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문학평론가

조회 수 1569 추천 수 1 2019.02.02 13:31:23

     

         본격수필의 창작의 충격과 의미화, 그 자연한 과정 밟기


                                                                                                                     한 상 렬

                                                                                                              (수필가.문학평론가)

 

 

   잘 창작된 수필 한 편에는 시의 요소인 리듬과 시적 감수성, 심상(이미지)이 담겨 있으며, 소설적 요소인 서사적 스토리가 담겨 있고, 희곡과 같은 극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비평적 요소까지 지닌다. 결국 좋은 수필은 시적이며, 소설적이고, 극적인 동시에 비평적이라 하겠다. 이런 조합을 이룬 수필을 본격本格수필이라 할 때, 우리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문학성이 덜한 그저 붓 가는 대로쓴 수필이 횡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일종의 잡문雜文일 것이다. 혹자는 이를 대중수필 또는 키치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중수필은 글자 그대로 대중을 위한 흥미 본위의 수필이고, 본격수필은 문학성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다.

   수필은 언어예술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문학성을 지녀야 하며, 미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예술은 미를 표현한다. 사물에 형식을 부여하여 그 사물을 아름답게 창조해 놓은 것이 예술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어떤 종류이든 그 안에 인생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다시 말하면 수필가는 무의미 속에서 유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완전을 지향한다. 내용과 형식이 결합해서 하나의 조화를 만들어 낸다. 미적인 충동은 이 조화를 통해서 경험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환희를 체험하고, 감상자나 독자는 그가 제작해 놓은 작품을 바라보면서 기쁨을 얻게 된다. 예술이 실용적인 이해와 관계없이 목적에 즐거움을 두고 있는 것은 작자와 감상자가 함께 그것에서 긴장의 해소 즉 카타르시스를 맛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수필은 어떻게 쓸 것인가? 방법을 안다는 것과 실제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 사이에는 많은 거리가 있다. 예술이라는 하나의 광장에 이르는 길은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 방법이 비슷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창작과정은 그림과 문학이 다르고, 문학 중에서도 소설과 수필이 다르다. 수필도 쓰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자신의 창작 습관을 가지고 있다. 대체적인 표준이 있다 해도 그 표준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창작의 방법은 남의 방법을 차용하기는 어렵다. 스스로가 개척한 자기의 방법에 의해서 각자의 작품이 만들어질 뿐이다.

   결론적으로 본격수필의 창작과정은 충격에서 출발하여 의미화로 그리고 통합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할까?

 

    1. 충격衝擊

 

   문득 일어나는 가슴안의 동요가 충격이다. 외부의 사물과 내부의 순수가 만났을 때 충격은 일어난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친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독서나 사색에서 충격은 예고 없이 가슴에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쁨일 수도 있고, 가슴안의 동요일 수도 있으며, 어둠에 던져진 광명일 수도 있다. 충격은 글을 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의 폭발이 있을 때라야 우리는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이런 충격은 단순하지만 수면에 던져지는 돌의 파문처럼 차차 넓어져서 그것과 관련되는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을 모이게 한다. 그 생각이 소재素材가 되기도 하고, 그 소재에서 주제가 추출抽出되어 나오기도 한다.

충격은 마음이 비어 있을 때라야 일어난다. 어떤 종류의 갈등이 내부에 움직이고 있으면 충격이 일어날 여백이 없다. 그래서 좋은 충격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비워 둘 필요가 있다. 순진, 소박, 순수는 충격을 일으켜 줄 터전이 된다. 그 터전을 닦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수업이라 하겠다.

 

휴전이 되던 해 음력 정월 초순께, 해가 설핏한 강 나루터에 아버지와 나는 서 있었다. 작은 증조부께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작은댁인데, 배가 강 건너편에 있었다. 아버지가 입에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대고 강 건너에다 소리를 지르셨다.

사공-, 강 건너 주시오.”

[건너편 강 언덕 위에 뱃사공의 오두막집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노랗게 식은 햇살에 동그마니 드러난 외딴집, 지붕 위로 하얀 연기가 저녁 강바람에 산란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오두막집 삽짝 앞에 능수버드나무가 맨 몸뚱이로 비스듬히 서 있었다. 둥치에 비해서 가지가 부실한 것으로 보아 고목인 듯싶었다. 나루터의 세월이 느껴졌다.]

