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수 시 평론가

조회 수 7282 추천 수 5 2014.12.21 07: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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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쉬지 않고 날 따라다녔다/아니, 변화가 날 따라다니지 않고/변화하는 세상에 순응에 순응하기 위해/ 먼저 변화 쫓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태양에 갇혀 있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장소와 주변 사물을 변화시켜왔다/카멜레온의 강한 생명력만이 존재하는/현실에 적응하며 온전한 내가 되었다/산과 강, 자가 발전된 내 톱니 의식/질곡의 생을 건너 여기까지 왔노라고/이제 한곳에 정착하여 쉬고 싶다고/구름 낮은 산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편안하게 앉아 신발 벗는다/ 그리고 천천히 겉옷 벗어 알몸으로 잠을 청한다/나비가 되어 비상을 꿈꾸는 누에고치/움직였던 변화들의 내 껍질을 모아둔다/지상의 존재하여 변화하는 모든 생명들/사랑하고 사랑하여 내 안에 평화를 빈다/내일은 또 다른 변화를 기다리겠지만/주어진 길은 충실하게 걸어 갈이다.
                                                                                                                 -한길수, <길 위에 서면> 전문

 

   산문을 전문으로 하는 필자가 운문을 전문으로 하는 화자의 글을 평한다는 게 좀 그렇다 싶었다. 하지만 다른 평론가에게 부탁하기가 뭐해서 화자의 시집 전편을 직접 읽기 시작했다.  

   화자의 시를 읽다보면 안토니 클라베의 ‘수박을 든 아이’, 마치 피카소의 초기작품처럼 멜랑콜리한 어릿광대를 보는 듯하다. 자기 아들 파올로를 무대 세트와 연극 의상 디자인, 포스트 디자인한 것은 피카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음을 쉽게 알게 된다. 손에 쥔 수박의 빨간 과육은 스페인 내전 당시 낭자했던 유혈의 아픔을, 자기 아들 파올로를 통해 허기진 거지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화자는, 삶은 새로운 변화를 쫓아다닌다고 고백한다. 의식의 변화에는 강인한 생명력만이 존재한다며, 무한한 변화가 신뢰로 변하여 모든 것이 긍정적이 된다고 믿는다. 마치 빈 들에 밀짚모자를 쓰고 서 있는 허수아비 모양이 아니라, 톱니 의식으로 질곡의 생을 건너 산에 올라가서 편안하게 신발을 벗겠다고 한다. 그 구름 낮은 산의 정상은 무엇일까. 이민자로서의 물질적·정신적·문화적 윤택한 삶을 향한 목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먼저 변화하겠다는 의지적 고백이다. 그런 의미로 평자는 클라베의 거지 같은 옷을 입은 수박 든 아이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모습에는 그런 게 전혀 안 보인다. 맞다. 다른 이에게는 아무런 허식과 편견 없이 편하게 보인다. 화자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해도 주저함 없이 쉽게 조언과 충고할 수 있고, 서로 보지 못하는 영역(blind sight)을 보완해 주는 역할이라 믿게 하는 그런 모습이다.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화자는 강인한 정신력이 온몸에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을 달관한 도인처럼 누에고치가 껍질을 벗고 카멜레온처럼 세상에 색칠하듯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변화를 위한 생명들을 사랑하고, 새로운 변화를 예수의 보혈처럼 자신에 대한 평화와 기도, 그리고 변화된 길을 걷기를  스스로 주문하고 있다.

 

  사는 건 처음부터 목숨 건 투쟁이었을 것/모래바람 속을 떠도는 울분의 씨앗/백번 죽어 화려한 변명이 되고 말 뿐/풀조차 신이 선택한 운명의 등고선이라면/늙은 하이에나의 울음 같은 낮은 목소리로/눈물 가슴 한 골짜기를 비워두자/ (중략)
불황의 뼈들로 삶은 폐타이어처럼 굴러다니고/가시가 된 아홉 시 뉴스가 귓속 파고든다/끈질긴 생의 뒷골목 구차한 사랑조차/ 낙타에겐 단벌 멍에 옷이 아니던가/물기 없는 저 구릉의 건조한 씨알 하나/마지막 남은 목마른 소망일 될지라도/살을 태우는 사막의 하얀 밤 갈고 갈아/시퍼렇게 날 세우고 싶다
                                                                                                                                                 -한길수, <낙타는 사막을 벗지 않는다>

 

  화자의 시를 읽고 나면,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운명에 관해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의 상식과 도의와 이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반복 연습을 통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다.
  화자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는 부부 사이에도 카멜레온의 발톱 없이는 완전한 버팀목이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화자의 시는 삶의 무게를 경험한 구성체를 지녔다. 미운 정 고운 정은, 가을 들녘의 노란 단풍과 빨간 단풍은 초록빛 하늘, 눈과 비 그리고 세찬 바람 속에서 변한 것처럼 말이다. 화자는 마치 상대방을 채워 주는 상반된 조화를 알 듯 모를 듯 쉼 없이 시공에 상처와 위로를 변화로 그리고 있다. 어느 정도의 변화인가. 폐타이어가 되도록 달도록 변화해야 이룩할 것이라 강조한다. 어쩌면 생활을 위해 고독과 아픔을 등짐져야 해도, 고국의 뉴스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받는 그런 지독한 하이에나다.
  시인이며 시 평론가인 화자의 시는, 산문형 서술을 통한 삶의 형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대화방식의 시적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화자는 해수병을 지독하게 앓고 있는 디아스포라 환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목적을 위해 고향을 잠시 뒤로하고, 가난했던 기억을 두 자식에게 넘겨 주지 않기를 위해 기꺼이 홀로 등짐 지고 있다. 그랬길래 고된 발걸음으로 모하비사막을 건너는 사막의 낙타가 되기를 자청했을 것이다.

 

  간혹 문인들과의 관계가 버겁고 새털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길이 안 보여 허우적거리며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쳐야 한다. 서로 구속하지 않기 위해 지평선을 보듯 동고(同苦)를 위해 먼 듯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장사하고 집에 돌아갈 시간에는 가게의 전깃불을 끄고 사람들이 다녀간 빈자리를 쳐다볼 것이다. 그 빈자리에 새로운 한 편의 시를 떠올리며 가슴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글: 강정실  평론가)


약력:
 충북 청원 출생.
 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계간《현대인》평론 추천, 천료.
 계간《시와 시학》시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및 미주지회 이사.
  <빈터> 동인.
 재외동포문학상. 《현대문학사조》무원문학상 수상.
 제15회 국제문화예술협회 시부문 수상.
  시집 『붉은 흉터가 있던 낙타의 생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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