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드라의 깊은 밤

조회 수 6678 추천 수 1 2014.12.21 08: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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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툰드라의 깊은 밤

                                                                                                                                                                                정 덕 수

 

  알래스카에는 3천만 개의 호수와 3천 개의 강이 있다. ‘웅대한 대지’라는 뜻인 알류트족의 언어 알리야스카가 변형되어, 알래스카로 부르고 있다. 겨울철 툰드라의 에스키모는 과거 개썰매를 대신하여 스노우머신이 교통 운반이 되었고, 사냥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장비다.
  어린 시절부터 스노우머신에 숙달된 알래스카인들은 웬만한 고장은 직접 수리하고 시야가 트인 강에서는 시속 70마일 이상을 달리는 선수급 운전자들이다. 개썰매를 타는 사람들이 개들을 재촉할 때 머쉬! 머쉬!(mush)하며, 그들을 머숴(musher)라고 부르고 스노우머신은 아이언독(철견 또는 무쇠개)라고도 부른다.
  유픽(Yupic) 에스키모 지역의 중심지 베델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 툰드라 벗어나면서 첫 번째 트리스태프(Mt, three step)산을 시작으로 타이가의(Tigaie) 산악지대인 길벅(Gilbuck Maun') 산맥이 펼쳐져 있다. 전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산과 자연 그대로의 숲이 펼쳐진 이곳은 간혹 사냥하는 에스키모인이나, 돈 많고 모험심 있는 백인들이 경비행기를 전세 내어 찾아오는 곳, 그야말로 인간의 발자국이 드문 곳이다.
  3월 말이다. 나와 피터, 그리고 에스키모인 존의 스노우머신(snow machine) 3대가 끝없이 펼쳐진 툰드라의 설원을 질주하고 있다. 앞서 가던 라이더(rider) 존이 스노우머신을 멈추자 뒤따르던 우리도 스노우머신을 일렬횡대로 세웠다. 가열된 엔진을 식히려 보닛을 들어 올리고 각자 스노우머신 뒤에 매달린 사냥용 짐들이 온전한지 점검했다.
  우리는 트리스태프산에서부터 2박 3일의 사냥 겸 캠핑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수확 없이 우리가 사는 베델로 돌아가는 중이다. 아직도 대지는 꽁꽁 얼어있고 겨우내 내린 눈도 그대로 쌓여있다. 이때쯤이면 일부 겨울잠에서 일찍 깬 곰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 눈 덮인 산야를 헤맨다. 하지만 눈에 찍힌 발자국이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사냥꾼에게 희생되는 수가 종종 일어난다.
  라이더 존이 뭔가 이상한지 또다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각자의 짐을 점검시켰다. 존이 그가 자식처럼 아끼는 라이플이 없어졌다고 했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한다. 피터와 나는 새것으로 구입하자고 했지만, 존은 혼자라도 끝까지 가겠노라고 고집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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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피터는 잃어버린 라이플을 찾기 위해 오던 길을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일하는 곳에서 근무자와 교대를 해주어야 하기에 머리가 잠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혼자 간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만약 스노우머신이 고장 혹은 사고나 악천후를 만나 고립되어 길을 잃어버리면 치명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기본적인 위험성 이외 예기치 못한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자 장거리 스노우고(snow go. 스노우머신을 타는 것)는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잠시 작별하기로 했다. 그동안 많은 툰드라의 야전 경험과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라이더이고, 근무지로 돌아가는 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또한, 나의 썰매에는 캠핑 장비와 비상식량이 가득 실려있다. 무엇보다도 근무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가 걱정되었다. 이유는 내가 근무지에 도착해야 교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멀리 있는 나무 하나를 주시했다. 아주 멀어 작게 보이지만 설원에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쉽게 눈에 띄었다. 며칠 전 지나올 때 본 전나무이리다. 알래스카주(州)를 대표하는 나무답게 황량한 설원에 우뚝 서 있어 나의 첫 번째 이정표가 되었다. 한국어로 “전나무여. 혹은 소나무여. 언제나 푸른 네 빛”으로 시작하는 오! 크리스마스트리의 주인공 나무를 향해 질주한다.
  


