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호 평론가

조회 수 441 추천 수 1 2019.10.01 09:36:57

 

                             문학작품에 삼투한 대중적 감수성

                                            -이효석의 경우

 

                                                                                            강심호

 

 

 

유행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새로운 감수성은 문학의 영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금석으로 이효석의 소설들을 점검해보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19323삼천리에 실린 북국점경이란 단편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팔과 목덜미를 드러내 놓고 거리를 거니는 아라사 미인, 온천물에 철벅거리는 아라사 미인', 러시아 여인을 묘사해놓은 한 대목을 보자. '찬 나라의 언 살을 녹이는 뜨거운 물, 그 속에 헤이는 미인의 무리, 안개 깊은 바다 인어의 무리같이 깊숙이 물에 잠겼다가 샘전에 나와 느릿한 허리를 척척 누이는 풍류, 옛적 양귀비의 그것보다도 훨씬 정취가 깊을 것 같다. 창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비쳐 김 오르는 살빛, 젖가슴, 허리, , 두 다리 할 것없이 백설같이 현란하다. 미끈미끈한 짐승의 무리, 하아얀 짐승의 무리.' (이효석, 북국점경, 이효석전집1, p.246)

 

이효석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백계 러시아 여인에 대한 도취를 단지 작가의 이국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위에 인용한 러시아 여인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백설''하아얀'의 강조다. 이와 같이 여성을 하나의 대상으로 에로틱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1930년대를 전후해서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나 서양 영화가 불어넣은 서구 이미지의 주입으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이효석 개인의 특이한 이국취향이나 서구지향이 아니다. 이효석으로 하여금 서구를 미의 기준으로 추앙하게 했던 것은 당대 사회의 대중적인 감수성이었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신문이나 잡지 광고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등장하는 사진이나 삽화에서 이전의 동양적인 여성이 서구적인 체형과 외모를 갖춘 여성들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1926동아일보에 실린 피부미용치료제 '하루나'의 광고를 보면 '흑인이 변하여 미인이 된다'는 식으로 백인을 미녀의 표본으로 설정하는 하나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젊은이들에게 서양 영화의 이미지는 놀라운 파급력을 가졌다. 그래서 '활동사진 배우의 얼굴이 어느 젊은애 숙사치고 아니 부튼 집이 없을' 정도였고, 미남미녀의 기준은 서양 영화배우 누구를 닮았느냐였다. 요즘은 많이 바뀌어서 '장동건'이 미남의 대명사로, '이영애처럼 생겼다'라는 말이 미녀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1930년대의 대중매체는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구적 이미지를 아름다움의 표본으로 제시했다. 서구미인의 이미지는 온갖 상품이나 영화 주인공의 모습으로 우리의 심층 깊은 곳에서부터 미의 기준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서구적 외양과 스타일이 본질과는 무관한 이미지의 형태로 각인되는 것이다.

 

앞의 북국점경에서 작가가, 우연히 목격한 한 여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미지의 작동방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 가운데에 색달리 눈을 끄는 일점홍이 있다. 단발하고 양장한 현대적 미인, 한 의지의 표현인 반듯한 콧날, 자랑 높은 눈맵시, 꼭 다문 입, 범하기 어려운 엄숙한 얼굴 평범치 않은 교양있는 모던 거얼이다. 그 위에 눈을 끄는 새빨간 웃저고리, 단발 밑으로 가늘게 휘인 목덜미, 은초록색 스커어트 밑으로 밋밋한 다리, 현대 미인의 제일 조건인 고운 다리향기 높은 회령 미인이다."1)

 

