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피는 목련화

조회 수 5807 추천 수 2 2015.06.26 09:29:05
작가 : 정종진 소설가 

          

 

                                                                           숨어 피는 목련화

 


                                                                                                                  정종진

 

박민우는 시카고 서쪽 서버브인 롤링 메도우 타운에 위치한 ‘주찬양 장로교회’의 집사라고 했다. 장로라고 해도 그 신실함을 마음 놓고 믿을 수 없는 판국에, 집사라는 직분은 신뢰의 신분증으로는 불충분했다. 우연한 기회에 소개받았지만, 결혼을 우선 전제로 하는 민우를 경애는 경계하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지게 벌어진 그의 어깨를 보면, 힘깨나 쓰는 남자 같이 생겼다. 대화하는 목소리는 약간 신경 쓰일 만큼 컸으나, 발음도 확실했고 음색이 맑고 잡티가 없어서 좋았다. 양쪽 눈썹은 시커먼 구둣솔 두 토막을 떼어다 붙여 놓은 것처럼,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과체중의 아줌마 엉덩짝과 같이 죽치고 앉아 있는 넓적코는 제법 매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경애와 한동갑인 올해 62세라는 그의 나이도 끌리는 부분이었다. 만약 민우가 65세가 넘었어도 좀 곤란했을 것이다.
“부고장 또 한 번 돌리려고 늙은이한테 시집가니, 이 푼수야? 두 번째 신랑 죽은 건 조의금도 없다는 것 알지?”
친구들이 이렇게 경애를 보고 비아냥거렸을 테니깐 말이다.
“네 신랑 또 죽었다고 그래 봐라, 네 신랑이 죽었다 살아났다 또 죽은 나사로인 줄 알 거다. 이 주책아,”
또 민우가 58세나 59세 정도만 되었다 해도 마땅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남자의 마음이 떠날까 봐, 경애가 항상 신경 써야 하는 불편함이 따를 테니까, 젊은 남자라고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경애는 민우와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민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짝 들여대며, 경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경애 얼굴에 있는 주름살이 몇 개인가 세어 보느라고 그러는지, 성형수술 받은 코인가 만든 쌍까풀인가 확인해 보려고 그러는지, 그는 경애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처음에는 “뭐 이런 척살머리가 다 있나?” 하고, 민우가 경멸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경청하는 것이 예의라니까, 어쩌면 민우가 경애보다 더 미국화된 신식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니깐 불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서, “뭘 봐 이 자식아.”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애는 항상 도도한 척했지만, 민우의 예리한 시선 앞에서는, 그녀가 먼저 눈을 내리깔아야만 했다. 눈싸움에서 진 것 같아서 조금은 불쾌했다. 그러나 그녀도 뚜렷이 바쁜 구석도 없거니와 민우의 체면까지도 고려하다 보니까, 경애는 민우를 자꾸 만나게 되었다.
민우는 젊었을 때 학교를 좀 덜 다녔을 뿐이지, 별로 흠이 없는 남자인 듯했다. 미국 이민생활을 하는데 학교를 좀 덜 다녔다고 무슨 별 불편할 것이 있으랴? 더욱이 나이가 들은 지금, 경애엔 아픈 곳 없고 정규적으로 일할 수 있는 남자면 된다. 또 경애에 돈이 좀 있으니, 돈을 많이 버는 남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같이 여행가고, 먹고 놀고, 무거운 식료품 봉지 들어 날라주면 된다. 대화할 때 좀 서로 안 맞는 구석이 있을는지는 모르나, 무슨 그리 뾰족하게 고상한 대화를 몇 마디나 하며 살 것인가?
또 함께 결혼 운운하며 사귀다가, 혹은 동거를 하다가, 서로 안 맞아서 돌아선다 해도 경애는 손해날 것이 별로 없었다. 요즘은 늙은 과부라고 아무도 쳐다봐 주는 사람도 없고, 특히 여자로서는 쳐 주지도 않는다. 어떤 남자가 여자라고 쳐 주고, 손이라도 잡아 주면 그게 웬 횡재며, 여기저기 건드리고 지나가 준다면 얼마나 이득인가?
민우가 영주권이 있는 홀아비였다면, 결혼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해도 되니 얼마나 간편하랴? 경애나 민우가 주위 수다쟁이들에게 잡담의 대상이 되어 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민우의 필요에 따라 친구가 되어 주고, 경애의 필요에 따라 좋은 상대자 노릇을 하며 지내면, 경애에는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경애는 그녀의 친구들에게, “남자친구”는 아니고 “그냥 친구인 남자” 라고 말하기 좋고, 다른 과부들에게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문제는 민우가 영주권이 없으므로, 그가 꼭 결혼해야만 된다는 데 있다. 그것도 하루빨리 서둘러서 결혼해야 한다니, 비밀 데이트의 아찔함을 맛볼 기회는 물 건너간 폭이다.
