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희 평론가

조회 수 882 추천 수 1 2020.06.01 07:57:15

 

             시조비평의 정체성과 비평가의 자의식에 대한 소고

 

                                                                                                           조 춘 희

 

 

1. 징후, 시조비평의 토양

 

2000년대를 전후하여, 거대권력의 거간꾼으로 변모한 비평의 문제에 대해 냉철한 비판이 진행된 바 있다. 문단에서 이미 한차례 불었던 문학권력에의 폭로와 같은 광풍을, 진부하지만 재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그간 시조평단에서는 진지하게 거론된 바 없으며, 범박하나마 시조비평 전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 사료되기 때문이다. 본 논의는 주례사 비평의 폐단 등 문학의 권력화 및 사유화 내지는 독점화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한 강준만, 이명원, 하상일 등의 오래전 문제의식에 기대 진행하고자 한다. 시조비평 및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이 요구된다. 문학비평 일반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논의된 바 있는 비평의 자기 갱신과 번역을 탐색할 때 시조비평의 토양을 진단하고, 보다 비옥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문학비평 일반에서 출판·언론·자본·작가 등의 유착과 중심에의 지나친 집중 현상 등을 비판했다고 해서 오늘에 와서 권력의 해체와 다양화와 같은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했다고 진단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창작 및 비평 일반은 여전히 문학권력이 집중된, 새롭거나 새롭지 않은 일부 엘리트들에게 편중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품 및 작가에 대한 평가가 수행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문학권력의 독점화를 비판하던 비평주체들 역시 오늘에 와서는 새로운 섹트를 구성하는 엘리트 내지는 권력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때이다. 지역으로의 권력 분배는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횡단하는 새로운 위계를 창출했으며 지역을 다시 차등화·독점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몇 해 전 모 문예지에서 몇몇 시인의 시조집에 대한 해설비평을 청탁받았는데 탈고 후 모 시인의 작품집을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를 거절하자 원고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는 비평을 작가와 작품해설의 거간꾼 및 자율권, 그리고 독자성마저 무시당한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자본축적에 의한 문학권력의 사유화 및 독점화 등 그 병폐를 단적으로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흔히 비평을 창작의 하수인으로 여기는 데는, 출판자본 및 작가에 비해 신인비평가의 경우 다양한 척도에서 연령 및 문학권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데서도 기인한다. 비평에 기대 날선 비판이라도 하려고 하면 천둥벌거숭이, 애송이 취급이거나 오만하고 불손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인 것이다. '말 잘 듣는 비평'의 난무야말로 비평 부재를 야기한다. 물론 역으로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없이 비평을 수단화·정치화·무기화하려 드는 비평가의 그릇된 욕망 역시 타락의 징후라 할 것이다.

 

최근 시조비평은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시조의 현대화라는 강박과 명분으로 몸짓 부풀리기에 급급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제도권 및 중앙문단에서 문학연구 및 비평을 담당해온 소위 '거물'을 포섭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시조문단의 현대화 및 혁신 작업의 일환으로 시조비평 역시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했다. 일찍이 여타 장르의 문단이 보여주었던 '타락'의 징후를 오늘의 시조단에서 착목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적 성찰은 부재한 상황이다.

 

 

2. 증상, 시조비평이 정위한 좌표

 

분명한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시조단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오늘의 시조는 사명감 있는 개인적 주체와 몇몇 유의미한 단체가 결성되어 이들을 구심점으로 주도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성찰과 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더불어 시조문학에 대한 학문적 탐색뿐만 아니라 현장비평 역시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역할 또한 중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장비평으로서의 시조비평장에 대한 성찰과 자기비판 및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에 다소 기시감이 있더라도 몇 가지 요인에 따라 오늘의 시조비평이정위한 좌표를 진단하고 갱신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는 곧 오늘의 시조 문단 전반에 대한 검토로 전이·확장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첫째, 인정주의에 입각한 주례사 비평의 만연이다. 오래전 강준만이 지적했던 것처럼 주례사 비평의 폐단은 비평과 창작 제 영역을 병들게 한다. 연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시조비평은 오랫동안 비판적 사유가 결여된 채로 해설비평에 안주해 왔다. 상찬으로 일관된 주례사 비평의 남발은 시조형식에 대한 예리한 이해 없이 텍스트 해석에 자족하는 해설적 비평을 야기했으며, 더불어 시조형식에 대한 이견을 인정하거나 이에 대한 논쟁을 비난으로 종결짓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특별한 논쟁이나 담론을 생성하지 않고 텍스트 해석에 자존해서는 유의미한 비평적 영토를 구성하기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론만 앞세운 해설이 야기하는 독해에의 저항성은 작품에 대한 오독과 더불어 문학에의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다.