  자작나무는 알래스카주(州) 나무가 아니지만, 알래스카의 가을은 이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황금빛 노란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인다. 단풍이 극에 달할 때는 전나무는 침엽수의 초록과 어울려 숨 막히는 장면을 연출한다. 고흐가 이 순간을 여러 면으로 잡았고, 러시아의 문호들의 글에도 이 자작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 여름의 자작나무는 바람을 타고 앞뒤 면의 색이 다른 초록을 팔랑거리며 멋을 부리고 그때부터 나의 마음과 머릿결도 자작나무처럼 생동감이 넘쳐난다.
 또 있다. 오래전 불붙이기용으로 이용되었던 껍질은 지금도 야전에서는 불쏘시개로 자주 사용한다. 하얀색의 껍질은 숲 속의 밤을 밝혀주고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아 종이 대신 사용했고, 팔만대장경 경판 재료도 쓰였다. 또한, 한국의 고로쇠나무처럼 봄이면 건강수를 분비한다. 특히 항암에 특효가 있는 상황버섯과 차가버섯이 이 자작나무를 통해 생산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버섯들이 기생하기 시작하면 이 나무는 빛을 잃다가 하얗게 변하며 죽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정말 전나무는 인간과 자연을 위한 나무이며, 숲의 여왕이란 칭호를 갖고 있다.
  나는, 어둠이 오기 전까지 전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일차 목표로 정했다. 그다음 목표는 그곳에 도착한 후 결정하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 전나무까지 도착하였을 때는 툰드라의 어둠은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아직 눈은 안 오지만 낮게 깔린 구름과 어둠으로 변해가는 설원은 지평선과 하늘을 뒤섞어 나의 시야를 좁게 했다. 전나무에서부터 베델까지는 대략 4시간은 걸릴 것이다. 중간에 있는 쿠웨슬룩(Kwethluk) 빌리지까지만 가면, 그다음부터 베델까지 가는 길은 손바닥 보듯 잘 안다. 그곳에는 오랜 친구인 찰리가 살고 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쿠웨슬룩까지가 중요하고 위험한 구간이라 잠시 걱정이 앞선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스노우머신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1차 목표인 전나무를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은 완전한 어둠으로 바뀌어있다. 대신 스노우머신의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열심히 츄레일(trail)을 따라간다. 이대로라면 쿠웨슬룩에 순조롭게 도착할 것 같다.
  약 1시간 정도를 달리다 잠시 쉬면서 소변을 보기로 했다. 소변을 보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 한쪽의 구름이 조금씩 열리면서 달이 잠깐 모습을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둔기로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어이쿠! 3월의 초저녁 달은 베델 쪽에 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전나무를 통과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르게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온 것이다. 참담한 심정 속에서도 달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싶다. 이곳에서 쉬지 않았다면, 또 달이 그 구름 사이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멀고 먼 바닷가 쪽으로 가서 툰드라의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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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은 GPS나 휴대폰이 없었다. 더군다나 에스키모와 함께 툰드라(tundra)를 많이 통과했지만, 그들은 나침판을 지니거나 사용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에스키모인들은 지도와 동서남북이란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해가 동에 뜨고 서로 진다는 진리, 그들에게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북극권 안에는 겨울에 해가 없거나 여름에는 종일 하늘 한쪽에서 맴도는 곳이 알래스카이기 때문이리라.
  에스키모인들은 경험과 자연스럽게 전수받은 지식과,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물길과 지도에 없는 위험한 곳을 본능적으로 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위치를 추정하고 그들에게 들은 것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동·서가 아니고 베델로 가는 츄레일을 찾는 일이다. 이 길은 에스키모가 스노우머신을 타고 지나면서 만들어진 안전한 길이고 생명인 츄레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츄레일은 눈이 오면 순식간에 없어지고 여름에는 지형 자체가 바뀌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 에스키모인들은 그 위로 새롭게 만들어 사용한다. 간혹 길 잃은 트랙을 따라 엉뚱한 곳으로 가는 수가 있기는 하다.
  연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영지에서 출발할 때 연료 탱크에 가득 채웠지만 더는 보충 연료가 없다. 이미 길을 잘못 들어 그만큼 돌아갈 것까지 계산하면 빠듯하다 싶었다. 만약 다시 길을 잃는다면 연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 하늘에 눈이라도 오면 큰일이라 싶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스노우머신의 속력을 높였다. 스노우머신을 타면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전신 운동이 되고 30분만 지나면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나무토막이나 작은 턱이라도 치고 나가면 스노우머신은 하늘로 날아가 전복되면서 타고 있던 사람은 크게 다칠 수 있기에 그렇다. 츄레일을 따라가는 것은 길도 중요하지만, 장애물이 없어야 안전하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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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노우머신과 하나가 되어 어둠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몸은 땀으로 젖었고 눈은 충혈되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4시간가량 달렸을 때 먼 곳에서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갈망했던 지역 쿠웨슬룩(Kwethluk)이다.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안도의 긴 숨을 내쉬게 된다. 열 받은 스노우머신를 쉬게 한다. 그리고는 눈 위에 누워 허리를 풀며 갈증을 달래려고 천지에 깔린 눈을 한주먹 먹는다. 잠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쿠웨슬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스노우머신의 앞머리에 박힌 커다란 외눈 라이트는 나의 마음처럼 청명하고 밝은 불빛을 뿜어내는 것 같이 보여 안심되었다.
  쿠웨슬룩은 뱀이 지나간 자국처럼 굽이굽이 도는 쿠스코윔(Kuskokwim) 강변이고 에스키모 마을 중 한 곳이다. 쿠스코윔강(Kuskokwim River)은 알래스카에서 유콘강 다음으로 큰 강으로 유픽(Yupik) 지역 툰드라의 한복판을 흐른다.

