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문학평론가

조회 수 2156 추천 수 1 2018.06.30 04: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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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져가는 농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장석주

                                                                                                                                                             문학평론가

 

 

 

농무

 

멸실의 운명 앞에 놓인 농경 사회의 풍물과 그 음영을 인류학자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사실적 언어로 그려낸 신경림(申庚林, 1936~ )농무(農舞)1973년에 자비 출판으로 나왔다가 이듬해인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다시 출간된다. 농무창비시선의 제1권이다. 그것은 창비시선이 추구하는 이념으로 볼 때 썩 잘 어울린다.

 

농무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친, 농경 사회가 해체되고 산업 사회가 형성되는 시대 변화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시집이다. “비룟값도 안 나오는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지이고, 그럼에도 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을 짓누른 것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원통함이다.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 대, “기름집 담벽에 기대서서 철없이 킬킬대고있는 처녀들의 눈길을 의식해 신명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쩐지 그 신명은 공허하다. 그들의 신명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라는 자포자기 또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함께 몰려다니며 소줏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한 서린 가슴을 달래는 농투성이들. 그 피폐한 삶의 풍경을 사실주의적 문체로 보여준 신경림의 농무는 비밀스럽고 암호적인 은유와 상징의 고급 언어 예술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러나 농무에 실린 시편들은 친근한 민중 언어로 농경 사회적 풍물과 정서를 알뜰하게 담아낸다. 신경림은 이 한 권의 빼어난 시집으로 민족문학의 큰 어른으로 떠오른다.

 

신경림은 1936년 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에서 42녀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응식(應植)이고, 경림은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하던 시절부터 쓰던 필명이다. 19893, 신경림을 비롯한 남북작가회담 대표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일이다. 한 명씩 조사를 받던 중 형사가 신응식!” 하고 부르자 그것이 신경림의 본명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신경림이 불쑥 일어나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여!” 하고 나선다. 긴장이 감돌던 좌중에서는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경림은 시골에서 살았지만 농촌의 그만그만한 집안은 아니었다. 한학을 한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개화주의자로 일찍이 한글 전용과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후손 중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인의 아버지는 면 서기와 농협 서기로 일했는데 술과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비밀자금을 지원하던 명문가 출신으로 한학에 밝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당숙이 하나 있었는데 일자무식이었으나 악단의 단장을 맡고 연극과 소리, 피리 불기 등 예능에 재주가 많은 이였다. 신경림은 어릴 적에 이 당숙과 즐겨 어울린다.

 

1943년 신경림은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그는 당숙과 어른들의 얘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 가게 된다. 그는 이때 본 목계의 풍경을 공책 한 귀퉁이에 글로 남기는데, 이것이 선생의 눈에 띄면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 뒤 도에서 시행한 글짓기 대회에서 자신은 물론 전교생과 교사들까지 모두 그의 장원을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있다가 기대와는 달리 보기 좋게 낙방한 기억은 그에게 오래 상처로 남는다.

 

1948년 충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해 정춘용 선생을 만난 것은 그의 문학 인생에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한다. 담임이자 문예반 지도교사이던 정춘용은 일찍이 신경림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정춘용 선생의 권유로 그는 나중에 졸업만 하면 취업이 보장되는 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충주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그가 사범학교를 그만둔 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전교에서 풍금을 칠 줄 모르는 단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범학교 학생이 풍금을 칠 줄 모른다는 것은 결격 사유에 들었다.

 

중학교 시절 신경림은 집안에 굴러다니던 이광수, 김동인, 현덕, 이기영, 김내성 등의 문학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댄다. 한국전쟁은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터진다. 피난살이를 하던 그의 가족은 9·28수복 뒤 곧바로 집을 찾았다가 낭패에 빠지기도 한다. 1·4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간 그는 미군 하우스 보이로 몇 달을 지낸 끝에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전란 중에 시인의 집안은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에서 해를 입고 풍비박산의 비운을 겪는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은 폐쇄되고,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당숙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9·28수복 후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피해 또 한 번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광산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다.