 

이는 시조비평 지면의 협소함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문학비평 일반을 다루는 비평장에서(신인비평가의 등단 및 등용에 있어서) 시조비평은 변방으로 치부·배제되고 있으며, 시조문예지를 중심으로 일부 공급되고 있으나 이마저도 확산성에는 한계가 있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등단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함으로써 문예지와 비평의 유착은 강화되며, 문단권력을 획득한 일부 작가에의 집중 및 출판자본과의 결탁에도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토양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 출판사, 그리고 문예지에 의해 주도되는 원고청탁은 주로 인정주의에 입각하게 된 탓에 애초부터 주례비평이 불가피한 일면이 있다.

 

둘째, 비평주체의 문제이다. 시조문예지에 수록된 비평과 시조집 해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조비평의 주도권은 문단권력과 권위에 기대 호명/ 초청된 주요 논객들에게 몰아주기를 하고 있다. 소위 자생적 시조비평가의 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평주체의 문제는 심각하다. 이는 주도권 싸움이나 독점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애초부터 시조비평의 다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시조의 자양에서 출발한 몇몇 비평가를 제외하고는 문학적 권위자를 초빙하는 방식으로 명예비평가를 위촉해 왔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여타 장르를 중심으로 활동한 그들의 저력이야 의심할 바 없지만, 시조장르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나 비평의 가능성은 되레 이전 시기에 기수행된 바 있는 시조의 형식 논쟁보다 활발하거나 의미 있는 공박을 제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다시 인정주의에 기댄 비평주체의 유치에 내재된 주례비평의 가능성을 목도하는 일이며 그 악순환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김현의 에피고넨들이 여전히 문학비평을 점유하고 있는데 반해, 시조문학은 비평의 에피고넨조차 부재한, 애초 에피고넨으로 삼을 만한 비평의 토양을 구축하지도 못했다.

 

한때 작가 /시인에 의한 텍스트 해석비평이 주도되었던 것처럼 시조시인의 비평능력 함양도 요구된다. 이는 비판적 글쓰기에 직접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평에 대한 이해와 자의식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불어 비평 논자들의 일갈에 따라 일희일비할 것도 아니다. 냉철한 비평은 창작을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비평을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비평주체와의 인간적 단절을 선언하는 작가가 있다면 자기발전과 갱신은 요원할 것이다. 만약 부당한 비평이라면 이에 공박하면 될 일이니 창작자 스스로도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서만큼은 비평가적 안목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

 

셋째, 모순적인 자본 구조의 구축 문제이다. 이는 온전히 시조비평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조단 일반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논자의 사견으로는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선 자본권력에 의해 문예지 창간 및 출판사 운영에 있어서 일종의 책임감이 요구된다. 자본의 확충이 이를 사유화하거나 독점화해도 되는 일종의 자격까지 부여했다고 생각한다면 지속가능한 지면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명감에 입각해 문예지를 창간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할지라도 창작물로서의 가치를 응당의 원고료로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인에게 고고한 선비적 자세를 요구 또는 강제한 것은 자신들이 좌정한 자본권력의 토대와도 위배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생력을 갖추는 데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조단 외에도 열악한 지역자본에 토대를 둔 많은 문예지들이 재정상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등단팔이' 즉 등단을 미끼로 문예지 구매를 강제하는 등의 방식을 오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조문예지의 경우에도 단순한 지역자본에 의해 구성된 경우가 아니더라도 원고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비평보다 창작 영역에서 더 심각하다. 시조단에서는 중앙문예지에 해당하는 지면에서조차 시조작품에 대한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당연시하고 있다. 언젠가 논의했던 것처럼 이는 시조문학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인에서 추동되었으며, 특히 시조문학을 향유하는 주체가 중산층 이상의 기득권이나 고학력 및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군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신인등용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신춘문예 등에서도 다른 공모부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공모지면이나 상금이 적을 뿐 아니라,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견인할 수 있는 문예지 등의 원고료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가 난다. 굳이 장르 간 문예지 간의 원고료 차이를 기술하지는 않겠으나 수치상의 차이만 확인하더라도 젊은 문재가 시조문학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으로서의 전문 문학인의 양성은 최소한의 생활을 약속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단언컨대 등단 상금조차 없거나 미미한 수준으로는 좋은 인재를 유치할 수 없다.

