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왕국, 라플란드로의 환상 여행

조회 수 7353 추천 수 1 2015.05.12 16:39:15

                                                            눈의 왕국, 라플란드로의 환상 여행

      

라플란드
믿을 수 없이 고요한 땅, 라플란드에 안착했다. 라플란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눈이 빚어낸 환상 동화,핀란드 라플란드에서의 이야기.

라플란드
북유럽 신화에는 라플란드를 배회하는 요괴, 트롤이 등장한다. 트롤이 가까이 다가가면 암소의 젖은 잘 나오지 않고 암컷 새는 알을 낳지 않게 된다고, 트롤이 나타나는 어슴푸레한 밤에는 모든 문을 닫고 아침이 올 때까지 죽은 듯이 잠드는 것이 좋다는 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눈과 추위, 어둠에 대한 북유럽인들의 두려움이 응집된 생명체. 트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늘 푸르스름한 눈의 왕국이 펼쳐졌다.

고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이발로Ivalo의 현재 온도가 영하 30도라는 글자가 기내 화면에 깜빡였다. 가방에 넣어뒀던 두꺼운 패딩 점퍼를 꺼내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지퍼를 코끝까지 올렸다. “처음 내리는 눈 향내가 난다.” 핀란드가 사랑한 음악가 장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교향곡 제6번을 두고 이런 말을 했었다. 눈의 향내라니. 그것도 ‘처음 내리는 눈’의 향내라니. 상상조차 어려운 차원의 감각이라 서울에서 이 글귀를 읽었을 때는 막연한 호기심만 일었었다. 이발로 공항의 활주로에 항공기가 무사 안착했다. 기내 승무원은 공항에 도착 게이트가 없어 항공기의 문이 열리면 곧장 이발로 땅을 밟게 된다고 했다.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드디어 두꺼운 알루미늄 문이 철컥 열렸다. 그때 문 틈새로 시벨리우스가 말한 그 눈 내음이 밀려왔다.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공기에 가득 묻어 들어오던 그 냄새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다.

얼어붙은 고요의 숲
이발로 공항 주변은 온통 얼어 있었다. 멀리 펼쳐진 것이 눈인지 얼음인지, 잔디밭인지 돌인지 분간이 안 됐다. 땅도 구름도 공기도 모두 다른 행성의 물질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돌리며 놀던 지구본이 떠올랐다. 하얗게 칠해져 있던 북반구의 극지방. 이번 라플란드Lapland 여정의 관문을 이발로 공항으로 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내음과 눈 빛으로 가득한 공항이라니,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 핀에어 항공기와 이발로 공항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라플란드는 북유럽 땅 중에서도 북극권arctic circle 안에 위치한 넓은 지대다.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러시아의 콜라 반도에 걸친 유럽의 최북단. 그중 핀란드 라플란드는 핀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순록과 시베리아허스키가 뛰어놀고 엘크와 울버린이 사는 숲과 평원에는 1년 중 9개월 동안 눈이 내리며, ‘미드나잇 선midnight sun’이라 불리는 여름의 백야 기간에만 눈이 멈춘다. 겨울의 라플란드는 오전 10시쯤 동이 터서 오후 2시면 저문다고 했다. 그나마 해가 떠 있는 4시간 동안도 대체로 쨍쨍한 햇빛을 볼 수 없다. 하루 중 20시간이 어둠 속이다. 밤과 낮의 경계는 희미하고 여름과 겨울의 경계는 무섭도록 뚜렷하다. 라플란드에 머무는 내내 시간을 확인하려면 오로지 휴대전화를 봐야 했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밖을 내다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막에 휩싸이고 만다.공항으로 마중 나온 이나리-사리셀케 투어리즘Inari-Saariselka Tourism의 담당자, 야나와 함께 사리셀케로 이동했다. 사리셀케는 이발로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겨울 놀이를 준비해둔 리조트들이 모여 있어서 라플란드의 핵심 관광지로 불린다. “그래도 땅의 넓이에 비해 아주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오가죠. 붐비고 어수선할 거라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아요.” 우리는 사리셀케를 대표하는 리조트이자, 전 세계적인 명물이 된 칵슬라우타넨 아크틱 리조트Kakslauttanen Arctic Resort로 가고 있었다.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전봇대, 전깃줄, 도로 표지판은 모두 하얗게 눈이 얼어붙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잎이며 가지며덕지덕지 눈 뭉치가 묻어 있는 나무들은 밤이 되면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다음에는 여름에 와보세요. 이 새하얀 땅이 모두 녹색이 되거든요. 정말 아름답죠.” 야나가 말했다. 그녀뿐 아니라 이후에도 한겨울의 라플란드에서 만난 핀란드 사람들은 하나같이 봄과 여름의 라플란드를 정성껏 묘사했다. 이런 땅에,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숲에 여름이면 석 달 동안 자정이 되어도 해가 떠 있고 먹음직스러운 야생 베리가 지천으로 열린다니. 몇 번이고 들었지만, 들을수록 환상적이었다.

라플란드
스키 슬로프의 꼭대기에 위치한 레스토랑. 얼어붙은 눈이 녹지 않아 마치 눈으로 만든 집처럼 보인다.

라플란드
사리셀케의 한 교회. ‘스노 웨딩’을 치르고 싶어 하는 커플들을 위한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좋다.

