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 할아버지, 시인 오상순

수필 조회 수 4269 추천 수 1 2015.07.14 18: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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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초 할아버지, 시인 오상순
                                                                                                              
                                        임 문 자
 
  공초, 오상순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대학 일 학년이었다.
 그때에는 명동이나 종로에 음악 감상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대학생이 드나들었다. 말하자면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다방으로, 신청한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차 한잔을 주문하고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어도 무방하여서 돈은 없으나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던 대학생들이 많이 애용하였는데, 그 당시 ‘슬픔이여 안녕’을 쓰고 유명해진 프랑스의 젊은 작가 ‘사강’의 흉내라도 내 듯 음악 감상실에서 글을 쓰던 문학도들도 더러 있을 때였다.
 오상순 시인이 주로 계시던 곳은 명동에 있는 ‘청동 다방’이었다. 청동은 음악감상실이 아니고 그냥 다방이었으나, 오 시인을 만나러 오는 여러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바람에 분위기가 음악 감상실처럼 되면서, 그곳에는 오랜 시간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학생이거나 글을 쓰는 가난한 문학 지망생들이 많이 모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일은 장사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가끔 오 시인은 눈총을 받고 할 수 없이 장소를 옮기기도 하였으나 청동의 주인이 문학을 좋아하였든지, 아니면 사람이 좋았든지, 우리는 그분을 만나러 여전히 청동에 드나들었다.
 시인 오상순은 호가 ‘공초’인데, ‘빈 공간도 초월하였다’는 심오한 철학이 있을 법한 이름처럼 아무것도 그가 소유한 것은 없었다. 가족도, 집도 없이 서울에 있는 절에서 젊은 승려들이 쓰는 방에 끼어서 주무신다고 누군지가 염려하는 소리를 엿들었으나, 그러한 그의 처지가 공초, 오상순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다거나 태도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글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를 오래전에 언니의 국어책에서 읽었으므로, 오상순 시인은 낯설지가 않았는데 ‘첫날밤’이라든지, ‘아시아의 밤 풍경’ 혹은 ‘방랑의 마음’ 등 1920년대에 시를 쓰시던 공초를 나는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1960년에는 우리가 모두 대부분 가난하였는데 젊은이들은 그때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지성을 논하고 학문을 사랑하였으며, 때로는 가난한 지성이 내뿜는 매력 때문에 그 젊음은 멋스럽기조차 하였다. 나는 가난하지는 않았어도 그 시대가 뿜어내는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또 가난한 나의 친구들이 지니고 있던 우울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어떤 기성세대 문인은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퇴폐한 사상을 가진 것처럼 말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여전히 청동 다방에 드나들곤 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한때 결혼하여 부인이 있었는데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공초를 염려하는 친구들이 부인이 운영할 조그만 식당을 마련해 주었다. 공초는 매일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 자기 식당에서 술을 마셨는데, 당연하게도 마침내는 탕진하여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과 하루는 친구 시인들과 벌거벗고 대낮에 소를 타고 산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믿어도 될만한 일화일 것 같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할아버지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속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래 나는 서울태생이었으나,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우리 가족은 시골로 피난하여 10년을 머무는 바람에,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후, 비로소 나는 고향 땅 서울에 돌아오게 되었다. 서울은 귀향인에게 주는 낭만 같은 것은 없는 곳이어서, 그리운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곧 어색하여지고 오히려 두고 온 시골이 고향인 듯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재경 학우회 같은 모임에도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 년 먼저 서울에 와 공부하고 있던, 내가 시를 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안면이 있는 한 남학생이 청동 다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 공초 할아버지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승려처럼 머리를 깎고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따뜻하게 반겨주시면서 커다란 스크랩 북을 내 주셨다.
그것은 오며 가며 여러 사람이 써놓고 간 많은 시였다. 그 마지막 페이지가 다 끝나면 새로운 스크랩 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간간이 그림도 그려져 있고 각기 다른 여러 가지 필체로 된 여러 사람이 쓴 시집이었다. 나도 그 스크랩 북에 시 한 수를 남겨 놓았다. 끝에는 본명을 쓰기도 하고 더러는 필명이나 호를 쓰기도 한 것을 보았다.
여러 사람이 아무 때나 번갈아 찾아오기 때문에, 쓴 사람을 본 적은 없어도 그들의 글을 읽고 좋아하게도 되고, 또 그 이름을 기억하게도 되었다. 그중에는 지금 이름이 꽤 많이 알려진 시인들도 있었다.
 그다음에 다시 갔을 때에, 할아버지는 나에게 새벽 효(曉)자와 샘 천(泉)자로 ’효천’이라고 호를 지어주셨다. ‘새벽 샘’이라는 느낌이 드는 청량감 때문에 그 이름이 내 마음에 들었다. 깊은 산 속 골짜기의 새벽 샘은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 그러나 내가 다니던 대학의 남학생들은 청동에 나가는 것보다는 우리끼리 문학동아리를 알차게 만들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면서, 그곳에 나가기 시작하는 우리 여학생 몇 명을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아마도 비슷한 어감이 주는 느낌이 혜초나 원효대사를 연상한 때문인지, 그중의 한 친구는 나에게 ‘효천대사 혜존’하고 편지까지 띄우면서 나의 이름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가 좋아하던 ‘효천’이란 호는 타의에 의해서 자연히 그 의미가 약화하고 사용의 빈도가 축소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에게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이름을 지어 받았는데, 그중에는 특이한 이름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히 그 이름을 주지 아니하기도 하였다. 하여간 나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나의 젊음을 지금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워주는 그 시절. 