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선 수필가

조회 수 5212 추천 수 1 2016.01.01 08:24:47

                                     <무인 카메라>를 중심으로 한 김윤선 수필가의 작품 세계

 

                                                                                                                                                                                                                                                                      공순해 (한국문협 워싱턴주 지부 회장)

    

   시인이기도 한 유병근 수필가는 그의 저서 <수필담론>에서 생명이 없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며, 수필가는 사물인식을 위한 개척자라고 했다. 하기에 세계가 갖는 외면과 내면의 미세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찾아내어 세계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자 수필가는 노력한다고 했다.

   유병근 수필가의 오랜 제자인 <무인 카메라>의 저자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사물 인식이 뛰어난 작가다. 그는 우리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대 여기저기 찍은 후, 카메라의 줌아웃 상태의 우리 삶을 부각한 뒤, 본인의 시각으로만 볼 수 있는 줌인 상태로 이끌고 가, 사물을 확대 고정해 삶의 의미를 캐고 전달해 준다. 이 책의 저자만이 보여 주는 독특한 기법이다.

   그리고 이 책에선 또 하나의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의사가 청진기로 환자를 진료하듯 삶을 진료해낸다. 청진기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독자는 이 책의 수필을 통해 삶의 박동 소리를 듣는다. 참으로 생생한 삶의 숨소리를 듣는다.

 

   “가을마당에 날아든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고향의 체취를 전하고 있다. 이곳저곳 눈도장을 찍으며 한가롭게 마당을 헤집고 다니는 게 아무래도 때늦은 가을 소식을 전하는가 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한국의 고추잠자리보다 크기가 작고 색깔도 선명하지 못하다. 아니면 어때. 나는 놈을 고추잠자리라고 불렀다.

   과연 이름을 얻었기 때문인지 놈은 좀체 뒷마당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저를 부르는 소리에 꽃처럼 다가와 내 눈앞에서 맴돌고 있다. 처음엔 그냥 맴돈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춤사위가 꼭 살풀이춤을 닮았다. 투명한 날개를 쫙 벌려서 수평을 이루다가 곤두박질하듯 아래로 고꾸라지는가 하면, 어느 순간 휙 하니 방향을 틀어 위로 솟구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중략)

   살다 보면 삶에 날개를 달 때가 있다. 안 그래도 잘 나가는데 때아닌 행운이 겹칠 때 우리는 그 일에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면서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만과 욕심이 앞을 가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날개는 자칫 정점에서 제 날갯죽지를 찢기곤 한다. 추락하는 건 늘 한순간의 일이다. 십 년 세도 없고 부자가 삼대를 가지 않는다는 속설이 이를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지간히 상상의 날갯짓을 즐겼던 것 같다. 백설공주가 되고, 잔 다르크가 되고, 버지니아 울프가 되고 싶었던 바람 말이다. 상상이란 게 원래 밀랍 아니던가. (중략) 이카로스, 그의 날개, 밀랍 말이다. 오늘 내가 생면부지의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것도, 실은 그런 상상의 날갯짓 때문이 아닐까. (중략) 인연은 그런 날갯짓 속에서 이뤄지는 모양이다.

   마루 끝에 앉아서 하릴없이 잠자리를 눈으로 좇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팔이 들썩인다. 처음엔 손이 움찔거리더니 팔꿈치가 올라가고 어깨마저 들썩이고, 어느새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살짝 무릎을 굽히고 한 바퀴 빙 돌기도 하고 제법 추임새까지 넣는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친 듯 몸동작이 가볍다. 설상가상 훌쩍 공중으로 날아올라 날갯짓을 하고 있다. 길게 팔을 내뻗기도 하고 살짝 오그리기도 하는 게 꽤 기품있다. 내친김에 두 팔을 활짝 벌려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때였다. 어딘가에 설핏 팔 닿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눈을 떴다. 문 언저리에 팔이 닿아 있다. , 그새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햇빛이 놀리듯 내 눈을 쏘고 있다. 고추잠자리도 춤사위를 끝냈는지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멋쩍은 마음에 두 팔을 등 뒤에 감춘다.

   훌쩍 다가온 고추잠자리가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더니, 휑하니 몸을 돌려 멀리 햇빛 속으로 날아간다. 재빠른 날갯짓이 하마 인연이 끝났음을 말하려는 것일까. 저쯤 사라지는 놈의 날개에 부딪힌 햇빛 한 조각이 언뜻 빛으로 남더니 이내 소멸한다.

   마당은 텅 비고, 놈이 떠난 빈자리엔 가을 햇빛이 재여 있다.”

 

   수필집 <무인 카메라> P42 <날개> 중에서

 

   1단락에서 저자는 고추잠자리인지 아닌지 모르는 잠자리를 일단 고추잠자리로 잠정 확정하여 소재를 획득한다. 그리고 고추잠자리라는 사물이 선정되자, 즉시 그 대상에 ( 2단락) 카메라를 들이댄다. 줌아웃 상태의 카메라는 선회하고 있는 잠자리의 날개를 확대한다. 살풀이춤이라고. 그리고 곧바로 줌인하여, 날개에 포착된 우리 삶을 관찰한다. “ ~ 추락하는 건 늘 한순간의 일이다.” (4단락) 이런 포착엔 전율마저 느껴진다.

   그다음 그는 청진기를 꺼내 든다. 그리고 상상을 진단한다. 상상이란 원래 밀랍이라고. 과거 상상으로 꾸었던 꿈, 소재를 포착하여 꾸는 꿈, 상상. 하여 그는 삶은 한바탕 꿈이라는 삶의 본질을 능청스럽게 진단해낸다. 이 대목에선 이광수의 <>에 등장하는 조신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리고 그는 상황을 종결한다. “마당은 텅 비고, 놈이 떠난 빈자리엔 가을 햇빛이 재여 있다.” (마지막 문장) 삶은 원래 이렇게 적막이 그 근원이라는 듯. 하지만 그가 말하는 적막은 그냥 적막이 아니다. 놈이 떠난 적막, 즉 비운 다음에 채워지는 가을 햇빛이 있다.

   그는 우리 삶 속의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제시하며 상황을 닫았다. 관찰과 진료를 통해. 하기에 이 책 제목은 <무인 카메라><무인 청진기>로 바꿔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그에겐 한 가지 과제가 남게 됐다. 카메라로 찍고, 청진기로 진단하고,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처방전이다. 진료만 해선 명의가 되지 못한다. 처방전까지 완료돼야 환자는 소생한다.

   분명 그는 이 일을 해낼 것이다.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박고 힘차게 영양을 빨아올리듯 사물이란 대상에 문어 빨판처럼 관찰의 눈을 박고 다정하게 대상을 쓰다듬으며 사색을 길어올리는 뛰어난 능력을 갖췄으니까. 그는 정녕 사물인식을 위한 개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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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99<에세이문학> 등단

8회 재외동포문학상, 4회 천강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에세이부산 회원

현재: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저서 <무인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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