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조회 수 11665 추천 수 5 2015.01.02 12:01:49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박상미(문화평론가)

 

  그가 잠든 지 64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의 묘소를 찾고 그의 책을 읽는다. 1946년, 전후 독일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미륵은 독일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자마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신문에 실렸다. 독일인들은 지금도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만큼 이 책을 아낀다.


   독일의 뮌헨. 하이델베르크, 뷔르츠부르크, 뮌스터, 그리고 중국 상하이….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이미륵이 밟은 여정을 지난 3년에 걸쳐서 따라 걸었다. 이미륵(1899~1950)의 생을 연구하고자 계획한 기행은 아니었지만, 그가 머물렀던 도시에 들어서면 환영처럼 이미륵이 보였다. 그의 책에서 읽은 문장들은 선명하고 섬세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과 TV드라마 속에서 만난 장면은 가는 곳마다 영상으로 되살아났다. 독일이 사랑한 한국인, 완전한 사람 이미륵을 만나러 다시 뮌헨으로 가는 길.

 

                  ‘일생 다하도록 바다 서쪽 땅을 떠돌았어도/예의바른 태도와 문필활동은 모두 온전하였지/
                 지인이며 벗들이 작은 비석이나마 잊지를 않아/지금 새 묘역에 단장되어 옛 이름 전하고 있네.’

                                                                      (고병익의 한시 번역)

 

  이미륵은 뮌헨 서쪽 그래펠핑 신묘지공원에 잠들어 있다. 뮌헨 마리안 프라츠에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한 번 갈아탄 뒤 40분 후에 도착한 ‘평화의 전원’(Friedhof)역, 독일식 묘지공원은 아담하고 예뻤다. 묘소 번호 145-147, 그곳에 이미륵이 잠들어 있다. 지구 반대편 유럽의 묘지공원에서 한국 풍수대로 가꾼 이미륵의 묘소를 발견하자, 그의 인생 역정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흘러가며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반듯하고 기품 있는 비석이 고인의 성품을 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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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륵 박사가 공부한 하이델베르크대학. 건물 뒤로 2차대전 때 무너진 고성이 보인다.


   독일에서 찬사와 사랑을 받았던 한국인 이미륵

   그가 잠든 지 64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의 묘소를 찾고 그의 책을 읽는다. 1946년, 전후 독일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한국인 이미륵은 독일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독일인이 읽어도 아름다운 문체와 감동적인 이야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학자들의 눈에도 그의 문장은 탁월했기에, 외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워했다. 독일 본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인 후베 박사는 과거 KBS와 인터뷰에서 “외국인이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한독 문화교류에 큰 상징이 될 만한 분이다. 그의 문장들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고 흐름이 매끄럽다. 단어 선택도 아주 적당하고, 단순하지 않고 재미있다. 내가 한국말로 소설을 쓴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렇게 쓰지 못할 것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국은 평생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혹독한 외로움과 죽음을 오랜 시간 동안 알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뮌헨까지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한학을 배웠으며, 풍습에 따라 조혼하여 1남1녀를 두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권유로 상하이를 거쳐 1920년에 독일로 망명하였다.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분도회 수도원에서 8개월간 독일어를 배우고,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학부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의학부에서 공부했으며, 뮌헨대학교 생물학부 동물학과로 전학하여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뮌헨에서 서예 지도와 번역 일을 하였고, 문예지 ‘Dame’에 <하늘의 천사>를 독일어로 발표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에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를 출간했을 때 초판이 매진될 정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독일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외국인이 독일어로 쓴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신문에 실렸다. 한 잡지는 ‘올해의 가장 훌륭한 책’으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꼽았다. 독일인들은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만큼 이 책을 아낀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았고, 그가 죽은 뒤에도 BBC 등 유럽 방송들은 이미륵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당시 책을 펴낸 피퍼출판사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만 출판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피퍼출판사의 사장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압록강이 흐른다>는 내가 발간한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였습니다.’

