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
정순옥
풀피리 소리가 들린다. 내 가슴 속에서 귓가에서도 … 사방에서 풀피리 소리가 들린다. 띨리리 띨리리---. 풀피리 소리는 나를 유년시절 보리밭 두렁으로 인도한다. 가녀린 막내딸 앞에서 하얀 옷을 입은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풀피리를 불고 있다. 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환한 미소를 띠고서 풀피리 소리 타고 그리운 사랑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풀피리 소리는 농촌의 소리다. 농촌 아이들이 소몰이할 때나 농꾼들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마음의 의사 전달을 하고 싶을 때도 사용한다. 풀피리는 여러 가지 나뭇잎이나 풀잎으로 만드는데 잎이 질기고 탄력 있는 뚝새풀이나 민들레 꽃줄기 또는 동백나무나 감귤잎 등이 좋다. 가능하면 싱싱하고 질긴 식물 이파리를 골라 앞면 뒷면 상관없이 가장자리를 살짝 접어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듯 입에 공기를 넣었다가 바람을 앞으로 뽑아낸다. 명인들은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에 더하여 보통 악기에서 낼 수 없는 소리도 풀피리에서 낼 수 있다 하니 얼마나 신비한 우리나라 고유의 천연 악기인가.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풀피리 소리를 우리 아버지는 나의 유년시절에 곧잘 들려주셨다. 참으로 그리운 유년시절이 풀피리 소리와 함께 휘돌아 오고 있다.
풀피리는 초적(草笛)이라고 악학궤범에 올라온 우리나라 전통 천연 악기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궁중음악에 주로 쓰이는 향악기 속에 포함되었다. 나뭇잎 하나로 입술을 진동시켜 웬만한 음악은 다 할 수 있다. 나는 현대에 많이 사용하는 플루트 연주를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부르시던 풀피리를 생각하곤 한다. 플루트의 고음과 저음이 넘나드는 떨림이 아버지가 불던 풀피리 소리를 연상케 하곤 한다. 피리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비록 굳은살로 투박하지만, 위아래 입술을 이용하여 부는 풀피리 소리는 부드럽고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약하게 움직이면 저음이 나오고 반대로 강하게 움직이면 고음이 나오게 입바람을 사용하여 풀피리로 노래를 부른다. 풀피리 소리는 자연에서 나는 소리기 때문에 금속성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보다도 더 마음이 평안해져서 좋다.
농사꾼 아버지는 사시사철 논밭을 왕래하시면서 농사를 지으셨다. 항상 온화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작은 고을의 어른이시었다. 어쩌다 논이나 밭두렁에서 아버지는 보리잎이나 콩잎을 따 풀피리를 불면서 막내딸에게 사랑을 노래하시던 모습이 아스름히 떠오른다. 하얀 감꽃이 필 때면 감잎피리를 불러 주셨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 주시기도 했다. 농촌에서는 초록피리라고도 불렸던 풀피리는 위아래 입술을 통해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한국의 천연 고유 악기다. 풀피리는 두 입술과 손을 이용해 살짝살짝 움직여 주면서 기교를 부리면 보통 악기에선 낼 수 없는 음도 낼 수 있는 참으로 귀하고 신비로운 자연 악기다.
새 생명이 잉태하는 환희의 봄날,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동산에서 뻐꾹뻐꾹--- 청아한 뻐꾸기 노랫소리에 어우러져 들리는 버들피리 소리.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미루나무 위에서 힘차게 한 생애를 찬미하는 매미들의 맴맴맴---소리에 맞춰 들리는 보리피리 소리. 모든 만물이 익어 풍성해 가는 가을날, 혼자서 갈대밭을 헤매며 님을 찾아다니는 귀뜰귀뜰--- 귀뚜라미의 소리에 장단 맞춰 들리는 갈잎피리 소리. 차가운 바람이 대나무를 흔들어 대는 겨울날, 함박눈에 파묻혀 있는 동백꽃 속을 휘젓고 다니면서 내는 동박새의 푸르릉 푸르릉--- 소리에 섞여 들리는 동백피리 소리.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에 섞여 들리는 아버지의 풀피리 소리는 참으로 내 가슴을 기쁨으로 떨리게 하는 소리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다. 어떤 소리는 나를 즐겁게 하지만 어떤 소리는 나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풀피리 소리는 언제나 나에게 그리운 사랑을 안고 오는 아름다운 소리다. 풀피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촉촉해진다. 8남매의 7번째로 태어난 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자식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보살펴 주시느라 고단한 삶을 사시는 아버지가 마음이 아팠다. 내가 동무들과 놀다가 넘어져 팔이 부러졌을 때 그 캄캄한 밤중에 나를 등에 업고서 원평 의원을 찾아 좁다란 밭두렁을 달리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내 왼팔을 볼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나는 왼팔을 움직일 때마다 뼛속에서 울려 퍼지는 풀피리 소리를 듣는다.
풀피리로 아리랑 등 서정적인 민요뿐만 아니라 각종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우리 아버지는 창가(唱歌)를 버들피리로 부르시려고 열심히 노력하셨던 모습도 아스름히 떠오른다. 창가는 신문학 태동기에서 시조에 음곡(音曲)을 붙여 부르는 신식 노래로 통했다. 하얀 옷을 입은 아버지 친구들이 모여 친목회를 하실 때면 막걸리를 마시면서 창가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럴 때면 잔치 시중을 드시는 우리 어머니의 얼굴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고 나에게 한마디 하신다. “--- 너희 아버지는 목청이 좋아 창가도 잘 부르신다.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가 창가를 부르시면 모두들 좋아서 더 부르시래.” 우리나라 민요 ‘창부타령’이며 아리랑뿐만 아니라 동요도 풀피리로 불러 주시며 나를 기쁘게 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나에게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추억을 선물로 남겨 주신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도 풀피리를 부시나 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풀피리 소리만 들리는 이 시간, 나는 따뜻한 아버지 사랑 속에서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함을 느낀다. 띨릴리 띨릴리… 풀피리 소리를 타고서 아버지의 사랑을 향해 나는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