시골에서 도시로 돌아와 느낄 수도 있었던 삭막한 기분에서 나를 건져준 것은 문학과 젊은 지성, 그리고 그때에 알게 된 많은 대학 친구들, 글을 쓰는 각계의 인사들, 그리고 공초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를 찾아오던 사람들은 학생들도 많았지만, 더러는 중년의 신사들도 있어서 할아버지를 찾아와 담소하기도 하고, 가끔은 누군지가 한없이 밀려있는 할아버지의 커피 값을 한꺼번에 내 주기도 하였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커피를 마시고 할아버지의 외상 액수를 더욱 늘어나게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할아버지의 생일이었는데, 결혼하여 주부가 되어 있던 제자 한 분이 할아버지의 생일파티를 한다고 초청하였기 때문에 여럿이 그 댁으로 가서 기다렸다. 할아버지를 모시러 간 사람은 늦게서야 돌아와, 끝까지 거절하시는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하고 혼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주인공도 없는 늦은 생일 음식을 우울하게 먹고, 음식을 장만하신 분께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어렴풋이 예감했어야 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하였다.
 시험도 끝난 어느 날 오후, 친구들과 함께 할아버지와 커피를 마시며 시를 쓰기도 하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는데, 한쪽 구석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는 시를 쓰는 젊은이였는데 그의 시선으로 어쩐지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이 때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도, 불쾌하게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나의 친구는 그런 일의 여파로 결국 청동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였다. 우리는 무척 섭섭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찌 지내시는지 가끔 궁금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여학생 회관에 들어오니, 할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학교에 와 계시다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단짝 친구가 단숨에 달려가 보니 할아버지는 법대 선배 언니 둘과 함께 본관 앞에 서 계셨는데,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오셨노라고 하였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가운데 모시고 인촌 동상 앞의 잔디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빨리 수업에 들어가라고, 수업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면서 할아버지는 서둘러 선배 언니들과 함께 떠나가셨다.
 할아버지는 신선이 살다 가듯이 세상살이에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사셨으면서도, 우리가 학교의 수업을 빼먹을까 봐 걱정하셨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우리를 찾아오신 할아버지는 아마도 우리가 청동에 발길을 끊은 이유를 아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영원히 뵙지 못하고 말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문에 나온 기사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절차가 청동에 오던 제자들에 의해서 치러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 끝에 역시 참례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할아버지는 필경 괜찮다고, 그런 일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 것이었기에….
 장례가 끝나고 며칠 후, 철학과에 다니는 여학생 후배 하나가 학교에서 나를 보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맹렬히 나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장례식에는 올 것이라고 모두 이야기하며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그 후배가 청동에 나간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거니와, 개인적인 접촉도 그때까지는 없었던 사이여서 조금 놀라웠는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있었던 듯하였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다음에도 공초의 제자들은 가끔 서로 만나기라도 하는지, 세종회관 근처에서 청동문학 시화전을 한다고 공고가 났기에 그곳에는 가 보기로 하였다. 혼자서 별로 붐비지 않을 시간을  택하여 둘러본 시화전은 특별한 감회가 되어 나의 마음을 적시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나의 마지막 인사이며, 막을 내리는 청동에 대한 나의 박수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되돌아보는 기억은 대부분 값진 것이지만,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어느 겨울, 고국에서 한 장의 연하장이 날아들었다. ‘효천 여사께’.
 그 청량한 이름은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나타나, 세월이 쌓아놓았던 녹슨 먼지를 털어내고 메아리를 울리면서 종소리같이, 물소리 같이, 나의 마음을 기쁨 속으로 몰아넣었다. ‘효천’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다니….
 그가 어떻게 나의 이름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또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지난날의 어떤 편린이 그로 하여금 그 이름을 불러보게 하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서울의 번화가, 명동 한복판에서 둥지를 틀고 속세를 철저하게 떠나서 사시었다. 할아버지만이 할 수 있었던 삶이며,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을까. 할아버지의 사상은 그 뿌리를 내릴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였을까.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시대를 다녀간 바람이었을까. ‘공초’라고 스스로 이름 하였을 때에 이미 바람이기로, 스치며 지나가는 인연이기로 작정하셨을 것 같은 공초, 할아버지 시인 오상순.
 할아버지의 종교는 필경 불교이겠는데, 옷깃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 한다면 할아버지와의 특별한 인연은 어쩌면 후세에도 이어지고, 훗날에 다시 만나서 그동안 있었던, 못다 한 이야기도 할 수가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믿어진다.
 때때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혹은 꽃잎이 흐트러질 때, 그리고 연하장에 실린 옛 이름 속에 감회가 서릴 때, ‘아’ 하고 한숨지으며 홀연히 떠나가기도 하는 엷은 바람 소리. 할아버지는 가끔 그 속에 한순간으로 머물기 위해서 꿈결 같은 아지랑이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진설명: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왼쪽끝이 본인이며 중앙은 공초 할아버지, 시인 오상순. 
                                                                                                                                                  

                                                                                                                                                -  6-7-2001.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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