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이는 등

조회 수 1787 추천 수 0 2014.12.16 15:12:24

                                                                            깜박이는 등
                                                                                                                             강 정 애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서울 청량리에 있는 성 바오로 병원에서 일하던 때였다. 병원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자락 아래 있고 응급실이 우측에 보인다. 뒤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레지던트 방이 있어 항상 그 길을 통해서 출근하곤 했다. 출근길에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앞으로 올겨울 눈보라를 향해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튼튼히 설 수 있을까? 우연한 생각에 빠진 사이 날이 저물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다. 저녁에 홀로 걷는 길가에 열지 어서 가로등이 촉을 밝히고 있다. 그것들 틈에서 유독 한 개는 등이 깜박이고 있어 제 몸을 달궈 빛을 내는 등의 수명이 다한 것일까?
  청량리 정거장에서 새벽 기차 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하게 들려오는 일요일이다. 의사 초년병인 나는 간호사와 함께 밤새며 새벽까지 응급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던 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더니 응급실 앞에서 멈추었다. 싸늘하게 보이는 포대기에 덮인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도착했다. 상처가 얼굴과 온몸을 가렸고 환자의 신음만 들릴 뿐 사람의 형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연탄으로 더럽혀진 환자의 몸을 물로 씻은 후 혈관 주사를 놓고 응급약을 투여하였다.
  “보호자는요?”
  “지금 연락 중입니다.”
  이 환자는 의도적으로 청량리역을 달리던 열차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경찰이 조용히 말해 주었다. 부인과 연락은 20분 정도 후에 되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살아나기조차 어려운 환자의 상태를 보호자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의사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나를 쳐다보는 가족에게 그 눈을 바라보면서 매우 위독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심하게 다쳐서 사경을 헤매는 혼수상태의 환자라면 말이다.
  “환자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머리의 X-Ray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뇌출혈이 심한 상태입니다. 머리와 다리뼈가 여러 군데 상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소리치며 몸부림을 하는데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오히려 통곡하면서 소리치지도 않고 가만히 소리 없이 어깨의 흔들림만 보였다.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어스름 새벽이 기차 소리와 함께 창틈으로 들어왔다. 여러 가지 약물치료를 했지만, 입원 10시간이 지나자 월요일 낮에 심장마비가 왔다. 심폐소생술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왜 그렇게도 힘들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졌을까?
  나중에 부인이 진단서를 얻기 위해 사무실로 왔을 때, 잠시 나눈 이야기다. 직장에서 만나 결혼하여 아이 둘을 데리고 힘들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조그마한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 빚쟁이에게 쫓기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란다.

  시골에 수학여행 가서 들었던 칙칙폭폭 멀리서 달리는 기차 소리는 나에게 엄마의 자장가였다. 여관 주인아줌마의 밥 짓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도 함께 들어 왔다. 가끔 마음 한구석에 기찻길이 깔리고 소리 내어 달리는 기차가 추억의 실마리가 되어 가슴팍을 파고드는 것은 어릴 때의 추억 때문일 게다. 기적 소리에 사람들은 아득했던 의식의 세계에 빛을 밝혀 잃었던 꿈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련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한순간처럼.
  기차에 몸을 던져 사망했던 환자를 만난 후에는 기차 소리에 대한 나의 수학여행추억은 점점 허물어져 내렸다. 몸을 던지기 전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를 얻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는 판도라가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죄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이다. 험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을 믿으며 절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신화가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이 환자에게는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도 없었단 말인가. 모두 켜진 가로등 중에 유독 하나만 깜박이다 꺼진 등처럼.
  새벽 기차 소리에 나는 다시 번민의 조각을 하나씩 기워본다. 그리고 밤새 내 뒤척이며 귀뚜라미 소리를 실 삼아 추억 조각을 모아 바느질한다. 다시 기워진 마음의 보자기를 아름답게 접어 추억의 보따리에 간직하고 싶다.


홍마가

2016.05.03 18:35:02
*.90.101.188

강정애 수필가님, 이번 로스앤젤레스 방문때 최시인님과 함께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깜박이는 등 읽으며 여러 상념에 잠기게 됩니다. 

기차소리의 고운 추억이 우리의 아픈 현실속에 또다른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슴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희망을 붙잡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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