강심만 남기고 강은 얼어붙어 있었고, 해가 넘어가는 쪽 컴컴한 산기슭에는 적설이 쌓여서 하얗게 번쩍거렸다. 나루터의 마른 갈대는 서걱서걱아픈 소리를 내면서 언 몸을 회리바람에 부대끼고 있었다. 마침내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고 갈대는 더 아픈 소리를 신음처럼 질렀다.]

[나룻배는 건너오지 않았다. 나는 뱃사공이 나오나 하고 추워서 발을 동동거리며 사공네 오두막집 삽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부동의 자세로 사공 집 삽짝 앞의 버드나무 둥치처럼 꿈쩍도 않으셨다. ‘사공-, 강 건너 주시오.’ 나는 아버지가 그 소리를 한 번 더 질러 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다. 그걸 아버지는 치사恥事로 여기신 것일까. 사공은 분명히 따뜻한 방안에서 방문의 쪽유리를 통해서 건너편 나루터에 우리 부자가 하얗게 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선의 효율성과 사공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나루터에 선객이 더 모일 때를 기다렸기 쉽다. 그게 사공의 도선 방침일지는 모르지만 엄동설한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옳은 처사는 아니다. 이 점이 아버지는 못마땅하셨으리라. 힘겨운 시대를 견뎌 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이념적 대치였다.]

아버지는 주루막을 지고 계셨다. 주루막 안에는 정성들여 한지에 싼 육적肉炙과 술항아리에 용수를 질러서 뜬, 제주祭酒로 쓸 술이 한 병 들어 있었다. 작은 증조부께 올릴 세의歲儀.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세의를 지고 꿋꿋하게 서 계시던 분의 모습이 보인다.

 

-목성균, <세한도歲寒圖>, 명태에 관한 추억, 하서 , 2003, 56-57)

 

*필자주筆者註

회리바람:나선모양으로 갑자기 빙빙 도는 바람.

삽짝:나뭇가지들을 엮어 만든 문짝

주루막:주둥이에 두 줄을 마주 꿰어 여닫게 만든 망태기의 하나

 

   주제구현에 성공한 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닮았다. [] 부분은 마치 세한도 의 배경과 흡사하다. 아니 그림을 그린 화가의 성정과 닮아 있다. 엄동설한에도 버티고 서 배가 건너오길 기다리는 아버지의 강인함이 세파와 맞닥뜨려 흔들림 없는 완강함, “힘겨운 시대를 견뎌 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이념적 대치였다.”는 해석의 진중함이 이 수필을 맛깔나게 하며 의미화의 깊이를 맛보게 한다. 5.7매의 짧은 수필인 이 수필은 [] 부분의 작품 전체의 배경에서 출발하여, <>부분의 갈등이 점차 심화하면서 다음 단락에서 아버지와 사공의 대치적 심리의식의 고조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글을 창작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단락에서 일 것이다. 이런 충격적 동기가 이 수필의 전반적인 배경과 어울려 존재의미를 규명하는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적 수필로 승화되고 있다. 이렇게 의미의 긴축과 압축의 묘미가 이 수필을 더욱 빛나게 한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손광성수필집, 달팽이, 을유문화사, 2000. 48-51)

 

   ‘달팽이에 대하여 생물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문과학과의 통섭에 성공한 이 작품은 그 창작동기가 되는 충격이 작품에 말미에 서술되고 있다. 즉 화자가 달팽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실적 현장감이 수필의 뒷부분에 배치되어 있으며, 결미의 단락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는 달팽이와 화자와의 동일시를 통한 자아성찰이다.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는 달팽이의 가련한 모습,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라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은 화자 자신의 지엄한 성찰일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런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서게 된다고 했다.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싶어서다. 그리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에 대한 감회가 정서적으로 미화되어 있다.

 

김애자의 수필집점은 생명이다의 표제작은 다음과 같은 서두로부터 시작된다.

 

점은 생명의 원형이다.

경칩이 돌아오면 나는 집 앞 논배미에 딸린 웅덩이를 찾아간다. 그것에 가면 개구리들이 슬어 놓은 까만 점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표만큼이나 작은 점들이 투명한 포낭包囊 속에 무수히 들어 차 있다.

 

-김애자, <점은 생명이다>, 수필과비평사, 2015, 224


   생명에 대한 공경을 주제로 한 그의 수필은 대체로 자연과 인간의 삶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생명을 지닌 만상萬象에 품은 화자의 생명주의 정신이 이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가 무엇 때문에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점과 같은 포낭 안의 무수한 생명체에 대한 애정, 아니 여기선 그저 애정이 아니라 공경심일 게다. 수필의 창작은 이렇게 작은 충격에서부터 발아된다.