 

푸른 강 한 줄기 
마을을 감싸고 흐르니
긴 여름의 강 마을은
일마다 그윽하구나.
(강촌. 두보)

 

  두보(杜甫)가 본 강촌은 중국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물 색깔만 다르지 쿠스코윔 강변 에스키모 마을의 여름 풍경이라 싶다. 대부분 직업 없는 이곳 에스키모인들은 주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하며 여름철에는 고기잡이로 소일한다.
  쿠웨슬룩에도착했다. 찰리의 집은 강변 언덕 위에 있다. 나는 강바닥에 스노우머신를 세우고 찰리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다 꺼져 있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에는 찰리와 그의 식구들은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연료 게이지를 내려다보며 친구를 깨울까 아니면 그냥 둘까를 생각했다. 여기부터는 베델까지 강줄기를 따라가면 된다. 최고 속력으로 간다면 사오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남아 있는 연료로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연료 파는 집도 이미 문이 잠겨 있다. 잠에 빠진 찰리의 식구들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찰리의 집을 등 뒤로 하고 외롭고 힘든 여정의 마지막 스노우고를 다시 시작했다.
  강줄기를 따라 스노우머신를 총알 같이 몰고 나갔다. 벌써 10년째 근무하고 있는 직장의 정경이 눈에 어른거린다. 근무지에 도착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스팀벳(steam bath)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거리 스노우고 후 내가 즐기는 스팀벳은 밀폐된 공간에서 호박돌을 장작불로 달구어 그 위에 물을 부어 생기는 김을 이용하는 에스키모 전통 사우나다.
  핀란드식 사우나가 유명하지만, 핀란드땅에 백인들이 거주하기 훨씬 이전에 에스키모인들이 먼저 정착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에 건강을 지키는 방법으로 사우나를 선택했다. 현재의 알래스카 에스키모의 사우나 방법과 같다. 또한, 에스키모와 같이 우랄 알타이어 사용하기에 원뿌리는 몽골리안으로 추정한다. 빙하기 몽골에서 출발하여 북극권 주변에 정착한 에스키모와는 다르게 그들은 기원전 천 년경, 우랄산맥 서쪽으로부터 이주를 시작하여 스칸디아반도에 정착한 핀족(族)이다. 훗날 그들은 백인과 썩이며 핀족의 이름을 따라 나라의 이름을 핀란드라 했고 사우나도 발전됐으리라.

 

 

 