 

아울러 각종 문학상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신력 있는 상을 제정하고 작가의 창작행위를 독려하는 일은 유의미하다. 이는 부족한 원고료 및 지면의 확보 등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며, 더불어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제 막 사회 초년생으로서 문단의 말석에 좌정하게 된 시인의 입자에서 최저생계와 창작의 문제는 별개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각 문학상 부분마다 신인상을 제정하는 추세이기는 해도 상금에서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친소관계에 따른 수상자 지정 문제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어야 함에도 아직 문단 내에 정위하지 못한 등단 5~10년 이내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우대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구조다. 더하여 개인적 친분에 의해 시인이라는 자격을 남발하는 행위 역시 시조단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늙은 문학이라는 장르에의 혐의를 짙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다양한 연령 및 계층의 창작자와 비평가가 필요하다. 늦게 작가의 꿈을 성취하는 신인도 필요하며, 동시에 젊은 세대가 문학적 열정으로 도전해 볼 기회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오늘의 시조에 몰두할 수 있는 주체를 양성하기 위한 토양을 구성해야 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관행화된 폐단을 일시에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범박하나마 몇 가지 모색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비평 지면의 확장이다. 인정주의에 함몰된 주례사비평 일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비평가를 '주선'하는 출판 또는 문예지 등과 같은 문학권력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 더불어 특정 작가 및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소위 '좋은 작가/작품 만들기' 역시 중지해야 한다. 자유비평 지면의 확보는 비평의 자율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데 기여하리라 여겨진다. 물론 이때에도 비평가로서의 정체성과 책임감 등 윤리의식이 전제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둘째, 청탁구조의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 첫 번째 방책과 연동하여 생각하면, 원고를 청탁해온 작가나 문예지 등 텍스트 생산 주체와의 인연으로 비평적 일침을 가하기란 쉽지 않다. 내지는 의미 잇는 작품을 발굴하고도 지나친 상찬이나 아부로 비춰질까, 경계하게 되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존의 청탁 방식과 함께 비평가의 원고투고를 병행한다면 문예지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원고료 제도의 정착은 필수이다. 문학판의 자본화에도 불구하고 원고료에 이어서만큼은 작가에게 지나친 희생 내지 염결성을 요구한다. 자본의 독립은 건실한 문예지의 요건이기도 하며, 동시에 시조문단의 할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3.전망, 시조비평의 정체성

 

이상으로 갈무리하자면, 시조비평의 가능성은 시조단의 폐단을 적시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출판자본의 권력화의 특정 작가군과의 유착 등은 문학의 구너력화를 양산했으며, 이를 독점 및 사유화하는데서 소위 섹트화 및 에꼴화를 조장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시조문단의 이러한 자본화는 모순적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원고료 정착의 문제는 시조가 고학력 · 중산층 이상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는 취미적 장르라는 오명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다. 문단의 자본화에도 불구하고 원고료 책정 등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책임하거나 무신경한 실정이다. 더불어 친교에 의한 추천제에 입각한 무분별한 신인등용은 시인이라는 '이름팔이'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시인의 자생력을 약화 ·거세할 뿐 아니라 폐쇄성을 강화하고 인정주의를 견고하게 함으로써 종래에는 비판이 불가능한 토양을 지속하는 원인이 된다. 불공정한 등단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유의미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는 도움 될 것이 없다. 이는 자본권력 및 직위를 통해서 자신의 시인-됨이나 작품에 대한 상찬을 무작위로 생산해 내는 악순환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보다 냉철하게 고찰해야 할 지점이라 하겠다. 명예나 권력으로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사유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은 필자의 자기반성과 성찰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문학장르의 작가로 진입한 동년배 작가들과의 상황비교 및 시조단에 대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마는 후배들에게서 추동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문단 말석, 변방에 좌정했다 하더라도 폐쇄적 문단구조의 수혜자이자 동조자 내지 묵인자로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염결성을 자문해야 할 것이다. 지역에서 문학하기의 자의식은 많은 피해의식을 조장했으며 실제로 이은 기우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오늘의 시조가 일부 기득권자들의 고고한 취미로 안위해서는 그 미래적 가치를 생성할 수 없는 것처럼 비평의 토대 역시 그 주체의 양성에서부터 활동의 자율성 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과 문단의 친연성에 기대 검증절차를 무시한 채 입장권을 남발하는 방식으로 결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여타의 문학 장르를 연구하다가 시조비평을 병행하는 경우는 있으나 시조비평만으로 등단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시조비평에 전문적으로 임할 수 있는 평론 등단제도를 모색 · 악착함으로써 인재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

 

                                                      -반년간집화중련火中蓮2019년 하반기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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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4시조시학평론 등단, 평론집 봉인된 서정의 시간, 시집 간신히, 시간이 흘렀다, 살아 있다는 농담, 연구서 전후 서정문학의 연구. 부산대, 창원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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