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무야 나무야

조회 수 165 추천 수 0 2020.06.28 15:08:51

수필/ 나무야 나무야--청조 박은경

 

 

깔깔깔,,,나무가 간지럼을 탄다.

 

껍질을 다 벗어버린 매끄러운 나뭇가지를 손으로 문지르면 간지러워 잎사귀가 바들바들 떤다.

 

간지럼 나무의 다른 이름은 배롱나무, 자미화 또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여름 3개월 내내, 백 일 동안 꽃이 피는 예쁜 나무다.

 

고향 마을 입구에는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처럼 두 줄로 나란히 자미화가 늘어서 있다.

 

여름 내내 빨갛게 고운 꽃을 자랑하다가 들판에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그 화려함을 내려놓고 한 켠으로 비켜 선다.

 

한동안 전라도 광주에 살았던 나는 가끔 시간을 내어 담양에 놀러가곤 했다.

 

죽림원의 선선함과 소쇄원의 날아갈듯한 수려함 그리고 가사문학관과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등,

 

굳이 문학을 꿈꾸지 않아도 절로 문학소녀가 될 수 있는 아담하고 멋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특히 송강정은 정 철 선생이 유배생활을 마치고 정쟁에서 물러나 초막을 지어 살던 죽록정을

 

후대의 자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다시 지어 송강정이라 명호를 붙인 곳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소나무 언덕배기를 휘돌아 흐르는 강이 있었고 강가에 피어난 자미화의 그림자가

 

강물에 비쳐 저절로 그의 시심을 자극했으리라.

 

수백 년 세월이 흘러 지금은 사라져버린 강의 모습이 못내 아쉽지만

 

아직도 그곳엔 늘 푸른 소나무와 꽃이 아름다운 자미화가 굳건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어

 

그 시절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사는 미국 미네소타에는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자작나무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자일리톨(xylitol)껌의 원료가 되는 나무다.

 

꽃도 피지 않고 나무의 모양도 다르지만, 나는 자작나무를 보면서 간지럼나무를 생각하곤 한다.

 

아마도 나무의 밑동이 매끄럽고 비슷하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자라면서 그 껍질을 스스로 벗어버리는 반면

 

자작나무 껍질은 여러 가지 효능을 인정받아 다방면으로 쓰이고 있어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쑥 잎이나 솔잎을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는 것처럼

 

서양인들은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해 의약품이나 화장품 재료로 쓰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만병통치약이라고 한다.

 

일년에 두 번, 봄가을로 자작나무 껍질을 채집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며칠 동안 돌아다니며 채집한 나무 껍질은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된다고 하였다.

 

 


자작나무 단풍은 그 색이 노랗다.

 

그래서 이곳의 가을은 한국과는 달리 노란색이 주류를 이룬다.

 

심지어 단풍나무도 그 잎이 노랑으로 색이 변한다.

 

이상하고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실버메이플이라는 다른 종류의 단풍나무라고 한다.

 

가을마다 만나는 한국의 만산홍엽, 붉은 단풍과는 달리 조금은 아쉬운 가을의 모습이다.

 

이제 화려한 여름도 황금 들판도 다 지나버린 지금, 긴긴 겨울밤을 어찌 보낼까 생각하다가

 

나도 자작나무 껍질로 뭔가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자작나무 껍질은 십여 장의 얇은 껍질이 겹겹이 붙어 있어

 

예부터 종이 대용으로 많이 쓰이고 가면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고 한다.

 

또한 부패를 막는 성분이 들어 있어 경주 천마총에서도 온전한 상태로

 

천마가 그려진 그림이 출토된 적도 있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근처에 흔하게 널려 있는 넘어진 자작나무에서 껍질을 벗겨

 

이 겨울에 무언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을 할 생각을 하니

 

내 얼굴은 절로 미소가 번진다.

 

 


몇달전 병원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갔다가

 

친구 부부의 차를 얻어 타고 고향 집에 다녀 온 적이 있다. 

 

시월 말, 늦가을인데도 마을 입구에 자미화 몇 송이가 아직도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화무십일홍이라 했건만 석 달 열흘을 꽃 피우고도 모자라서

 

코스모스와 국화의 계절에 피어있는 꽃이라니.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넘어 얻은 늦둥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 없는 빈집에는 찬 바람만 가득하고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에는

 

볼품없는 열매들은 힘에 부치는 듯 안쓰럽게 매달려 있었다.

 

간병하느라 고생한다고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와 준 친구에게

 

담장위에 올라앉은 둥글넓적 늙은 호박과 빨갛게 입 벌린 석류들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의

 

우리 동인지를 순서대로 챙겨서 넣어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 읽은 후에 독자의 자격으로라도 우리 문학회에 가입한다면 이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까?

 

힘에 부쳐도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는 나무들과 세월을 잊은 채, 꽃 피우는 나무들을 보며

 

늦었다 생각 말고 더 열심히 더 뜨겁게 나의 삶을 살아가리라고 다짐해본다.

 

 

  [2014년 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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