  직장과 사우나 생각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한참 달리고 있는데, 스노우머신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속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곤두서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가능하리라 믿었던 연료가 떨어진 것이다. 버럭 겁이 났다. 나는 헐떡이는 스노우머신를 가까스로 나무 숲에서 가까운 강기슭까지 몰고 갔다. 혹시나 여유분의 기름이 있나를 다시 확인해보지만 없다.
  툰드라 야전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손도끼를 꺼내 들고 전나무 가지를 쳐내고 죽은 나무들을 빠르게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모닥불을 피운다. 생존의 달인 에스키모인들도 이런 상황에서 수없이 죽거나 동상으로 손발을 잃는 수가 허다하다. 얼마 전, 누낙픽쳐(Nunapitchuk)에 사는 한 에스키모가 집까지 스노우고 20분을 남겨놓고 연료가 떨어져 동사했다. 또 다른 에스키모는 폭설에 실종되었다가 3일 만에 구조되었지만, 동상으로 손을 잃었다. 그나마 목숨을 구한 것은 낚시캠프(fishing camp. 여름철 에스키모들이 생선을 자르고 말리는 움막)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모닥불이 환하게 타올랐다. 코펠에 눈을 담아 커피 물을 만들어 끓인다. 텐트가 있지만 혼자 텐트를 치기에는 너무 크고, 나는 이미 지쳐 있다. 뜨거운 커피와 말린 연어를 먹는데, 숲 속에서 야생동물의 푸른 안광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순간 몸이 오싹 거리며 소름이 끼쳤다. 즉시 권총을 배에 차고 라이플을 들어 하늘을 향해 공포를 쏘았다. 거대한 곰도 한 방에 쓰러뜨리는 강력한 라이플이라 굉음은 고요하고 조용한 밤하늘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포식 동물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이고, 혹 주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리라.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자 숲 속에서 부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나를 움츠리게 했다. 다시 모닥불에 나무를 더 넣고 나무 타는 소리와 불길에 신경을 집중한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모닥불에 온기가 나의 몸에 퍼지자 피로가 몰려왔다. 눈에 보이던 불길이 희미해지며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 동안을 잤는지 모르지만, 한기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꺼져가는 모닥불 속에
또 다른 나무를 넣는다. 불똥이 튀면서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며 다시 살아나는 불 속을 작대기를 이용해 이리저리 들치며 불길을 도와준다.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불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는 생명을 보는 것 같다. 우주의 탄생도 불을 동반했고, 불타는 별들도 생명의 근원을 우주공간으로 퍼트린다. 그리고 우주가 수명을 다할 때는 새롭게 태어날 별들을 위해 폭발하면서 찬란한 빛과 불기둥 속에 그들의 씨를 남기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불도 꽃같이 피우고지고 씨를 남기게 된다. 불꽃은 소리 내며 활활 타오른다. 인간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은, 지극히 여유롭게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피터와 존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이렇게 연료가 다 떨어져 혼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을 알기나 할까. 차라리 그때 같이 갔어야 옳은 것은 아니었을까 후회가 든다. 또한, 근무지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료는 아마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래스카에 불꽃초(fire weed)라는 야생화가 있다. 분홍색의 꽃은 여름의 초록과 어울려 알래스카의 온 산야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알래스카에서 가장 강했던 아사파스칸(Athabaskan)인디안부족 인디언들은, 여름철 불꽃초가 만개하면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고 말한다. 불꽃초란 이름은 분홍꽃이 떨어지면 초록의 꽃대와 잎이 불타듯이 진홍색으로 변한다 하여 붙여진 가을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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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꽃 떨어져 여름은 가고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전나무 녹진 옷 황금 자작 잎 사이로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은데)
그리운 님 행여 올까 진홍으로 다시 피니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며 떠난 임 명월 되어 오시네.

 

                                            -가을과 불꽃초. 박목월, 본인의 화답 시                                                                                                                  
 
  또 있다. 알라스칸(Alyeska)에 흐드러지게 피는 화이어위드가 주(州)꽃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랑받고 친근한 야생화지만 아니다. 알래스카 주(州)꽃은 물망초이다. 많은 일화와 전설을 갖은 유명한 꽃이지만 실제로 그 꽃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야생에서는 더욱 보기 힘들다. 영화 속에 타리아비니가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꽃 같은 여인이 디날리의 가을을 지나면서 들려준 노래 (날 잊지 마라. 내 맘에 맺힌 그대여….)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 귀에 자연의 소리와 또 다른 도시의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긴장한 나는, 방한모를 벗고 일어나 귀 기울인다. 하지만 모닥불이 내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모닥불에서 벗어나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한다. 무엇인가 들려 온다. 아주 멀리서 오는 문명의 소리, 스노우머신이다. 얼마나 먼 곳인지 몰라도 분명 이쪽으로 오고 있다.
   나는 모닥불에 나무를 더 넣고 불길을 높인 다음 손전등을 들고 강 가운데 쪽으로 걸어나갔다. 스노우머신 소리는 더 가까이 오고 있다. 먼 곳에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손전등을 휘두르며 "어이! 어이!" 하며 소리쳤다. 라이더에게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분명한 것은, 먼 곳의 불빛의 방향이 이리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나를 발견하고 그들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리다. 가슴이 마구 뛴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반가운 것도 처음이다.
 