인민군 패잔병이 거의 도망쳤을 것으로 판단되는 어느 날, 한 대의 지프차가 광산에 들이닥쳤다. 태극기를 꽂은 헌병차였다. …… 몇 갱구를 뒤진 헌병 소위는 굴 속에 숨어 있던 광부 셋을 끌고 나왔다. 금을 찾아내지 못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빨갱이들이 금을 가지고 도망치려 했다.”고 여럿 앞에서 이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 헌병 소위는 더욱 약이 오른 듯했다. 마침내 참다못해 권총을 꺼내 셋 중의 하나를 쏘았다. 또 하나를 쏘았다.

신경림, 내 시의 뒷이야기,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전예원, 1983)

 

사람을 죽이는 충격적 장면을 목격한 뒤 시인은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뒷날 만일 글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광산에 관한 글을 쓰리라 다짐한다. 이 결심은 실제로 폐광이라는 시를 낳게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시인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절씩 남한강가를 배회하는가 하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 문제 학생이라는 딱지가 붙을 지경이 된다. 그러나 당시 국어교사이던 유촌 선생은 처벌 대신 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리는데, 이 과제물을 매개로 신경림은 뒷날 평론가가 되는 유종호와 처음 만나게 된다. 바로 유촌 선생의 아들이며 고등학교 선배인 유종호가 신경림이 낸 시를 읽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중까지 이어져 문단에서 유종호는 시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신경림은 학과 공부보다 책읽기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데 3학년 때 도스토옙스키 전집 열 권을 독파하고, 투르게네프의 소설과 백석, 임화, 이용악, 오장환, 정지용, 윤동주, 그리고 청록파의 시집을 밤새워 읽곤 한다. 이 가운데 그의 마음을 특히 사로잡은 것은 백석과 정지용의 시로, 특히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을 읽고는 책을 떨어뜨릴 정도로 감동하며 나중에 내가 시를 쓰면 백석 같은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임화, 이용악, 백석의 시에서 그는 쉽고 간결한 시적 구문, 서사적 맥락, 묘사의 사실성을 배우고 익혀 뒷날 자기 시의 능기로 삼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매우 커서 며칠 동안 그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나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고, 얼마 동안은 매일처럼 그 시집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다방에서고 강의실에서고 꺼내 읽었다. 한동안 나는 사슴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대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경림, 내 인생의 책, <동아일보>(1999. 4. 30.)

 

그가 고교 시절 교지에 발표한 이형기론은 문예반 학생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문예반 소속이 아니어서 더욱 화제가 된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유종호와 함께 하숙한 그는 독서회에 나가면서 공산당 선언등의 좌익 책자를 구해 읽는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어렵게 서울 생활을 유지한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즈음 그는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는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은 충격과,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겹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영월·문경·춘천 등지를 떠돌며 광부·농부·장사꾼·인부·강사 등으로 지낸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가 붙잡혀 가서 29일 만에 풀려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점점 멀어지면서 사회·과학 서적은 더러 봐도 문학 서적은 읽지 않으며, 소중히 간직해온 시집과 문학잡지마저 몽땅 버리기도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무력감 내지 절망감, 그리고 동료 시인들에 대한 불타는 듯한 질투심이 그를 이런 식으로 흐르게 한다.

 

이때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증오심뿐이었다. 이 증오심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을 미워했다. 잘사는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학식 있는 사람을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지한 사람을 미워했다. 더욱 미워한 것은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전부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다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로서 이들에 대하여 갖는 질투심에 연유함은 물론이었다.

신경림, 내 인생의 책, <동아일보>(1999. 4. 30.)

 

짧지 않은 이 방황기에 신경림은 평소 존경하던 정치가 조봉암의 사형 소식을 접하고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치밀어 오르는 울분과 쓸쓸함을 속으로 삭인다. 죽산 조봉암은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뒤에는 공산당과 결별하고 제헌국회의원에 이어 농림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혁신정당인 진보당을 꾸려 1956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안을 내놓기도 한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과녁이 되어 이윽고 진보당 사건에 휘말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인 조봉암은 1959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같은 해 7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시인은 뒤늦게 정미소 뒷방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사형집행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시인은 더욱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다. 시인은 시 쓰기며 사회활동을 작파해버리고 산골을 돌며 약초를 구하는 이들의 길 안내를 맡아 충청북도 북부와 강원도 남서부 일대를 떠돈다. 이때 가난하고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체념으로 일그러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혼자 삶의 속내를 짚어보곤 하는데, 시인은 뒷날 이런 기억을 눈길, 그날등의 시편에 담아낸다.

