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야(除夜)의 편지
김붕래
언젠가는 한 번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를 패러디해서 <가난한 늙은이의 노래>란 제목의 시를 써보고 싶었는데 금년에도 그 시를 못 쓰고 빈손으로 한 해를 보냅니다.
詩란 것은 가난한 사람은 쓸 수 있지만, 마음이 황폐한 늙은이는 쓸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대책 없이 늙어가며 길을 잃고 저만큼 통금 딱딱이 소리를 듣습니다.
하루가 저물매 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다 함에 귤 향기 더욱 멀리 퍼져나간다는 채근담의 말이 허사인가? 아니면 닫힌 문 앞에 매달려서 이미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내가 보지 못하는 건가? 금년 한 해도 情이 그립고 삶이 팍팍했습니다.
새해 신호등은 희망과 함께 늘 초록색일 것을 기대하며 신경림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愚川 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