 

   2. 의미화意味化

 

   사물은 있는 그대로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한갓 현상이고 사실이며, 현실일 뿐이다. 해석을 가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물 안에 의미가 내재되고 있다 해도 그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무의미할 뿐이다.

의미를 가장 잘 찾아내는 사람은 철학가이다. 철학가는 의미를 찾는 데서 인생의 보람을 얻는 사람이다. 종교가도 의미를 찾고, 학자도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우주와 인생의 궁극의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작품에 옮기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예술가 중에서도 문학을 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문자를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철학은 의미를 찾는 것만으로 임무가 끝나지만 문학은 사람의 심정에 호소해서 감성感性이라는 울림통에 전함으로써 끝이 난다.

 

   사람의 내부에는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사상과 인생관 또는 철학이 준비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고,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다. 그 사상과 인생관 또는 철학이 사물과 만나서 의미를 찾는다.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비극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낙천적인 생각을 떠올렸다면, 그들의 내부에 그럴만한 기초 작업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넓고 높은 철학을 가진 사람은 사물에서 그만큼 높은 의미를 발견할 것이고, 실리적이고 즉물적인 철학을 지닌 사람은 나름대로 또 그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의미화 작업은 곧 수필 속에 어떤 철학을 담아 넣느냐와 관계가 깊다. 짧은 한 편의 수필에 사상이나 인생관이 담겨질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수필에 따라서 사상이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약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본격수필일수록 그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사상과 철학이 설탕을 물에 녹였듯이 어떻게 녹아 있느냐에 따라, 문학이 되기도 하고, 철학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화 작업은 충격의 다음에 올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충격과 동시에 의미가 다가오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폭이 좁고 깊이가 얕다. 충격을 받은 다음에 그것을 작품으로 옮기려 했을 때 의미화 작업은 활발해진다. 좋은 작품들은 모두가 이런 의미화 작업을 잘 거쳤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의미화 작업은 수필의 개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 맹물 같은 수필이 되기도 한다.

   어윈 에드먼은 그의 예술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경험은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예술은 그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포괄적인 예술은 인생 전체를 생생하게 만들어 놓는다.”고 했다. 또 일본의 시인, 이토오 게이이치伊藤桂一은 그의 서정시입문에서 시를 쓰기 위한 발상차원을 다음과 같이 예로 들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보면서 그 차례를 적은 것이다.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그 자체(木質)를 본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위에서 부터 까지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 보고 있지만, 에서 까지는 보이지 않는 데까지도 보고 있다. 에서 까지의 객관적인 관찰도 내부의 준비에 따라 비치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지만 에서 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를 보고 있다. 이는 의미화 작업이 된다. 이들 예는 시의 경우이지만 수필에서도 거의 동일한 관찰이 일어날 수 있다.

  앞의 손광성의 <달팽이>에서 다음 대목을 보자.


달팽이는 이빨도 없다. 그의 입은 먹기 위한 기관이라기보다 차라리 이목구비를 갖추기 위한 필요에서 생긴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뭐든 먹기는 먹는 모양인데 그런 순간을 거의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짝짓기를 하는 장면도 들키지 않으니 말이다. 귀여운 금욕주의자, 이 모든 쾌락보다 더 절실한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달팽이는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 길을 떠난다.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방황하는 영혼, 고독한 산책자.

그러나 달팽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쁨을 노래하지도 않고 슬픔을 울지도 않는다. 매미에게는 일곱 해 동안의 침묵과 극기를 보상하고도 남을 이레 동안의 찬란한 절정의 순간이 주어지지만 달팽이에게는 그런 눈부신 순간이 없다. 그렇다고 종달새 같은 황홀한 비상의 기회가 마련되어 잇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시며 그루터기며 사금파리 같은 현실, 맨살로 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육체의 고통이 대로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믿는 어는 고행승과도 같은 그런 표정으로 그저 묵묵히 몸을 움직일 뿐이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말없는 순례. 지나간 자리마다 묻어나는 희고 끈끈한 자국들. 배설물일까. 낙서일까. 아니면 그들끼리만 통하는 상형문자일까. 끝내 판독되기를 거부하는 암호들.