 

1965년 신경림은 충주의 한 사설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며 영어로 된 공산당 선언의 문장을 가르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데, 어느 날 시내에서 거지 몰골로 쏘다니던 김관식과 만난다. 술을 걸친 김관식은 막무가내로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그의 꺼져가는 시심에 불씨를 지피고, 시골 생활에 적당히 지쳐 있던 그를 서울로 불러올린다. 김관식의 강권으로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시인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마침내 농무의 시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 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해해 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농무,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

 

1970년 신경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진다. 이때만 해도 문단 일각에서는 그의 시를 이상한시로 치부하며 애써 무시하려는 기류가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19733백 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농무가 서점에 깔리자마자 싹 팔려나가면서 신경림이라는 존재는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게 된다. 농무1960년대 이래의 공업화 우선 정책에 밀려 결딴나버린 살림에서 비롯된 농민들의 암울한 심정과 절망,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노여움으로 빚어진 시집이다. 그의 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 “민중시의 개막이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찬사와 함께 당시 창작과비평이 걷고 있던 민족 문학론의 창작 성과로 거론된다. 이에 따라 신경림은 단숨에 현실 비판적인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오른다.

 

45편의 시를 품은 농무는 철저히 민중적 소재, 민중적 가락, 민중적 정서, 민중적 언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농무의 시적 공간은 광산과 산촌, 들판, 논 같은 일터와 먼지로 뒤덮인 길이며,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주변부로 밀려난 광부, 농민, 노동자, 빈민, 건달, 아편쟁이들이다. 농무의 시편들은 시인이 시골 곳곳을 떠돌면서 만난 민초들의 삶을 밑거름 삼아 일궈낸 것이다. 전쟁의 상처, 답답한 현실, 그리고 궁상맞고 스산한 삶…….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슬픔과 한, 노여움, 서글픔, 절망, 낙담, 실의, 죽음의 이야기를 시인은 알기 쉬운 민중 언어로 풀어낸다. 시인은 이런 것을 자신의 목소리 대신에 그들을 화자로 내세워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독자들은 화자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되고 생생함을 맛본다.

산업화에서 소외되고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비애를 감상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삶의 구체성과 현장의 숨결을 그대로 담아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데 농무의 드높은 문학적 성취가 있다.

 

농무에 실린 대표적인 시로는 겨울밤, 시골 큰집, 파장, 농무, 눈길, 그날, 폐광, 갈대등이 있다. 백낙청은 스스럼없이 농무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평을 덧붙인다. 신경림은 농무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 1만해 문학상을 거머쥔다. 나중에는 농무의 영역판 Farmer’s Dance가 출간되어 미국 코넬대학교의 한국학 강의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농무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1970년대에 신경림은 거듭된 불운과 궁핍으로 몹시 가파르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어려운 시절을 군말 없이 함께 견딘 아내가 첫 시집이 나오는 것을 못 보고 눈을 감으며, 1년 뒤에는 할머니가, 또 한 해가 못 되어 병중에 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버린다. 김관식의 집에서 나와 안양으로 내려간 그는 동료 시인 조태일과 어울려 기원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잠시 교육평론의 편집부원으로 몸을 담기도 하나 이마저 기관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그만두고 만다. 다행히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길음동에 집을 한 채 사서 가까스로 서울에 삶의 근거를 마련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그의 곁을 떠날 줄 모른다.

 

신경림과 민요의 긴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 무렵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그들의 삶과 언어로 그들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시인의 태도는 더욱 굳건해져 민중이 스스로 쓰고 읽는 시를 지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민요다. 시인은 자신이 쓸 시의 전범을 민요에서 찾고, 민요의 전통을 차용해 민중성을 넓혀나간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목계장터전문,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

 

