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

조회 수 2163 추천 수 1 2018.11.01 00: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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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문학평론가)을 잉태한 '쪽빛 바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김모()라는 사람은 남의 글 읽고 가르치고 쓴다고 생을 탕진한 사람입니다. 지 글은 하나도 못쓰고, 왜 그런가 하니, 자기는 쓸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남의 글 아주 애써서 읽고 해설하느라 탕진한 사람이지.”

서울 동부이촌동 김윤식(72) 서울대 명예교수의 자택을 찾았을 때 그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양말도 벗은 채 기자를 맞았다. 양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자신을 아무개로 얼버무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비평가는 남이 쓴 글 읽는 사람이요. 전부 죽은 사람의 글들이니 시체를 읽는 거지. 책이란 게 관() 아니요? 이걸 살아있는 사람인 내가 몸을 빌려줘야 읽을 수가 있잖소. 그러니까 묘지기가 아니고 뭐야.”

한국문학 비평사에 그의 족적은 너무나 크고 화려해 설명이 필요 없다. 문학을 전공한 이들 가운데 김 교수의 책을 읽지 않은 이가 있을까. ‘미증유의 필력이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지금까지 그의 이름으로 간행된 저서를 자신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150권 정도 되지 않을까요. 서울대 교수 정년(2001)을 마치고 나서도 20권 넘게 썼으니까. 개중 10권 정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겸사의 표현이지만 1973년 박사논문을 묶은 첫 책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이후 어림잡아 35년 동안 1년에 4권이 넘게 책을 냈다. 오직 앞뒤 돌아보지 않고 평생 공부하고 책읽고 글쓴 결과다. 시인 고은은 김 교수의 의식을 빗대 온통 박물관 지하실 명제들이 줄 서 있다고 했다.

고은 선생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에 독종이 둘 있다. 하나는 고() 박경리 선생이고 하나는 김 아무개다.’ 시인의 직관으로 그런 말을 했어. 어떤 면에선 제대로 봤구나 생각이 드는데.”

 

교장 선생님이 되어라.

 

경남 마산이라는 조그마한 항도에서 학교를 다녔지. 총리를 지낸 노재봉씨는 마산중학에 다니고 난 마산상업학교를 나왔어. 서울대 상과대학에 한 해 16명이나 입학할 정도로 명문학교였어요. 저도 상대에 가면 되는데, 웬걸 아버지가 말리셨어요. 교장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어.”

김 교수는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한다. 고교시절, 시를 써서 중앙지에 실리기도 했고 대학생이 돼서는 소설가를 꿈꿨다. “아직도 습작 원고가 남아있다고 했다. 한번은 당대 지식인들이 주로 읽던 월간지 사상계에 소설을 투고, 최종 본선까지 오르기도 했다.

글을 쓰고 싶은 데 대학에서는 학문을 가르쳐요. 향찰식 표기법이니 순경음이 어떻고 반치음이 어떻게 변하고 아래아가 어떻고재미가 없어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잖소. 2학년 때 군에 가버렸어. 자원해서.”

 

- 사범대를 나오셨는데 국어교사가 되지 않으셨네요.

 

취직이 돼야지. 그 시절은 국립대 사범대생에게 의무발령을 내줬지만 거의 취직이 안 됐어요. 서울대 사대조차 취직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시절, 그는 청개천변 그중에서도 대학천에 즐비해 있던 원서 난전판을 기웃거렸다. 이 책들엔 한결같이 두 가지 큰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하나는 United States of America였고 다른 하나는 UNKRA(유엔 한국 원조처)였다. 김 교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였다. 고교시절 마산의 시장 뒷골목에서 수집한 것이어서 그만큼 익숙했다. 잡지는 전시판으로 일본 도쿄에서 찍은 것이었다. 간혹 화려한 광고가 실린 두께가 두꺼운 본토판도 수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고3 때 영어 단어 3,000개가 실린 오도지로(小野次郞)편 사전을 통째로 외워버려 친구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리더스 타이제스트에 가장 매료된 부분은 ‘Drama in Real Life'라는 코너였어요. 기적에 가까운 감동적인 실화를 소개하는 기사인 만큼 저를 고무케 한 것이 많았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 상자 가득 모은 이 잡지를 큰 누님 댁에 맡겨 놓았어요. 이것만은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지금도 그 몇몇 실화가 여지없이 회고될 정도이니까. 그것이 진짜 문학적이었던 까닭이라면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군복을 벗고 복학해 대학원에 적을 두게 됐을 땐 벌써 소설이나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깡그리 떨쳐버린 뒤였다. “복학해서 돌아오니 친구도 없고그래서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할 수밖에라고 했다. 그는 창작 대신 학문에 빠져든다. 당시 인문학도들에겐 민족적 사명감이 있었으니 식민사관 극복이었다.