여기서 작가는 '단발', '양장', '빨간 웃저고리', '은초록색 스커트', 그리고 잘빠진 다리 등을 미인의 구성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다른 여타의 부가 정보 없이 이와 같은 '모던 거얼'의 복장을 '평범치 않은 교양'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본질을 재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효과다. 본질과는 무관하게 분리된 표면들의 조합이 다시 본질을 재구성해서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스타일이 '교양'있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상품이나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상상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작품인 수난(중앙14, 1934. 12)에서는 대중적인 감수성이 어떻게 미()를 다루는지가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골라준 '유라'의 미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세련된 안목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검은 빛깔에 붉은 줄이 은은히 섞인 사치하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몸에 조화되고 취미에 맞는 넥타이'(p.309)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을 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거칠게 말하면 '소비능력'을 의미한다. 사회의 유행코드를 감지하고 전체적인 삶의 스타일 변화를 파악할 능력을 이효석은 미에 대한 세련된 감각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효석 후기 작품 중 이국적인 취향이나 서구적인 문물이 강조된 소설들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30년대의 대중적 감수성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영화'가 주입한 서구적 이미지, 그리고 소비문화가 여러 매체를 통해 유포하는 미의 기준이 효석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품 전반에 투영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이효석 소설이 '통속화'의 길을 걸었다고 단번에 치부해버리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보다는 그 통속화의 몇 가지 메커니즘을 살펴보는 것이 1930년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내면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효석의 단편 중 통속성이 매우 두드러진다고 평가되는 단편 장미 병들다(삼천리문학1, 1938.1)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현보는 7년 만에 남죽을 만난다. 남죽은 극단 '문화좌'의 배우로 지방의 도회에 내려왔다가 극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교통비마저 없어서 현보에게 부탁하게 된 처지다. 그런 남죽은 7년 전에는 진보적 서적을 통독한 지식여성이었다. 현보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그의 여비를 마련해주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융통하지만, 여비에는 모자란다.

 

그 돈으로 이들은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보우트를 타고, 춤을 춘다. 현보는 결국 집안의 적금통장을 헐어서 여비를 마련해 남죽에게 가지만 남죽은 춤추다 만난 백만장자 난봉꾼에게 몸을 팔고 여비를 얻어 서울로 떠난 후다. 그녀가 떠난 후 현보에게 남겨진 것은 남죽이 남긴 성병뿐이다.

 

한때 진보적인 지식 여성의 타락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이지만 이 작품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선 타락녀 남죽이 영화를 수용하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 현보와 남죽은 영화 목격자를 보고 나오다가 식당의 요리사간의 싸움을 목격하게 된다. 체격부터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싸움은 덩치 큰 쪽이 일방적으로 작은 쪽을 두들겨 쓰러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 모습을 보고 남죽은 '영화의 한 토막과도 같이 아름답지 않아요? 슬프지 않아요?'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에 대해 현보는 그 장면에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어떤 느낌을 받는데 그것은 '방금 보고 나온 영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영화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고 느낀다. 작가는 영화가 현실에 던져주는 영향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막연한 오락이나 흥미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패턴, 본받아야할 모델을 제공한다. 1930년대의 대중들은 영화를 통해 서구적인 미의식을 받아들이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닮아야할 전범을 그 안에서 본다. 이효석의 장편 벽공무한(박문서관, 1941)에서는 그와 같이 영화와 현실이 혼동되고 영화가 현실로 고스란히 수용되는 장면이 나타난다.

 

주인공 미려는 서양 영화 남방비행에서 영화 속의 젊은 여주인공이 늙은 남편을 버리고 소꿉동무를 만나 열애를 벌이는 장면을 보고 결국 파산한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게 된다. 작가의 시각은 물론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었지만, 그의 장미 병들다벽공무한은 영화가 현실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장미 병들다에서 남죽의 변화, 즉 진보적인 지식여성에서 백만장자의 아들에게 몸을 파는 타락한 여성으로의 변모는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벌기 위해서라는 설명은 어쩐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 타락의 개연성은 짐짓 숨겨져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시간을 보내는 찻집, 빠아, 영화관, 유원지에서 보트타기 등은 여가를 보내는 도시적 라이프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중 특히 유원지에서 보트를 타는 대목은 문화상품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효과가 잘 나타나있다. 보트에서 한가로이 노를 저으면서 남죽은 현보에게 고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때 남죽이 묘사하는 고향은 궁핍하고 가난에 찌든 고향이 아니라 유토피아 그 자체다.

