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의 눈물

조회 수 1428 추천 수 2 2017.02.17 12: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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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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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트에서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강으로 떨어지는 온천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살포시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은하수 옆으로 별들이 쏟아진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는데 나뭇잎이 후두둑 내 얼굴 위로 떨어진다.
  아무런 시설 없는 노천의 온천탕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주어보니 유황 냄새에 절었는지, 다들 시들고 거무튀튀한 잡티가 끼어 있다. 나뭇잎에는 뭉글한 슬픔 같은 게 묻어 있다.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가슴이 저릿해진다. 대답할 말이 없다. 생수는 없고 대신 유황 물 한 모금 마셨다.
  잠들어 있는 친구 옆에 살포시 누웠다. 잠은 안 온다. 오늘 아침 친구랑 일박 이일로 짧은 여행이지만 이곳에 왔다. 레이크 이사벨라 근처 세쿼이아 국유림에 있는 사설 온천이다. 산바위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곳, 도회지에서 사라진 별들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때로 내 삶에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온몸을 뜨거운 물속에 담그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향기를 맡을 기회가 되어 이곳에 오게 된다.
  아침에 출발했다. 가을이 한창 여물어가는 즈음, 잿빛 구름이 드리운 하늘이 여행하기 좋은 날이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곳에 왔는데도 내 기억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가는 도중에 지피에스의 도움 받았다면 실수가 없었을 터인데, 구술로 받아 적은 새로운 길을 따라가다 방심한 결과였다. 항상 문제가 생긴 뒤 돌아보면 방심이란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 그만큼 나는, 내 생각에만 의지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

 온천을 찾아 올라가는 길 양옆에 도열해 있는 산을 계속 바라다보았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줄기이다. 산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런 속살에 작은 돌이 꽂혀있는 등성이, 그런 등성이에 드문드문 다 말라 창백한 풀잎을 안고 있는 또 다른 등성이, 좀 더 높은 산에 드문드문 짙은 초록빛을 띤 나무나 돌이 있는 산, 어떤 산은 온 산을 검푸른빛이 뒤덮고 있는 산, 또 어떤 산은 켜켜이 깨시루떡처럼 흐르는 시간의 변화를 담고 있는 산, 어떤 산은 부드러운 기암괴석이 온화하게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산 또 어떤 산은 날카로운 뾰족함을 드러내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산, 그리고 또 어떤 산은 산 이마에 하얀 눈을 일 년 내 담고 있는 산, 산의 모습을 보노라면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일까.


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느 시름과 긴 한숨이,  누구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렸을까. 어느 곳의 비가 홍수가 되어 얼음이 되고 어느 빙하가 깨어진 바위틈에 흘러들어 자갈돌을 만들었으며 어느 자갈돌이 흙이 되어 비를 안았을까. 어느 흙에서 어떤 생명이 탄생했을까. 바다가 상전이 되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별이 탄생하고 사라졌을까. 내가 흘린 땀방울, 엄마가 흘린 눈물, 우리가 흘렸던 한숨들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어있을까.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억겁의 세월이 흘렀고 또 시간이 멈추는 태고의 모습이 있는 산, 그곳에 별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흐르는 시간은 흘렀다 해도, 시간이 멈춘 그곳에 산은 산으로 남아있고, 강물은 짙은 초록빛으로 흐르고 있다.

 커다란 산바위틈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흐르고 있다. 신기하다. 무심하고 연한 갈색을 띤 산바위 옆구리를 뚫고 온천물이 흘러내린다. 가장 연약할 것 같은 물이 가장 단단할 것 같은 바위를 뚫은 것이다. 바위가 깨어지는 순간 바위는 울었다. 그 아픈 옆구리의 상처를 유황이 섞인 뜨거운 물로 밤낮없이 치료하고 있다.
  이곳 주인에게는 화수분(貨水盆)의 물이 되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 물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이 물소리는 조선의 송도삼절(松都三絶)인 황진이의 박연폭포 소리를 부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바위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곳에서, 온몸을 담그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인걸이 가고 물이 흐르고 오늘이 또 지고 있다. 은하수가 흐르고 별들이 쏟아지는 이곳에 원시의 하늘을 보고 깊은 숨을 들이킨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 추위가 몰려온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눈을 감고 온천물이 떨어지는 소리나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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