 

“‘너희 민족이 못나 잘난 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게 식민사관 아닙니까. 이런 일본학자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옳다면 할 수 없지만, 제국주의가 만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면야 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밝히는 게 당시 남북한 인문학도의 사명이었지요.”

 

당시 북한에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가 속도를 내고 있었지만 남한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규장각에서 18세기 대구지역 토지대장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토지대장을 분석해보니 남한에서도 땅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경영을 했다는 증거가 나온 거지. 김용섭 교수가 조선후기농업경제사연구를 통해 밝혀낸 것이었소. 우린 밤새워 토론하고 공부하며 식민사관은 가짜라고 외쳤지. 자생적 근대화론의 가능성을 열어 놨던 것이지요.”

 

그는 식민사관 극복이란 관점에서 1973년 김현 선생과 함께 한국문학사를 펴냈다. 두 사람은 한국 근대의 시발점을 영정조 시기인 18세기까지 끌어내려 한국문학사를 정리했다. 또 모든 장()과 문장을 석공처럼 고치고 다듬었다.

 

지금 보면 (그 책이) 아주 우습지만 그때로선 굉장한 겁니다. 그게 우리 세대의 사명감이자 자존심의 근거였지요. 당시 교과서에는 우리 민족이 단군 후손이자 단일민족이고 거북선도 있다고 자긍심을 내세웠지요. 모두들 우리 민족이 얼마나 대단한 민족이냐에 열광했지요.”

 

김 교수는 인문학의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문학과 상관없는 세계정치사를 조망했고 경제학을 통해 근대라는 자본주의를 익혔다. 자본주의 체제였던 일제와 맞서기 위해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나서야 했던 역사적 고통도 배웠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쩨쩨하게 식민사관이나 조선민족, 국가를 위한 비평 공부보다 인류가 나가는 길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을 루카치가 가르쳐줬어요. 헤겔, 마르크스, 골드만 이 패들이 바로 인류를 위해 공부한 사람들이지.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에서 나오듯 우리가 공부하고 소설 읽고 비평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꿈을 위해 봉사하는 거지. 황당무계한 꿈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지만, 그 꿈만은 버릴 수가 없어요. 꿈이 반드시 이뤄지진 않겠지만 꿈이 없으면 인류가 살 수 없잖아요. 시나 소설, 철학을 통해서도 인류를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인류를 위해 공부하자

 

1970년 하버드대 옌칭 장학금으로 도쿄대에 유학간 30대 서울대 교수는 이 대학 정문 서점에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읽고 충격에 빠진다. 한국에서 금서인 그 책을 그날 밤새워 읽었다. “인류사의 진행과정 단계 중 하나인 근대에 대응되는 문학장르가 바로 소설(서사시)이라는 것, 인류사만큼 매력적인 게 달리 있겠는가. 그런 공부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고 환호했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서문을 복되도다로 시작했어. 시를 써버린 것이지.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할 길을 창공의 별이 지도가 되고 그 별이 우리가 가야할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했던 겁니다. 쩨쩨하게 식민사관 같은 이데올로기를 연구하지 말고 인류사를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깨달았소. 소설을 가지고도 인류사회가 나가야할 길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루카치가 가르쳐 줬어요.”

 

- 이후 본격적인 루카치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일본 번역판이 2개나 있어요. 모르는 내용은 철학사전을 찾고 원문과 비교하며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루카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헤겔을 공부해야 하니 공부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요. 독학이었고 아무도 안 가르쳐주니까. (귀국해서는) 서울대 신림동 근처에 방을 잡아놓고 공부했지요. 지나간 시대이지만 이상한 시대였지요.”

 

- 젊은 시절, 스스로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제가 공부한 비평사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연구거든. 그것을 보고 정보부에서 월북한 사람이 있나며 조사하고 그럽디다. 아버지는 순수한 농민이고 주변에 지식인도 없었어요. 전 단지 학문으로, 당시 아무도 안 하는 비평사 연구를 했던 것밖에 없어요.”

