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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햇살이 곱고 바람이 없는 날, 필자는 덕수궁 국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이태리 볼료나의 화가 모란디의 그림을 보러 갔다. 그의 그림은 이제까지 봐왔던 다른 화가들의 색상과 전혀 다른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강열한 색상이나 야성적인 색상이 전혀 없었고 은은하고 파스텔 계열의 색으로 어찌 보면 아주 단조롭고 졸린 듯한 미색과 보라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재도 정물, 물병,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 소라 껍질, 거의 이 정도였다.

그림을 다 관람하고 영사실에서 상영되는 모란디의 일생에 관한 영상을 보면서 그의 정신적인 고뇌와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은유적인 방법으로 단순한 형상의 그림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과 불안과 우울함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 평생을 누나의 집에서 같이 살았고 좁은 작업실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러시아의 톨스토이가 생각났다. 모란디의 작은 집과 톨스톨이의 대저택은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작은 집에서 평생 처박혀 산 사람과 큰 집에 살면서 그 집을 마다하고 방랑생활을 했던 화가와 작가의 생활신념이 이리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로웠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가 생전에 살았던 장원 '야스나야 폴리나'를 한국에서 온 곽재구 시인과 찾아갔던 적이 있다. 곽 시인은 그 때 나해철 시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돌고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필자의 집을 찾았다. 나 시인은 생업(성형외과 의사)을 위해 페테르브르그에서 서울로 넘어가고 곽 시인만 모스크바 필자의 집에 오게 되었다.

곽 시인은 며칠을 묵으며 모스크바 대학을 비롯해 시내를 구경하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생가를 가면 어떻겠냐고. 그 당시에만 해도 개인이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차편이 제일 큰 문제였고 하루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서둘러야했다. 그래도 현지에 산 필자를 믿고 부탁을 하니 난감했지만 아는 고려인 지인들을 통해 자동차를 구했다.

곽 시인과 나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거의 점심 때 쯤에야 러시아 중부에 속한 톨스토이의 생가 야스나야 폴리나에 도착했다. 필자의 감흥이 있어서일까, 야스나야 폴리나는 기운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보통의 집을 방문한 것과는 달리 그곳 특유의 웅장함과 고요함이 입구부터 배어 있었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게 서있었고, 온실을 지나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대저택이 있었다.

이층집이었는데 톨스토이의 식구들이 모여 있었던 거실에는 조상들의 초상화가 있었고, 식탁도 크고 집기들도 은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파와 장식장 그리고 톨스토이가 글을 쓰던 서재에는 깃털이 달린 펜과 잉크, 육필 원고가 남아 있었고 그가 아파 누워 있었던 작은 방에는 법랑으로 된 대야며 주전자, 하얀 면으로 된 수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그가 누운 침상의 크기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작고 왜소했다.

거실에서 바라본 밖의 정원은 정말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각종 꽃들이 만발해 아주 화려하고 다른 세상, 근심 걱정이라고는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의 고요함과 정숙함과 달리 정원의 화려함은 극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택에서 나와 장원을 거닐다 마구간이 보였는데 그곳마저 분위기가 뭔가 말로 할 수 없는 묘한 장중함이 느껴졌다. 마구간을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생의 고뇌가 담긴 것 같다고나 할지, 아무튼 특별한 느낌이었는데 웬걸, 저녁 해가 마구간을 배경으로 장원 끝에 걸리자 노을의 색상이 장관이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황금색의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 귀족 집안 출신으로 부계는 백작가였고 모계는 후작가였다. 그래서 백작령 장원인 이곳 야스나야 폴리나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와 누이들이 숙모의 손에서 키워졌다. 그는 맏형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형을 따라 군대에 입대하고 형이 아파서 불란서 남부에서 휴양하다가 죽자 인생관이 바뀔 정도로 형을 믿고 따랐다고 한다.

젊어서 한 때 방탕의 세월을 지내다가 자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 그의 인생 역경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만 같다. 무릇 예술가들은 그런 삶을 겪어야만 비로소 깊은 철학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대학도 자퇴하고 문인들과의 교류에도 환멸을 느껴 결국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인생을 성찰했다.

그처럼 큰 재산가인데도 농노들의 해방을 위해 야스나야 폴리나에서 초등학교를 경영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안학교인 것이다. 출석부도 없고 가방도 없는 학교였는데 그곳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몰두한 것은 루소의 '에밀'을 읽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 어린 아내와 결혼해서 행복한가 싶었더니 급기야 집과 아내를 멀리 하고 신을 찾고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인생은 좌충우돌, 설상가상 이런 단어들이 어울릴 정도로 급박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 그는 연금술사처럼 귀중하고 값진 엑기스의 인생론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이라고 말했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동물적인 자아를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로 추앙받는 레프 톨스토이는 집안에 갇혀서가 아니라 밖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치고 깨지는 가운데 정론을 펴낸 것이다. 그는 말년에 기차역에서 객사했지만 장원 뒤뜰에 풀로 된 관 안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비석도 없으나 많은 방문객들은 그곳을 순례자처럼 찾고 있다. 거대한 정원 안의 한 뼘 땅을 차지하고 그는 야스나야 폴리나를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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