  정지된 것 같은 순간이지만, 두 개의 외눈 불빛은 스노우머신의 소음과 함께 다가오고는 내 앞에서 멈춘다. 고글과 마스크를 벗는 라이더는 피터다. 또 다른 사람은 얼굴이 익은 에스키모 젊은이다. 서로 포옹한다. 같이 모닥불가에 갔다. 밝은 불빛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에스키모 청년은 "오~ 정, 오랜만이다."라고 했다. 그의 이름이 빨리 생각나지 않는다. 옆에 있던 피터가 내 귀에다 “존은 총을 찾았지만, 연료 때문에 집으로 보냈어. 널, 잊어버리고 혼났어. 걱정되어 혼났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 알았어. 저 친구 이름은 샘이야.”
  나는 커피와 말린 연어를 샘에게 주고 샘의 이야기를 듣는다. 샘은 유콘강의 거룩한십자가(holy cross)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 코스쿠윔강에서 베델까지는 스노우머신을 타고 10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샘도 혼자서 그 먼 길을 왔다가 베델 근방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터의 모닥불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피터와 샘은, 나를 찾기 위해 몇 시간 이 일대를 헤맸다는 것이다. 샘은 비상식량은 물론이고 야영장비도 없었지만, 다행인 것은 연료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나와 피터, 그리고 샘은 서로에게 구세주라고 불렀다. 이제 베델까지 갈 수 있는 충분한 연료가 있고, 여기서부터의 길은 서로가 잘 안다. 나는 스노우머신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짐을 챙겼다. 남은 비상식량 모두를 쓰러진 나무 위에 올려놓는다. 오래전부터 숲 속에서 몸을 숨기며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동물에게 근사한 식사가 될 것이리라.


  다시 눈이 오기 시작한다.
  스노우머신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가볍게 내리는 눈은 차가운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 주고, 사나이들의 가슴 속에도 정열의 꽃이 되어 내려앉는다. 샘은, 눈 내리는 밤하늘을 향하여 목을 길게 빼고 늑대 울음 같은 인디언의 함성을 질러댄다. 피터와 나도 합세하여 고함을 질러댄다. 이중주의 야성이 밤하늘로 퍼져 나간다. 나와 피터는 헬멧을 썼고, 샘은 물개 가죽으로 만든 방한모를 쓰고 고글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피터가 핸들을 틀자 스노우머신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서서히 출발했고 샘과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잠시 후 가속이 붙은 세 대의 스노우머신이 툰드라의 깊은 밤을 헤치며 질주하기 시작한다.
  숲에서 나온 여우가 사라져 가는 스노우머신의 눈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금자

2017.12.11 09:32:04
*.119.80.80

우와~~짝짝짝 !!!  알래스카의 밤길.  무섭기도하고 처음 접해보는 글이라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기름이 떨어졌을 때 그 장면을 눈에 보이는 듯 써 내려가신 글 솜씨. 멋지십니다.

겨울 풍경과 여름에 피는 아름다운 꽃도 감상 잘했습니다.

알래서카의 설원을.  설명을 잘 해주셔서 다녀온  듯  본 둣이 아주  멋진 글 잘 읽고 나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금자

2020.07.18 14:14:34
*.147.165.102

몇 년 만에 다시 들어와 선생님의 툰드라의 밤 다시 읽었습니다.  몇 년 전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한데

그 글 이야기를 재밋게 해 줬더니,  이곳 사람들은 신기하다며 " 유투부 " 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재밋다고들 했습니다.  그동안 알라스카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나해서 다시 와 보니 아직 그대로 이었습니다.

선생님 또 재미있는 그곳 겨울이야기를 또 올려주세요.   이 글 읽으시면 이곳에 댓글로 답 보내주세요.

들어온김에 낚싯꾼 할머니'  오쏘 곰"  다시 읽고 나가겠습니다.

좋은 글,  기억에 오래 남을 글, 올려주세요.

글재주가 많으신데 전혀 안 올리셔서 아깝네요.  혹시 책 내셨나요?

책 내셨으면 " 책 재목, 출판사 이름 올려주요.  사서 보겠습니다.

종종 들리겠습니다 안녕히계세요.  이곳에 소식 올려주세요.

   

이금자

2020.08.01 13:45:43
*.147.165.102

그냥 갑니다.

좋은 글 못 보고 그냥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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