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길 따라

조회 수 599 추천 수 2 2020.01.24 09:09:21
작가 : 김혜자 수필가 

 

 

 

 

감자꽃 길 따라

 

나의 첫 수필집이 출판되었다. 큰일 했다는 충만함에 가슴이 뛴다. 더욱이 출판에 온 정열을 쏟아 주신 스승의 배려로 조국 산천 여행길에 올랐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黃砂)를 걱정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줬다.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하늘은 맑은 공기로 가득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려 내려온 아카시아 꽃향기가 내 후각을 흔들고 지나간다. 향기를 붙잡아 손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뜨겁게 달구던 시심(詩心)을 외면하고 구름이 흘러가듯 나도 떠난다.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번 여행은 승용차를 타고 가기에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어 좋다. 눈부시게 발전한 농촌의 풍경과 자연이 나를 즐겁게 맞이한다. 낯선 신선함이 시시각각(時時刻刻) 다가온다. 한국의 산천이 변한 것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았지만, 창밖에 보이는 풍경에 탄성이 튀어나온다. 굽이굽이 산을 돌아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남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충청북도 충주에 도착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 국원성(國原城)이라 이름 지었고, 통일 신라(新羅) 때는 중원경(中原京)이란 이름으로 불려 오다 오늘날 충주(忠州)로 바뀐 곳이다. 충주는 우리나라 중앙에 있는 문화유산의 중심지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스승의 절친인 충주에 사는 K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탄금대를 찾았다. 하늘을 이고 쭉쭉 뻗은 송림(松林)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시다. 초록색 잎들의 속삭임은 여정의 노래이고 음이온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폐부를 요동친다. 숲길을 산책하면서 권태응(1918~1951)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 앞에 발길이 멎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

설명이 필요 없는 짧지만, 운율이 살아 있는 시다. 감자꽃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지만 파도치는 감동을 피할 수 없다. 권태웅 시인은 1918년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저항 시인이다. 경성고보(경기고등)를 졸업 후 와세다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분이다. 도쿄에 유학 온 동기들을 모아 33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운동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 후 폐결핵 3기의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일제의 일본식 개명 강요를 반대하다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1951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 강점기 때, 감자꽃 가사에 항일 저항의식을 담아 감자꽃 노랫말을 개사하여 노래를 불렀다.

 

조선꽃 핀 건 조선 감자

파보나 마나 조선 감자

 

왜놈꽃 핀 건 왜놈 감자

파보나 마나 왜놈 감자

 

시인의 말처럼 자주색은 일본을 뜻하는 것이요, 하얀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나라를 말하는 감자꽃.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시를 가슴으로 부르니 애가 탄다. 배고픈 시절 감자로 끼니를 채우던 시절. 총칼보다 더 무서운 붓의 위력으로 민족의 얼을 심기 위해 시를 섰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더욱더 초라해 보인다.

다시 충주 부근에 있는 탄금정과 열두대로 간다.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즐기던 탄금정과 열두대로 가는 울창한 소나무는 우리 조상의 영혼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다. 기암절벽을 휘감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길이 가야금 타는 소리로 소나무 몸통을 에워싸며 역사 속의 애잔한 이야기로 묻어난다.

 

탄금대 서북편의 층암절벽인 열두 대에 앉아 남한강을 바라본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병과 싸울 때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열이 난 활을 물에 식히기 위해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지휘했던 곳이다. 신립 장군의 함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물은 직선으로 흐를 때보다 곡선을 이루며 돌아갈 때가 아름답게 보인다.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안고 흐르는 남한강.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패전 고배를 마시고 자결한 신립 장군이 떠오른다. 비장한 신립 장군의 울음은 세상 밖을 향해 반짝이는 물비늘로 토해내고 있는듯하다.

 

인고의 세월 속에 흰 구름만 파란 하늘에 하얀 거미줄을 치고 있다.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또 그려본다.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절박한 삶을 살다 가신 우리들의 조상. 이곳에 그들의 뼈와 탯줄이 묻어 있기에 가슴에 올라오는 뜨거운 사랑을 느낀다. 앞으로 만들어 갈 새로운 역사. 먼저 가신 선배들의 민족정기와 의식을 선양해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글로벌 코리안을 꿈꾸며 목마름의 문턱을 넘어본다.

 

  김혜자 수필-es.jpg 

약력

조선문학 수필등단

Warner Pacific College Business

미 연방정부 자원동력부 계약관

미 연방정부 국방부 공병대 계약관 정년퇴직

오레곤문협 부회장

 

 

 

 

 


웹담당관리자

2022.03.19 11: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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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마음

 

                                         김 혜 자

 

  온 세상이 회색 물감으로 얼룩진 신축년이 지나간다. 아름다운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으로 열병을 앓고 일상생활이 멈췄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지루하게 보낸 한 해가 흘러간다. 언제나 세상은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친구와 지인에게 보낼 선물 준비로 비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크리스마스의 멜로디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다. 보이지 않는 따스한 온기가 살갗을 스치며 내 옷자락으로 스며든다.

  지인의 얼굴을 그리며 적당한 선물을 고른다. 집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쇼핑센터에는 많은 물건이 반값으로 손님을 유혹한다. 충동 구매하기 쉽다. 오랜만에 하는 쇼핑에 들뜬 기분으로 물건을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백화점을 오르고 내리는 즐거움에 힘든 줄도 몰랐다.

