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시인. 문예비평가

조회 수 2952 추천 수 3 2018.05.31 09:25:06

                                                     꽃의 반란, 창조적 상징의 힘



                                                                                                                                      -정재승 (시인.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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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 시인(金春洙, 1922 ~ 2004)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순히 ‘따라 읽기’를 벗어나 개성적 창조적으로 읽을 수 있다면 더 행복한 시 읽기가 될 것이다. 발화자인 시인이 쓴 시를 최종 수화자인 독자가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시인은 자신의 화법(話法)으로, 암호화하여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화법은 일종의 도구화된 수단이다. 그런 무기(?)를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 한다. 그러니 애초부터 시는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 것이다. 시인의 창작은 일단 발표되면 독자의 것이 된다. ‘이렇게 읽어야한다’ ‘저렇게 읽어야 한다‘는 식의 간섭이나 사족(蛇足)은 사양한다. 침묵하고 독자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다.
  물론 독자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해석은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해석하는 것으로 다양한 재창조가 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 일반화의 과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학문연구나 수험지문으로 쓰일 때는 보편적 가치에 준거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일번적인 수준에서 해석의 다양성은 오히려 긍정적인 재창조의 힘으로 작용한다.
  수사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비유와 상징을 든다  비유는 두 사물(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대비시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직유는 “강남콩 꽃보다 더 푸른 강물 위에‘처럼 동질성을 비교하고 은유(隱喩, metaphor)는 두 사물간의 매개 없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직접 대비시킨다.  ’이것‘의 정체는 (소리 없는)아우성’이기에 ‘깃발’로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비유는 비교적 쉽게 그 속뜻을 읽을 수 있다
  직유에 비해 은유는 원관념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대신 한층 세련된 시의 품격을 느끼게 해준다.  상징(象徵, Symbol)의 경우는 거리도 멀지만, 다의성(多義性)이 때로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상징은 은유와 유사하지만 원관념이 생략된 형태다. 때문에 보조관념만으로 원관념을 유추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때에 따라 난해성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상징은 풍부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다양한 해석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대체로 ‘성공한 시‘의 대부분은 은유와 상징을 적절히 구사한 경우다. 사유의 폭을 확대시키고 창작을 언어예술로 승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상징이란 말은 ‘짜 맞춘다’는 뜻의 희랍어인 symballein에서 유래했다. 그 명사형으로 symbolon은 부호 기호 증표의 뜻으로, 어떤 사물(관념)을 대신하는 것이다.
  특히 현상이 아닌 추상이나 정신세계를 감각물질로 변환하여 가시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유용한 도구다. 상징은 기초적인 것으로 백합-순결, 비둘기-평화와 같은 관습적 상징이 있다. 이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물-생성 죽음, 불-정열 파괴처럼 오랜 동안 집단 무의식에 바탕을 둔 원형적 심상도 있다. 이 경우 대조적 속성을 함께 표상하는 경우도 있어 우주의 순환, 근원의 일체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창조적 상징이다. 작품을 통해 개인이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성질의 것이다. 상징은 대체로 대중의 공감에 부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런 공식적인 것을 거부하는 순수 창조의 상징도 있다. 기존의 가치에 도전하는 ‘용기 있는’ 반란인 것이다. 
  상징은 보통 시의 특정어휘 수준에서 제시되어 키워드를 형성한다 하지만 상징은 단일 어휘수준에서 뿐 아니라 행의 문맥 수준에서, 의미단락인 연 수준에서도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시 전체를 총괄하는 상징도 있다. 대체로 제목과 일치하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상징과 시인의 일대기를 포괄하는 통시적 상징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가 만들어낸 상징이 얼마나 참신한가? 얼마나 의미를 풍성하고 다양하게 확장시켜 줄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다.


   기존의 틀, 다르게 해석하기


  기존의 틀(해석의 준거)은 견고하다. 마치 ‘공식’처럼 대입되고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순진한 바탕(?)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뇌(학습)된 정보는 관습처럼 굳어진다.
  공식이 되는 것이다. 특히 학교교육에서 입시를 위한 공부라는 것이 공식을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문학이란 간판을 걸고 진행되는 시 수업은 마치 과학처럼 정교하고 외과의술처럼 매스로 해부한다.


  그 단적인 예로 김춘수의 <꽃>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수술(해석)해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해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몇 개의 핵심어를 공식에 대입하여 의미망을 연결시키면 끝난다. 우선 구조를 보면 나->그->우리로, 몸짓->꽃->눈짓으로 점층식 전개로 의미가 확장된다. 키워드 ‘꽃’의 원관념을 유추하는 것이 핵심이다. 명명이전에는 단순한 '몸짓‘이다가 명명(의미 부여)을 통해 비로소 ’꽃‘이 되니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인식론적 접근이다. 이런 방식에 따라 ‘존재론적 탐구의 시’로 귀결된다.
  이런 꿰맞추기식 철학적 현학적 논리는 그를 정당화하기 위해 릴케나 하이데거가 동원되고 공허한 관념의 유희가 난무한다. 그 결과 김춘수라는 시인을 창백하고 깡마른 ‘지적참구의 철학자‘로 가두어버린다. 현학적 현시욕구(顯示慾求)에 불타는 일부 학자 비평가의 방향제시가 ’공식‘으로 굳히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애당초 시는 철학적 탐구의 방법이 아니다. 인간의 섬세한 감정과 정서를 다루는 시의 역할로는 버거운 것이다.
  시인 김춘수를 그 관념의 형틀에서 구하는 방법은 ‘평범의 시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를 가둔 것은 바로 ‘비범의 시론’이기 때문이다. 형틀에 갇힌 김춘수를 ‘피가 돌고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시인 김춘수로, 조금은 개성적인 그의 향기를 독자는 더욱 사랑하며 기억하게 되리라.
  ‘꽃‘의 상징의미를 관념에서 실체(본질)로 변환시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창조적 상징의 힘이다. 이름하여 ’꽃의 반란‘이자 ’의미의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 관념에서 실체로


