 전화에도 아빠 번호를 ‘귀염둥이’라고 저장해놨어요. 그리고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에요. 지금은 오히려 빨리 건강해져서 바람이라도 피웠으면 좋겠어요. 보기에 딱하잖아요.”(김은정)        


“난 복이 많은 사람이야. 특히 여자 복. 사람은 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 가는 거야.”(김희라) ‘해피엔드’로 끝이 난 듯 보였지만 액션스타의 외도 논란은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해도 항상 여자문제로 끝이 났다.        


정치 재미없어


김희라는 한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다. 1996년엔 총선에도 출마했다. 김종필씨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소속이었다. 서울 광진구에서 추미애 현 민주당 의원과 붙었다. ‘물론’ 떨어졌다. 낙선 이후 김희라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일까. 김희라씨는 정치를 하던 시절에 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인 이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정치를 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동길 박사하고 내가 아주 친해. 그분이 하도 하라고 해서 한 거야. 김 박사가 나한테 ‘당신 정치하면 딱 맞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냉큼 나왔지. 임권택 감독이 영화 하면 좋겠다고 해서 영화에 나가고, 김동길 박사가 정치 하면 좋겠다고 해서 정치 하고. 그게 다야.”        


▼ 어땠어요?


“재미없어. 작품 하나 하는 게 월등 나아.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졌고. 그래도 난 선거에서 제일 돈을 적게 쓴 사람이야. 그냥 내가 출연했던 작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 부인이 미국에서 나오셔서 선거운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그거 때문에 떨어진 거야.”(웃음)


▼ 정치인들하고도 두루두루 친하셨다고 들었어요. “난 원래 친해. 김종필씨는 아버지처럼 따랐어. 이런 건 적는 게 아니야.”

 

▼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박정희 대통령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원래 친구야. 나이가 같아. 군인 할 때는 우리 집에 매일 오다시피 했어. 김종필씨도 그렇게 만났어. 그 사람 아들이 내 고등학교(중동고) 후배야. 2004년인가 선거할 때도 나를 불러서는 비례대표 준다고 그랬었어. 돈도 없고 기력도 없어서 안 한다고 했지.”        


“대통령들하고도 많이 친했어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밤마다 청와대 들어가서 고스톱 치고 놀다 오고. 또 전두환 대통령 동서가 제 친척 오빠예요.”        


김은정씨가 대화에 끼었다.        


▼ 정말인가요?


“그런 건 알고만 있어. 쓰지 말고.”


▼ 누구랑 치셨어요? 고스톱.        


“밑에 있는 사람들하고 대통령하고. 수행비서, 업무비서, 대통령 일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하고.”


▼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고스톱을 잘 치나요.      


“나만큼 쳐. 그냥 숫자만 알지. 돈 벌려고 치는 것도 아니고. 그땐 그랬어. 대통령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전부 다. 대통령들 다 기가 막힌 사람들이야. 너무 좋아. 전두환 대통령은 정말 남자야.”      


▼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대통령 되기 전에 특전단에 있었어. 그 양반이. 특전단은 내가 국군영화 찍을 때 수없이 들어가 촬영한 곳이야. 그러고 그 양반 축구도 했잖아. 나도 학교 다닐 때 축구선수였고. 군인들하고 친해서 반공영화도 참 많이 찍었어. 한 50~60편 되나. 국방부 들어가서 찾아봐. 거기의 반은 내 작품이야.”        


김희라씨의 부친인 고 김승호 선생은 광복 직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영화배우다. 그가 출연한 영화 ‘마부’‘아빠의 청춘’ 같은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힌다. 몇 년 전 부산영화제에선 김승호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3대에 걸친 영화가문  

 

 김희라씨의 아들인 기주(31)씨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2001년 가수로 데뷔한 기주씨는 현재 영화사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을 준비 중이다. 이로써 3대에 걸쳐 영화가문이 완성됐다. 이에 대해 김희라씨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주씨가 준비 중인 영화사의 이름은 ‘마부엔터테인먼트’다.        


김희라씨는 영화인으로서의 꿈이 뭐냐는 질문에 “영화학교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대학(전북과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영화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가르친다. “좋은 배우는 그래야 한다”고.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은 이랬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마부’를 만든 강대진 감독이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만든 이만희 감독, 최무룡 같은 대선배도 모두 우리 집 문간방에서 영화 공부했던 사람들이야. 모두 대단한 감독, 배우가 됐잖아. 이제는 아들까지 영화를 하고 있고. 그러니까 영화계는 다 우리 집안이라고 봐도 돼. 난 거기에 감사함을 느껴. 죽는 날까지 영화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또 내 역할을 하고 싶어. 좋은 배우로 남기 위해서….”    (끝)

신동아/2010.10.01 통권 613호(p11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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