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애 시인

조회 수 5122 추천 수 1 2015.03.01 08:14:48

너에게 들려주려고
오래 간직해온 한마디
내 여린 가슴
판막에 찍혀지면
그물에 걸린 푸른 생선처럼
튀어 오르며 달려가네

혹시 널 못 찾을까
두근대는 가슴 안고 둘러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큰 입술 열어 반겨주네
세상 진풍경 다 보고 있는
그대는 귀 열린 벙어리
길가의 영원한 집시
  
 - <길가 우체통> 후반부

 

 마치 그리움의 보자기처럼 푸른 통치마를 둘러 입은 ‘우체통’은 오랜 기다림의 화신으로 길가에 서 있다. 화자는 그 영원한 집시를 향해 사라져버린 우정이나 양심을 기다리는 귀 열린 벙어리라고 묘사한다. 세상에 들려주려고 오래 간직해온 한마디는 화자와 우체통을 남다른 활력으로 연결해주고 있다. 언제나 길가에 서서 큰 입술을 열어 반겨주는 그 우체통을 통해, 화자는 세상과의 소통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시편에서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비록 지켜지지 않을 약속일지라도 넌/파수꾼으로 날 지켜보며/창 밖에서 긴 밤을 보내주었지(지켜지지 않는 약속) 하고 고백하는 내면과 적극 만나고 있다.
  이렇게 이 시인은 내면의 세계와 사물을 결속하고 유추하여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뢰가 균열되어 나타나는 경험도 고백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녀가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미국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가마솥에 콩 한 되 볶으면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지금은 불새 되어
저 하늘 끝으로 사라져갔네

현자의 소리보다
많이 가진 자들의 노래가
큰 나팔로 울려 퍼지는
물질의 부흥시대
건강한 뇌가 황금에 침식되어도
주머니에 감춘 한 줌 진실을
대신해 주지 못하는 밤
불꽃이 눈물로 떨어지는
주름진 아메리카 독립기념일

 

       -<뷰피-풀 아메리카> 후반부

 

  제목에서 이미 반어적 색채가 풍기는 이 시편은 가진 자들의 허세와 낭비가 있고, 현자의 소리보다/많이 가진 자의 노래가/큰 나팔로 울려 퍼지는/물질의 부흥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아메리카에서, 화자는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가마솥에 콩 한 되 볶으면/마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확연한 가난과 물질의 대비 속에서, 화자는 주머니에 감춘 한 줌의 진실을 대신해주지 않는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잔치를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본다.
  유지애 시인의 이러한 감각은, 미국의 화려한 외피를 뚫고 그 이면을 바라보게 하는 시선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는 시적 대상의 본질을 재발견하면서, 그것에 얽힌 경험적 구체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유지애 시편이 이러한 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재미 시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뜻깊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유성호 문학평론가의 서평,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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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문예운동 시부문 신인상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국제펜 미서부지역 이사
  현재: 미주청하문학 회장

  수상: 2013년 서울문학 오늘의 시인상

            2014년 청하문학 시부분 수상

  저서: 시집:한 줄의 느낌. 수필집: 밑줄긋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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