1979년 봄, 신경림은 민요와 농무의 민중적 서정이 어우러진 두 번째 시집 새재를 내놓는데, 여기에 실린 목계장터는 특히 절창이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목계장터는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의 가락을 바탕에 깔면서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해 지루함을 조절하는, 이 시대 민중문학이 거둔 또 하나의 뜻 깊은 성과다. 단형 소품 서정시 32편에 장시 새재가 실려 33편으로 구성된 새재에서는 시인의 신념과 민중적 가락이 이전보다 더욱 구체성을 띤 채 펼쳐진다.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펴낸 지 이태 만에 제8한국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민중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 백석 등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받은 영향, 민요에서 체득한 율격으로 신경림의 시는 이야기 요소의 도입, 서사 지향성 등이 두드러진 단편 서사시, 이야기시, 장시의 세계로 나간다. 시를 보는 눈이 밝은 평론가 유종호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의 풍물과 정서에 충실했던 시인백석과 신경림의 시를 비교하며 신경림 시의 내포 화자와 백석 시의 내포 화자 사이에는 어떤 근친성이 보인다.”고 짚어낸다.1)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 골마루에서 벌도 같이 서고 / 깊드리에서 메뚜기도 함께 잡았다 /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 할퀴고 꼬집고 깨물면서 //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 큰 아이들의 꼬드김 때문에 // 우리는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 서로 붙안고 뒹굴었구나 // …… //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 따지기때 풀개떡도 나눠먹고 / 장마 지나 도랑뒤짐도 함께 했다 / 그러다가 우리는 싸웠구나 // 크고 힘센 아이들의 시새움 때문에 / 크고 힘센 나라들의 장난질에 넘어가

신경림, 북으로 간 친구,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북으로 간 친구60행에 이르는 긴 시인데, 친구와 의 이야기 형식에 남북 분단의 정황을 빗대어 우의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장편 서사시 형식은 새재(1978), 남한강(1981), 쇠무지벌(1985)로 이어지며 시인의 사람살이와 역사 현실에 대한 한결 깊어지고 그윽해진 의식을 담아낸다.

 

19807,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조태일, 구중서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두 달 만에 공소 기각으로 풀려난다. 침묵을 강요당한 그 시절에 시인은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강연을 한다. 그뿐 아니라 1984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지도위원,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의 중요한 직책을 기꺼이 맡는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민요를 찾아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기록을 갈무리해 펴낸 민요 기행 1(1985)은 큰 호응을 받는다. 민요연구회의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낳아 나라 안의 여러 대학에 민요 연구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지역 문화 단체에도 민요 모임이 잇달아 생긴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는다. 이어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낸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한다.

 

1989민요 기행 2를 펴낸 그는 1990년에 들어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노래한 기행 시집 을 내놓는다. 에서 시인은 그동안 저도 모르게 얽매인 나머지 민요의 형식을 도식적으로 시에 적용하려고 들던 강박증에서 풀려나 비로소 민요의 알맹이가 고스란히 녹아든 새로운 언어와 문법에 바탕을 둔 민요시들을 선보인다. 2) 그는 이 시집으로 제2이산문학상을 차지한다.

 

신경림은 1993년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내놓고, 1998년 중국·베트남·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펴내면서 제6공초 문학상을 받는다. 이마적에 나온 두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개개의 욕망이 어우러지고 부딪치고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사람살이에 대한 그윽한 관찰에서 나오는 성찰의 언어들이며, 강조되는 메시지는 공생의 윤리”3). 1995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선집이 <갈리마르>에서 나와, 신경림 시의 문학성은 이제 국제적으로 공증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요즈음 관심의 중심에 놓은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살이이며, 그의 눈길은 여기서 비켜나지 않는다. 신경림이 시만 쓰는 게 아니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고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는가 하면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된 것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런 관심 때문이다.

 

각주

1) 유종호, 서경 혹은 풍물 서정, 작가세계(1998 가을)

2) 이희중, , 사람과 세상을 사랑한 기록 문학적 연대기, 작가세계(1998 가을)

3) 구모룡, 고통과 초월신경림의 후기시, 작가세계(199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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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장석주 시인은 1955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1975<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는 시가 당선되었고, 동아일보에는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다. 올해 초 14번째 시집인 몽해항로를 출간했는데, 이 시집으로 제1회 질마재 문학상을 수항했다. 나는 문학이다등의 평론집과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등의 산문집, 취서만필등의 서평집을 비롯해 60권에 가까운 저서를 선보였다. 국악방송의 <행복한 문학>을 진중한 언어로 진행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여름 정착한 경기도 안성의 호숫가에 지은 수졸재’(守拙齋)와 평택의 작업실을 오가면 독서와 글쓰기, 산책과 명상을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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