 

루카치를 공부하며 소설이 인류사와 더불어 진화한 근대의 장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근현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류사와 역사에 동참하는 길을 택했다. 아울러 한국문학의 근대적 성격을 해명하면서 당대 현대문학 읽기로 나아갔다. 매달 월평(月評)이란 형식을 빌려 젊은 소설을 분석했다. 신진작가를 만나 밤새 술을 먹으며 어울렸다. 작가들의 세계관을 알기 위해서였다.

 

“1970~80년대 소설을 읽으며 작가들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이렇게 고민하는구나. 참 위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고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사실 일제 때부터 우리 소설의 주류는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였어요.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분단이나 노사문제 모두 벌레가 아니다는 명제와 관련이 깊어요. 이게 정말 대단한 겁니다. 전 직접 소설을 못 쓰니까 비평에 매달렸던 거지요. 70~80년대 젊은이치고 창작과 비평에 나온 소설 안 읽고 시대 고민 안 한 사람이 어딨겠어요.”

 

요즘도 매월 문예지에 월평을 쓰시고 문학잡지 값만 월평균 15만 원을 쓴다. 시나 소설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오거서(五車書)’를 했으니 문리가 트였을 법도 하다.

 

다섯 수레는 읽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문리가 안 트였어요. 사회가 점점 어려워지는데다 소설이 자꾸 나오지 않습니까. 문리가 트이는 게 아니라, 늘 어려움은 마찬가지지요. 젊은 작가의 세계를 밖에서 바로 들어가면 이해할 수 없고, 오랫동안 야금야금 읽어놔야 이해가 되요. 특별히 문리가 트였다고 할 만한 게 없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월평 하나를 쓸려면 한 작품을 3번은 읽어야 합니다. 처음에 읽고 메모를 해놓고, 글을 쓸 때 다시 읽어요. 다 쓰고 난 다음 또 읽으며 체크를 하지요. 3번 안 읽으면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늘상 부족하지요.”

 

70~80년대 한국문학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의 명제에 충실하던 소설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김 교수의 문학공부도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게 된다.

 

“1994년 소설가 윤대녕이 나타나 은어낚시통신을 써버렸어. 소련이 무너진 이후 나온 것인데 인간은 벌레다라고 써버렸지. 심지어 인간은 연어이자, 메뚜기, 철새라고 한 거야. 말하자면 역사적인 고통에서 나온 상상력에서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바뀐 것이지. 인간은 어차피 다른 동물하고 똑같다고 본 것이죠.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역사적인 고통이 없어요. 분단이니, 노사문제니 하는 문제로 어떻게 소설을 쓸 수가 있겠어요. 노동자가 정부보다 더 힘이 센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소설은 요새 우스운 것이 됐지요.”

 

김 교수는 그러나 인문학은 아직도 유효하고 위대하다고 주장한다. 평생 소설과 문학공부에 빠져 살았지만 여전히 소설을 통해서도 인류사를 공부할 수 있다고 외친다.

 

지엽적이고 쩨쩨한 공부 대신 큰 공부를 하세요. 가령 소설로도 인류사를 공부할 수 있어요. 곤충학이나 어류학도 인류를 위해 공부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좁게 출발하지 말고 큰 포부를 갖고 공부하는 것이 필요해요. ”

 

김 교수는 나아가 우주적 세계관을 가지고 공부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지역성에 머무르면 좀팽이가 되는 것이고, 인문학도 우주를 향해야 한다는 거지요. 2008년은 신시(新詩) 100년이 되는 해가 아닙니까. 100년 전 육당 최남선 선생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썼잖아. 소년이 해외로 나가 외국 문물을 배우라고 했어요. 기성인은 안 돼. 이미 썩어서. 앞으로 인문학이 나갈 길은 두 가지야. 하나는 우포늪입니다. 우포늪만큼 굉장한 것이 없는데 자연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죠. 그다음으로 우주로 가야 해요. 비틀즈의 노래 우주를 가로질러야(across the universe)’처럼 러시아의 무인 우주선에 실려 우주에 퍼지듯 자연과 우주, 인류사를 위해 공부하세요.”

 

 중앙일보 김태균 기자.jpg

약력:

대구 출생. 대륜고등학교, 경북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국어교육 졸업

연세대 교육대학원 상담교육.

현재: 월간 중앙조선 기자

 


이정아

2018.11.01 15:59:01
*.48.247.88

지난달 25일 작고하신 김윤식선생님이시네요.

저는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분의 평론을 계속 읽었기에

스승님같아요. 우리세대의 최고의 평론가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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