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능선을 따라가라
이 주 혁
비가 갠 저녁, 앞산의 등고선이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하다. 학군단 유격 훈련으로 야간 산행을 할 때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산등성을 따르지 말고 8부 능선을 따라가라!”라는 교관의 명령이 생각난다. 어쩌면, 지난날의 나의 삶은 남보다 드러나기 위하여 산등성을 타려고 애써온 것 같다.
1984년, 이민 온 약사들이 미국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평가시험을 거처 약사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가주 한인 약사회를 중심으로 미국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가주 약사 면허를 소지한 몇몇 뜻있는 임원들이 자진하여 교수진이 되어 평가시험 준비반을 시작했다. 1차로 50여 명이 등록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어려운 직업으로 쪼들린 얼굴들이다. 그 당시에는 취업 조건도 없이 약사로서 이민을 허가해 주었지만, 약사의 자격을 인정하여 주지 않았고 자격을 위한 시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무작정 상경한 복남이와 복순이의 신세였던 우리다. 그러나 이제는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벅찬 기대로 녹슨 뇌세포를 씻으며 공부해 보려는 30∼40대의 늙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온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야간 수업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희망에 반짝이었다.
1975년 이민 와서, 나도 일 년여 공장에서 시간당 3불로 공돌이 노릇을 하다가 ‘사우스 다코다’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노르왁(LA 근교)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1시간 강의를 위하여 3시간 이상의 준비가 필요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배웠던 교과서와 참고 서적을 뒤적이며 강의 준비를 했다. 종일 약국에서 일하고 서둘러 문을 닫고 교통지옥에 시달리며 LA까지 올라가 밤 10시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가 가까웠다. 약사가 되고 싶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험에 합격하여 약사가 될 기회를 저들에게 주고 싶었다. 처음 시행하는 평가시험 준비반이라, 문제의 출제경향도 모르고, 시험 범위 또한 막연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찾아서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터라 자신의 열정에 빠져 힘든 줄 모르고 강의시간이 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런 열정에도 아랑곳없이 10시면 자리를 뜨는 몇몇 학생을 보며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성의를 다하여 가르치는데, 강의도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하며 상기된 얼굴에 실망으로 주저앉고 싶었다. 열정을 쏟아 붓는 만큼의 보상을 기대한 것이다. 밤늦게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 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이나 자식에 대한 아내로서나 어머니로서의 어쩔 수 없는 쫓김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나는 ‘열정의 맛’ 때문에 자신에게 취하여 나를 최고로 받들어주기만을 바랐다.
하루는 교실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열을 내고 가르치는데 모든 학생이 열의에 찬 눈으로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뒷좌석의 한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시계만 자주 바라보았다. 나는 강의 내내 맥이 빠지고 그 남자에게로 자주 시선이 갔다. 그래도 마저 한 사람까지 관심을 끌어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그는 끝내 끝날 시간만 기다리는 무표정이었다. 그날이 가장 힘든 날이었다. 허무감으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서 당장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아내를 대신하여 운전하여준 남편이었다. 나는 남의 형편을 살피며 배려하는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나타내려는 자기 욕심에 전심한 것이다. 모두가 추앙하는 정상 위로 우뚝 드러나서,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은퇴하여 삶의 정거장에서 뒤돌아보면 지난날은 열정만으로 앞만 보고 달려 운 힘겨운 삶이었다. 잠시 멈추어 20%의 여유를 갖는 삶을 생각해 본다. 남을 도와도 아직 20%를 덜 도왔다는 생각으로 하면 기대와 보상에 따른 서운함과 원망도 덜 할 것 같다. 자신을 위한 일에도 8활에 만족하면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며 남보다 드러나기를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에 자족할 수 있다면 삶은 더 즐겁고 풍요로울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다.
요즈음은 가끔 설거지를 도와주어도 한두 개 그릇을 남긴다. 어쩌다 설거지를 해주어도 “저 양반은 설거지 한번 안 해준다.”라고 푸념하는 여성 특유의 불평을 들을 때에는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해 주지 않았을 때 항상 쓰는 금성인의 말투인 것을 알면서도…. 어쨌든, 한두 개 남겨 놓으면 설거지를 다 한 게 아니므로 그 소리를 들어도 속으로 편히 웃을 수 있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산등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둠으로 가려진 8부 능선을 바라보며 8부 능선에 숨겨진 삶의 지혜를 깨닫는 황혼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