라플란드
스키 슬로프를 마치 평지처럼 오가던, 빨간 볼의 핀란드 틴에이저들.

라플란드
핀란드 사람들에 대한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영하 30도에 그리스인들은 다 얼어죽고 지구상에서 사라지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집에서 세탁물을 말리기 시작한다.” 영하 30도에 시원한 음료를 즐기는 핀란드 커플.

덕지덕지 눈 뭉치가 묻어 있는 나무들은 밤이 되면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다음에는 여름에 와보세요. 이 새하얀 땅이 모두 녹색이 되거든요. 정말 아름답죠.” 야나가 말했다. 그녀뿐 아니라 이후에도 한겨울의 라플란드에서 만난 핀란드 사람들은 하나같이 봄과 여름의 라플란드를 정성껏 묘사했다. 이런 땅에,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숲에 여름이면 석 달 동안 자정이 되어도 해가 떠 있고 먹음직스러운 야생 베리가 지천으로 열린다니. 몇 번이고 들었지만, 들을수록 환상적이었다.

라플란드의 영혼, 사미족
현실 세계의 라플란드는 눈의 여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 예로부터 라프족Lapp 혹은 사미족Sami이라 불리는 라플란드 원주민의 터전이다. “우리의 숲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있어요. 순록도, 허스키도 많지요.” 지리적 특성상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라플란드에서, 사미족은 허스키나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며 들판을 이용해 유목 생활을 했다. 순록 사파리에 나서고 개썰매를 타고 순록 고기 요리를 먹는 등, 라플란드를 찾은 사람들이 즐기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는 사미족의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핀란드 사람들이 노던 라이트northern light라 부르는 오로라를 라플란드에서는 ‘사미족의 영혼’이라고도 말한다. 차가워서 더 맑은, 한없이 맑아서 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라플란드라는 땅을 디디고 사는 것. 라플란드 사미족의 신비감은 거기에서 온다.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엉겨 붙으면 판타지는 극으로 치닫게 마련이니까.

라폴란드
오전 8시. 라플란드를 찾은 사람들은 하늘의 농도와 상관 없이 눈으로 뒤덮인 숲을 산책하거나, 조용히 스키를 가지고 언덕을 오른다.

라폴란드
허스키 사파리를 하기 위한 기본 자세. 본인의 실제 사이즈보다 2~3배는 되어 보이도록 옷을 껴입을 것. 파란 오버올은 자유롭게 빌려 입을 수 있다.

라폴란드
함께 라플란드 숲을 달려준 허스키. 6마리로 구성되는 팀 안에서 브레인을 담당한 녀석이다.

라폴란드
점심시간을 갓 지난 시간, 하늘을 보니 벌써부터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이발로 공항 카운터에서 집어온 신문을 펼쳤다. 이 지역의 계간 신문, <이나리-사리셀케 뉴스Inari-Saariselka News>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이런 표제가 나왔다. ‘12월, 사리셀케에 극의 밤polar night이 찾아온다.’ 극의 밤. ‘극야’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극지방에서 겨울철에 해가 뜨지 않고 밤이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함께 신문을 보던 야나가 설명을 보탰다. “사리셀케, 이발로, 이나리 지역은 지난 12월 초부터 한 달 동안 푸른 땅거미 속에 파묻혔었어요. 매해 한 달 정도, 라플란드의 지평선 위로는 태양이 보이지 않죠. 1월이 된 지금은 그나마 해가 길어진 거예요. 사리셀케보다 북쪽인 이발로에는 비로소 어제부터 지평선 위로 해가 올라오기 시작했죠. 이제 ‘no sun’ 시즌이 끝난 거예요.”검푸른 하늘과 눈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수천 그루의 나무 사이를 달려 칵슬라우타넨 아크틱 리조트에 도착했다. 리셉션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스키 폴 두 쪽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눈을 맞추더니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핀란드에 도착해 세 번째 듣는 질문이다. 핀란드의 국민 캐릭터 무민Moomin의 일본 내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무민 때문인지,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 때문인 건지, 라플란드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꽤 많았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어요”라고 말하니 자신은 사우스 핀란드에서 왔다며 받아친다. 웃고 말려다가 그의 깔끔한 말투에 마음이 풀려 라플란드에 자주 오느냐고 묻고 말았다. “오, 난 겨울마다 라플란드로 바캉스를 와요. 스키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핀란드인인 그는 영어를 아주 매끈하게 구사했다. 핀란드 사람들의 제2외국어는 스웨덴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핀란드 사람들과는 어렵지 않게 영어 대화가 가능했다. 사우스 핀란드 출신의 새초롬한 도시 남자는 몇 해째 겨울을 라플란드에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몇 주씩 말이다. 체크인을 마치고 리셉션 센터를 빠져나가려는데 그가 말했다. “진짜 라플란드를 보고 싶다면, 그냥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돼요. 아니면 당신만의 고요를 즐기거나.”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두 마디에, 핀란드인의 라플란드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나는 라플란드에 있는 내내 그 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사리셀케를 떠나 이발로로, 이나리로 옮겨갈 때마다 되뇌었다.


이금자

2015.06.02 12:49:33
*.49.228.79

  눈 온 거리가 엄청 쓸쓸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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