 

  이미륵의 문장을 타고 독일에 흐르는 압록강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어릴 적 황해도 고향의 토속적인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꿀을 훔쳐 먹은 일, 벽장 깊숙이 숨겨놓은 비상약을 먹고 실신한 일, 이웃 아이들과 달밤에 벌이는 싸움박질…. 선비인 아버지가 선생을 모셔와서 연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신식 학교에 가서 자연법칙과 링컨을 배우는 급변기의 교육을 받은 이미륵. 논어와 맹자를 배우다가 링컨의 전기를 두고 조선 선비인 아버지와 주고받는 대화는 독일인의 눈에도 무척이나 재미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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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 대표 이영래 씨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이건 사람일 테지?”

아버지가 권하는 술 석 잔을 삼키고 취한 아들은 아버지와 주거니 받거니 농을 하고, 못 말리는 척 미소 짓는 어머니가 함께 만들어내는 한밤의 술자리 풍경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지만, 그의 운명은 3·1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급변한다.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을 피해서 고향으로 도망쳐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단호히 말한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엔 유럽에 갈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청년 이미륵은 아내와 어머니, 1남1녀를 남겨둔 채 압록강을 건넌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둡고 진지했으나, 저쪽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압록강은 흐른다> 전반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그 집 정원에는 꽈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빨간 열매가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 서 그렇게도 많이 보았고, 또 어렸을 때 즐겨 갖고 놀았던 그 식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실제로 와 있는 것 같았다.” <압록강은 흐른다> (전혜린 옮김. 범우사)

  독일에서 혹독한 외로움을 견디며 치열하게 살던 미륵은 고향에서 온 첫 소식을 받는다. 어머니의 부고였다. 글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나는 동안의 여정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겪는 숨막히는 상황까지도 이미륵의 성격처럼 잔잔하게 서술한다.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문장은 가슴을 울린다. 그러나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독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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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륵을 ‘유일무이한 친구’라고 할 만큼 절친했던 게오르크 가브리쳅스키와 함께.(1943) |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제공


  독일인들이 이미륵을 사랑한 이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의 국민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 속에서 정신적 공황을 겪을 시기였고, 나치 정권이 자신들의 사상에 어긋나는 서적들을 모조리 불태운 뒤였기에 독일 국민들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문학작품에 목이 말랐다. 그때 이미륵의 작품은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위안이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청년의 여정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동양의 나라 한국의 독특한 문화와 서정적인 세계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동양의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미지의 나라 한국의 이야기는 마치 환상 동화처럼 읽히기도 했다.

  이미륵은 독일어로 작품이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에 소개한 최초의 한국 작가이자 교수였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 및 한국학을 가르쳤다. 독일의 대표적인 동양학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가 그의 제자다. 훌륭한 작가이자 선생이었던 그를 독일인들은 ‘완벽한 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완전한 작가이자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
  2차대전 당시 반나치 비밀지하조직인 ‘백장미’라는 저항단체가 있었다. 1943년 2월 17일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는 뮌헨대학교 광장에서 백장미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다. 결국 남매는 2월 22일에 처형됐다. 그때 뮌헨대 총장이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다.

  이미륵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정규화 박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장미 사건으로 투옥, 사형당한 숄 남매를 이미륵 박사가 면회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 뮌헨대 총장 쿠르트 후버 박사를 면회 가서 식료품을 전하고 가족들을 찾아가서 남매의 교육문제를 상의하고 위로하신 건 사실입니다.”(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당시 반나치 운동을 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족과 접촉하는 것조차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999년에 방영된 수요기획에 출연한 후버 교수의 딸 바이스는 뮌헨대 백장미 기념관의 팸플릿에 후버 교수를 소개하는 글을 이미륵이 썼다는 증언을 했다. 백장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2006년 <쇼피 숄의 마지막 날들>(마크 로테문트 감독)이라는 영화에도 등장한다.

영화의 한 장면. 형장에 도착한 한스는 단두대에 머리를 올려놓기 전에 감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다.

  “자유여, 영원하라!”

  나치 독재정권이 악명을 떨치던 암흑의 시대에 독일 전 지역에 전단지를 뿌리며 독재국가에 저항했던 이들을 이미륵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륵, 그는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이었고, 완전한 작가이자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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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펠핑시 묘지에 잠들어 있는 이미륵 박사. |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제공

 

  조국에 이미륵을 알린 사람들
  그는 독립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50년 3월 20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51세.