  갈증이 났다. 생주스 코너로 달려가 줄을 섰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시원한 향기의 새큼한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8.50전이다. 신용카드를 주니 $10 미만은 안 받는다고 한다. 현찰이 없어 매우 난감하다. 뒷사람이 주문하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가방을 뒤졌다. 작은 지갑에 있는 동전도 꺼내 보지만, 턱도 없이 모자랐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현금 기계가 어디 있는지 주위를 살피는데 순간 계산대 아가씨가 오렌지 주스를 건네준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뒷사람이 주문하며 나의 주스 값도 냈다고 한다. 돌아보니 키가 크고 잘생긴 중년의 남자가 웃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도 아닌데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쇼핑몰 안에 있는 현금 기계에서 돈을 찾아 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Merry Christmas’ 하고는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떠난 그분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말았다. 그분이 사준 주스 맛은 여태껏 마셔본 것 중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오렌지 주스였다. 신선한 과일 향기와 훈훈한 온정이 담긴 주스의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즈음처럼 메마르고 각박한 세태에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감동에 젖은 내 마음은 풍선처럼 하늘로 나른다. 세상은 보면 볼수록 참으로 아름답다. 따뜻한 마음과 밝은 웃음을 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큰 축복이다. 작은 것이라도 주고받는 온정이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사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세상이 나는 좋다.

  받는 것보다 주는 일이 얼마나 기쁘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에게 받고, 선생님에게 받고, 형제, 친구에게 받은 것이 내가 나눈 것보다 훨씬 많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면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나오는 스크루지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부터는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주고받는 것은 물건뿐만 아니라 포근한 눈빛도 따뜻한 아름다운 마음도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작은 선물이라도 내가 아는 모든 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다시 백화점으로 들어가 양말과 장갑을 샀다. 우편물을 전해주는 아저씨와 쓰레기 치우는 아저씨에게 마음 담은 선물을 주고 싶다. 신문 배달하는 학생에게는 따뜻한 목도리를 건네고 싶다. 나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선물로 받은 작은 주스 한잔이 울림의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을 움직이게 했다. 그 고마움이 오랫동안 긴 여운으로 이어졌다.

  몇 달 전의 일이다. 남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공인회계사를 만나러 갔다. 도로 주차 미터기에 필요한 시간만큼 동전을 넣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때마침 순찰 경찰이 주차 미터기 앞에서 시간이 초과한 차에 벌금 티켓을 떼고 있었다. 바로 옆 주차한 차가 시간이 지난 것을 본 남편은 경찰관이 오기 전에 동전을 옆 차의 미터기에 넣고 시간 연장을 해 주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작은 일이지만 남의 일에 관심을 두고 벌금을 물지 않게 해주는 남편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나의 입가에 웃음을 남겼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고운 마음씨가 나와 이웃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 사실이 긴 여운의 미소로 이어졌다.

  누구나 선물을 받고 나면 즐겁고 행복해진다. ‘Pay it forward’라는 말이 있다. 어떤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지급한다는 뜻이다. 이런 선행이 잔 물결(ripple effect) 처럼 전달된다면 행복의 바이러스가 세상에 넘칠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낙원이 될 줄로 믿는다.

  찬란한 2022년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이 밝아온다. 고요한 아침의 문이 열린다. 내 남은 삶이 얼마가 남아 있을지 몰라도 누구든지 나를 만난 사람은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래야 나도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잿빛 하늘도 오늘은 밝아 보인다. 비가 내려도 좋다. 풍족한 느낌으로 가슴을 채운 아름다운 오늘은 복되고 값진 하루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잊고 살던 행복의 바이러스가 내면의 세계를 들춰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 마음속에 갇힌 맑은 영혼들이 무지개로 피어나 새로운 행복과 사랑의 흔적을 남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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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와 샌디 김 평 화 한국에 온 지 6개월, 우리 부부는 손녀의 돌잔치를 위해 남편까지 이곳에 와있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내가 쓰던 방에 널려있는 소지품과 물건들을 가방에 넣으며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그동안 예쁜 손녀를 출산한 딸을 잠시 도와주기 위해 와 있었다. 루비와 샌디는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흔들면서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있다.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았나 싶다. 처음에는 루비와 샌디는 함께 하와이로 같이 가기로 하고 수속을 다 받아 놓은 터였다. 딸은 사위가 일 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작가 안상선 수필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안 상 선 눈부신 현대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넘나들며 사람들은 건강에 관해 많은 관심을 둔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염색체 변형을 이용한 선천성 질환의 근본적인 치료와 예방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의학의 도덕성과 윤리관에 대한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의 초조하고 마음 졸이는 나날들이 있는가 하면, 불법으로 사람의 장기를 채취하여 이를 매매한다는 외국기사를 접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내가 평생 몸담아왔던 신...

협곡에서 본 미소 [1]

작가 이숙이 

협곡에서 본 미소 이숙이 돌산이었을까? 흙으로 빚어진 바위였을까? 비와 바람과 오랜 세월이 협곡을 만들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놓아 희귀한 모양이 되어 있다. 구불구불 갈라진 틈새로 태양 빛이 스며들 때 프리즘 작용의 신비로운 색상과 모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갈라진 바위틈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는 위로 향해 젖혀져 있고 카메라 들어 올린 두 팔도 위로 뻗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진 무늿결 바위 모양에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많은 관광객이 비좁고, 조금은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한 발...

그리운 봉선화 [1]

작가 정순옥 수필가 

그리운 봉선화 蒑池 정순옥 봉선화. 왜 이리 고향의 봉선화가 보고 싶은 걸까? 내가 고향에 두고 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요즈음도 눈 감고 고향 생각을 하면 봉숭아가 터지고 눈 뜨고 숟가락을 만져도 따다닥 터지는 소리로 변한다. 손을 살짝이라도 대면 씨방을 터트리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봉선화 생각뿐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재미동포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를 앙다물고 살아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씀 따라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 힘의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