  사실 ‘꽃’은 보기 드문 대중적 사랑을 받아온 ‘연시(戀詩)’로 더 많이 기억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독자 대중이 철학을 응호하기 때문일까? 존재와 무의미 같은 관념적 인식론을 지지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냥 좋은 것이다.  나-그-우리로 인연 지어지는 관계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원숙하고 순수한 관계를 소망하는 마음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꽃’의 상징의미를 그냥 ‘순수’ ‘순결’ ‘온전한 사랑’으로 바꾸어보자. 실체적 접근이다.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본질)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몸짓‘은 온전하지 못하거나 미숙한 관계일 것이다. 에로스(eros) 지향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불완전하고 미숙한 ‘몸짓’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꽃’ 즉 온전한 순수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순수 순결 혹은 로고스(logos)에 근접하는 경지다.
  그 준거로 ‘빛깔과 향기’가 제사된다. 그것은 인격 성숙의 정도 즉, 이성과 격조라는 전제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 일종의 통과제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세계가 곧 순수 완성 즉 로고스인 것이다. 이런 염원(순수지향)은 그의 다른 작품 <꽃을 위한 서시>나 <나의 하나님> 등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꽃을 위한 서시> 후반부



  이 작품은 ‘꽃’보다 늦은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따라서 ‘꽃’에서 이미 제시한 그의 고민(순수에의 동경)을 좀 더 다른 모습, 깊이로 제시한다. 전체적으로 무명(어둠)->울음(갈망)->금(불변의 가치, 순수)로 구성되어있다. ‘얼굴을 가린 신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 순결, 로고스의 경지인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나의 하나님> 전문

   
  단순한 구조의 시다. A=B형식의 은유의 중첩으로 되어있다. 원관념인 ‘하나님’을 여러 상관물에 빗대어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의 충격을 던져주기도 한다.


  ‘하나님’을 감히(?) ‘늙은 비애’(애처로움) ‘푸줏간 고기 살점’(희생물)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묵중함 근엄함)으로 비유하여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의 체념 영원성을 전제로, 결미에 이르자 태도를 바꾸어 긍정의 이미지 ’어린애 같은 순결‘(순수 천진난만함) ’연두빛 바람‘(참신 생명 희망)으로 결말을 맺는다. 전반부의 부정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어 희망적인 것, 순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처음의 ‘꽃‘에서 제기한 염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김춘수 시의 일관된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 관심의 중심은 ’관계성‘이다. 나와 너의 관계, 나와 대상의 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 이 모두 인과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어둠에 묻혀 이기적 탐욕적 자기중심적 속성(俗性)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로는 공존 공생의 관계이어야 하고 그 최종 지향점은 순수 원만함 온전함으로 귀결된다.
  김춘수 시를 칼 융의 분석심리학적으로 보면, 아니마(anima, 남성 속 여성성)적 성격이 강하다. 시 ‘꽃’에서 순수 순결 지향, ‘꽃을 위한 서시’에서 울음 금(순수) ‘나의 하나님’에서 어리디어린 순결, 연두빛 바람 등은 여리고 순진무구한 여성성의 상관물이다. 시는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대결을 벌이는 양심과 유혹의 갈등이 승화되어 표출된 결과물이다. 그렇게 보면 그의 관심은 존재나 관념 자체보다 관계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를 ‘존재의 시인’ 혹은 ‘무의미의 시인’으로 부르는 것은 족쇄가 될지 모른다. 오히려 로고스적 ‘순수지향의 시인’으로 불러야 진정한 ‘꽃의 시인’으로 합당한 대접이 되지 않을까 한다.

  시는 시인의 것이지만 펼쳐지면 독자의 것이 된다. ‘공식적인‘ 시 읽기에서 나만의 ‘개성적‘ 시 읽기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행을 갈 때도 늘상 가는 뻔한 코스보다 좀 색다른 여정을 선호하듯이, 가이드에게 이끌려 가는 패키지 보다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나는 여유와 모험도 얼마나 신선한 것인가?

 

   자기만의 눈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시를 읽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좀 더 특별하고 행복한 시 읽기가 될 것이다. 독자는 시를 완성시키는 재창조의 참여자란 점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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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본명:정재승. 필명:(氣淸·)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1977) 등단
경남대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
제1회 이육사 문학상 수상
온라인 소통 <시사 문예통신> 운영
시집: <길 위의 잠>.<안개마을 입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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