  고병익 박사(서울대 역사학과)가 이미륵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훗날 정규화 박사(성신여대 독문과)가 작가 이미륵을 평생 동안 연구하게 된 계기는 뮌헨대학교 근처에 있는 고서점 주인 로테 뵐플레 여사 덕분이었다. 뵐플레 여사는 동양인을 만나면 “덕행과 글재주가 훌륭해서 이곳 사람들이 존경하는 한국인 이미륵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1999년 뮌헨 괴테포럼에서 열린 이미륵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뵐플레 여사는 “영혼으로 말하는 사람, 그는 모든 이들의 모범이었다”고 그를 추억했다.

  따뜻한 인간 이미륵을 추억하는 이들은 많다. <이미륵 평전>(정규화, 박균 공저)에서 이미륵의 친구 게오르크 가브리쳅스키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3년 집이 폭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을 때, 집을 떠나려는 순간 이 박사가 집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이 박사는 친구의 생사가 불안해 폭격을 무릅쓰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나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진정한 귀족이다”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저자 전혜린은 1959년 뮌헨에서 이미륵을 발굴해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한국에 소개했다. 전혜린이 35년 늦게 태어났지만, 두 사람 다 이북이 고향이고 독일 뮌헨대에서 공부했다. 고병익 박사는 처음으로 고국에 이미륵을 알렸고, 전혜린은 처음으로 그의 책을 번역했다. 이후 정규화 박사는 평생을 바쳐 이미륵의 인생을 연구하고 그동안 수집한 이미륵 관련 자료 전체를 1994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한 생을 이국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이미륵의 일생을 잔잔하게 흐르는 압록강처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륵, 그의 가족 이야기
  이미륵과 함께한 뮌헨 기행을 마치면서 유가족 대표 이영래 선생을 찾았다. 독일방송에 처음 전파를 탄 최초의 한국드라마, SBS 창사특집극 <압록강은 흐른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TV드라마는 방송 특성상 드라마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서 작고하신 어른을 잘 아는 분들이 보기엔 불편한 점도 있었습니다. <이미륵 평전>에 정규화 박사가 정리한 내용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거예요.”

그리운 고향과 어머니 이야기는 글에 많이 나오는 반면,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하다고, 조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이미륵 박사는 우리 외할머니의 동생이십니다. 독일에서 재혼을 하신 적이 없는데 독일 여성과 재혼을 했었다는 기사가 잘못 나간 적도 있었지요. 평생 독일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말 못할 가족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독일로 망명하시기 전에 장남 명기(明起), 딸 명주(明珠)를 두셨습니다. 부인은 수절하다가 외롭게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어요. 해방 직후에 집안이 급속히 기울면서 남매는 아주 힘든 삶을 살았어요. 저의 외증조할머니, 즉 고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자손들과도 소식이 끊어진 거죠. 장남은 요절했고 딸은 소식이 끊어졌어요. 저희 외삼촌이 해방 직후에 남매를 찾아 나섰는데, 절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장남(명기)을 찾아갔대요. 그때 이미 병색이 짙었고 얼마 후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딸(명주)은 작은 은행 같은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는데, 20세쯤에 소식이 두절됐다고 해요. 이후 38선도 생겼고…. 만약 살아계시면 95세 정도 되실 거예요. 하지만 가족과 다름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평생 이미륵 박사를 연구하고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를 이끈 정규화 박사님이 돌아가신 뒤, 지금은 박균 회장님께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1999년부터 한국과 독일 양국의 문화교류 증진에 기여한 개인에게 ‘이미륵상’도 수여하고 있구요. 내년이 돌아가신 지 65년 되는 해예요. 독일에서 추모제가 크게 열릴 거예요. 독일과 한국에서 고인을 기억하고 그분의 삶을 조명해주시니 유족들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해마다 뮌헨 그래펠핑 묘지공원에서는 그의 기일에 이미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내년 65주년 추모제 때는 그래펠핑에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오늘도 압록강은 이미륵의 문장을 타고 독일까지 흐르고 있다.

 

                                                                                                      <글·사진 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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