 

   이들 대목은 달팽이의 외관관찰이기 보다는 내적 관찰 즉 사물의 통찰에 작가의 시선이 머물러 있다. 달팽이는 이빨도 없지만 귀여운 금욕주의자,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있지만, ‘고독한 산책자로 상상하고 있다. 그래 달팽이의 행보를 오체투지의 말없는 순례로 보고 있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발상이요. 사유의 세계일 것이다. 이런 의미화는 작가 자신의 개성적 시선을 것이요, 낯선 풍경이며, 통섭적 처리일 것이다.

   또한 앞서의 목성균의 <세한도>에서 보듯 사공과 아버지의 대치는 힘겨운 시대를 견뎌 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이념적 대치였다.”는 표현에서 보듯 사건과 행위를 바라보는 화자의 의미화를 보여준다.

 

3. 통합統合

 

   작품이 될 여러 가지 요소를 한자리에 모아서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바로 통합이다. 이는 구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소재와 의미와 주제가 하나의 끈에 의해 엮어져서 통일된 완성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경우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소재를 선택할 때 그 분량이 과다하면 주제가 분산되기 쉽다. 그러므로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적절한 분량은 작법作法상의 기술이 된다. 또 소재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일 때는 독자의 흥미를 잃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소재를 단순한 사건 중심으로 하느냐 아니면 현장묘사로 하느냐 등이 수필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된다. 통합은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생명체로 만드는 잉태 과정이라 하겠다. 한 마디로 통합은 생산을 위한 진통이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신생아를 낳기 위해서는 통합이 잘 되어야 한다.

   앞서 손광성의 <달팽이>의 결미 부분을 보자. 이 수필의 결미는 창작과정에서 발생한 착상의 동기인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달팽이의 모습이 갖는 의미화와 아울러 결미 마지막 단락에서 함축과 여운을 지니면서 해석과 의미화를 통합처리하고 있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손광성수필집, 달팽이, 51)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라는 대상과 나와의 동일시가 존재파악이라는 수필의 지엄한 소명에 닿아 있다. 대상에 대한 예민한 통찰력, 나아가서 그 의미화에 성공한 이 작품은 상상적 세계의 폭을 넓혀준다. 문학이 상상을 떠나 존립할 수 없음은 이 수필을 읽어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억센 턱도, 무서운 독침도, 뼈도, 이빨도 없는 달팽이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개구리도 나비도 하다못해 배추벌레마저 그를 벗하려 하지 않는다. 나약한 존재이면서 소외된 존재의 비애다. 그런데 그 달팽이가 억새풀 높은 끝에 위태롭게 맺혀 있다. 여기서 화자가 달팽이와의 동일시를 통한 존재의 비애를 감지하게 된다. 유리벽 저 쪽에서 울고 있는 남자가 이를 증명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화자의 상상력이 비범하다. 다만 그 소외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는 아직도 찾지 못한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한 편의 수필은 이렇게 무형식이 아니라, 수많은 방황 속에 어느 날 새벽, 기적처럼 던져지는 통합의 선물이 다가올 때가 있다. 무엇에서 시작해서 어떤 이이야기를 하다가 어디에서 끝내자는 질서가 나타난다. 이는 무형식의 형식을 낳기까지의 고통의 과정일 것이다. 수필의 매력은 바로 이런 무형식의 형식이란 작법에서 비롯된다.

   수필가 김시헌은 이런 경우 길을 걷다가 예쁜 여성을 만나면 보는 사람의 눈에 생기가 돈다. 무의식에 충동이 오기 때문이다. 눈과 코와 입의 거리며 볼과 이마와 턱의 넓이 등이 전체적으로 제 위치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몸속에 든 생명을 보호 유지하기 위해 그 나름으로 크기와 길이와 높이에서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동물 중세서도 더욱 균형이 잘 잡힌 동물이 있다. 거기에 빛깔이 곱고 노래가 아름다우면 경탄과 함께 기쁨이 온다. 균형과 조화가 주는 기쁨이다.”라고 하였다. 새겨 볼만 한 언술이다.

   본격수필의 통합은 이렇게 완성을 지향한다. 크기가 알맞아야 하고 빛깔도 고와야 한다. 그리고 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절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미의식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의식이 높다 해도 솜씨가 없으면 뜻을 이루기가 어렵다.*


한상렬.jpg


     한상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문협자문위원, 계간 에세이포레발행, 편집인.

저서:문학평론집존재사테, 그 사유의 악보7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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