 

"솔골서 시작해서 바다 있는 쪽으로 평야를 꿰뚫은 흰 방죽이 바로 마을 앞을 높게 내닫고 있어요"라며 낭만적으로 시작한 고향에 대한 묘사는 현보가 듣기에 '전원교향악'으로 들릴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자본의 힘은 이런 방식으로 부재하는 환각을 주입한다. 유원지에서 한가롭게 보우트를 젓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나 시각매체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현실과는 다른 조작된 이미지인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나 시각매체, 그리고 카메라 앵글에 잡힌 고향, 전원의 풍경은 이미 현실이 아닌 이미지이며, 이것이 소설로 환원될 때는 2차적 이미지, 즉 환영에서 비롯된 하이퍼 리얼리티에 해당할 뿐인 것이다.

 

유원지에서 보트 타기라는 일종의 문화상품이 그것의 향유자를 어떤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이 ()에도 등장한다. 에는 '호텔의 심리학'이라 명명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다음 구절을 보자.

 

 

세운의 의견에 의하면 거리에서는 호텔같이 예절이 바르고 인사성이 깍듯한 데는 없다는 것이다.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방에 있을 때나 뽀이들의 시중은 가려운 곳에 손이 닿을 지경으로 조밀하고 친절하였다. 무례하기 짝없는 거리와는 딴 세상인 그 속에 있을 때에만은 거리에서 받은 가지가지의 상처와, 잡지를 하다가 입은 여러 가지의 봉변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까짓 하찮은 문화인이 다 무어며 주제넘은 문학자들이 다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하고 호텔문을 나들 때 뽀이들이 뛰어와서는 구두를 털어 주고 모자를 받아 주고 할 때마다 세운은 고개를 곧추 들고 속으로 한번씩은 외어 보았다.(이효석, , 전집2, p.205)

 

이는 백화점이 손님을 끄는 방식과 상통한다. 상품을 구매하라, 그리하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된 것처럼 대접해 주겠다. 마찬가지로 호텔에 투숙하라, 그러면 모든 번잡함을 잊고 귀족 같은 생활을 하게 해 주겠다. 소비의 즐거움에는 이러한 측면이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호텔은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다. 그곳에서 파는 것은 친절한 서비스와 일종의 환상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는 환상.

 

그 환상은 세운과 같이 세상의 번잡함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심리적인 치료효과도 가져온다. 마치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쇼핑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만인이 현금을 통해 귀족이 되는 세상, 귀족의 환상을 파는 것이 백화점이요, 호텔인 것이다.

 

보트를 타건, 호텔에 들어서건 그것은 모두 소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일종의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일인 것이다. 장미 병들다에서 남죽이 현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전부가 상품이나 서비스의 '소비'로 채워지고 있다. 이때 상품이나 서비스가 발산하는 이미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보다 욕망이 훨씬 빨리 자라게 만든다.

 

남죽을 타락으로 이끈 것은 이와 같은 이미지의 유혹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 여성이 삶의 태도를 바꾸고 창녀처럼 변모해간 모습은 실체(본질)가 허상(이미지)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사회상의 산물이다. 1930년대의 대중적 감수성은 '외관에 대한 집착''깨지기 쉬운 자아가 상품의 소비와 결합'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지금까지 이효석의 소설 세계는 이국성과 토속성으로 특징지워져 왔다. 그리고 그의 서구 취향은 식민지 제국 대학 영문과 출신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차원으로 파악되었다. , 이효석은 자신의 전공인 영미권 문학을 탐독한 결과, 서구 추종적인 미의식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행과 대중문화를 통해 그의 문학을 볼 때, 그의 취향이나 인식에는 1930년대 우리 사회의 어떤 대중적인 감수성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몇 가지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효석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학에 스며든 대중적인 감수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속성이라고 한마디로 처리해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 작품들은 표면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그리고 그것이 삶의 모델이 되는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상품과 광고, 그리고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매끈한 표면의 이미지들은 유행의 형태로 1930년대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내적인 측면을 침식시키고, 주체를 새롭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강심호.jpg

약력

소속: 살림출판사(기획편집국장).

살림출판사 기획편집국장.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대문학 전공.

공저로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논문으로는 김유정 소설의 위반의식 연구」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경성부민의 도시적 감수성 형성과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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