민우가 경애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꼭 자기 것으로 합법적 규정을 해 놓고 싶어서 결혼하려 든다면, 결혼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은실이와 그 남편이 사는 것처럼 닭살 돋을 만큼, 고소하게 살아볼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않는가?
그러나 단지 한국에 있는 민우의 애들을 데려오기 위해 결혼하는 거짓사랑이라면, 그것은 경애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이다. 영주권 얻은 뒤에, 남자의 태도가 휘까닥 바뀐다면, 후회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될 것이다. 경애의 자녀에게도, 경애의 결혼은 별 볼 일 없는 늙은 어머니의 추태로 보일 것이다. 친구들로부터도 “꼬라지 좋다, 요것아. 내가 꼴값 싸지 말랬지?” 혹은 “나잇값이나 해라, 쭈구렁 할망구야” 라는 비웃음을 들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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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어지간히 싸워대던 남편이었다. 싸우던 생각을 하면 남편이 더욱 보기 싫어서, 경애는 이유 없이 늙은 남편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경애가 쉬지도 못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하는 것은 순전히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경애는 가로 거치는 사람 없는 데서 혼자 좀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부건 이혼녀건 늙어서 혼자 사는 여성들을 보면 얼마나 한갓질까 하고 부러워했다.
남편이라는 필요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앉아서, 그는 고집 피우며 말도 고분고분 듣는 적이 없었다. 남자로서 뚜렷한 자기 자신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내의 말에 따라가면 어딘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인 듯, 공연히 엉뚱한 일에 고집만 피웠다. 가끔 한술 더 떠서, 성경에는 남편이 머리라고 했다는 둥,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게 되어 있다는 둥, 쉰내 나서 강아지 귀에도 안 들어가는 고전을 읊어대곤 했다.
“여보, 수수께끼 맞춰 보세요. 머리가 당신처럼 텅 비어 앞인지 뒤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든가, 당신 같이 벽에 못 하나 못 박는 무능력자가 위에서 다스린다면, 그 집안은 어디로 가게요?”
“평화라는 길.”
“평화에 도착하기도 전에 노숙자라는 낭떠러지기로 떨어지지요.”
경애는 남편을 시키느라고 두 번 세 번 잔소리하느니, 쓰레기 버리는 일이나 카펫 청소하는 일까지도, 그녀가 직접 해 치우고 말아 버렸다. 그러니 경애는 항상 바빠야만 되고, 남편은 항상 별 할 일이 없었다.
남편이랍시고, 매미 껍질 벗어 놓고 도망가듯, 여기저기 옷이나 벗어 놓고, 알맹이만 쏙 빠져나가 없어진다. 옷 입을 때는 항상, 파란 줄 친 아디다스 셔츠 어디 있느냐, 국방색 폴로 바지 어디 있느냐 하며, 까다롭게 굴었다.
김치 병뚜껑은 경애가 직접 열어도 되겠지만, 남편이 열어 줌으로써, 남편의 존재의식을 고취하려고, 남편에게 김치 병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못마땅한 듯, 신경질적으로 일어나서 김치 병을 연다.
“어, 이거 왜 이렇게 안 열리지? 항우가 뚜껑을 잠갔나, 골리앗이 캡을 닫았냐? 이 뚜껑 왜 이렇게 건방져? 이~야앗! 으메~ 아가가-!”
남편은 허리가 삐끗했다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후, 엉금엉금 기면서 남편은 2주일 동안이나 누워서 엄살을 해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은 정말로 너무 번거로웠다.
치과의사가 딱딱한 것 먹지 말라고 해서 ‘국희 땅콩샌드’를 사다 주었더니, ‘맛동산’ 안 사왔다고 남편은 이틀 동안 골을 부렸다. 경애가 쿠키 하나 때문에 일부러 한국 식품점에 가서, 훼밀리 팩 대형 맛동산을 사왔다. 남편은 그날 저녁에 그 맛동산을 다 먹어 치우고, 또 배 아프다고 칭얼댔다.
남편에게 줄 단팥빵과 찹쌀 도넛을 사 오면, 남편은 어린애처럼 좋아서 자지러지며, 그때마다 당장 칼로 반씩 잘라서 냉동칸에 넣어 둔다. 한꺼번에 통째로 하나를 다 먹으면 생목 오른다면서, 한 번에 반 개씩만 먹는다. 남편은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 듯, 생각날 때마다 뻔찔나게 부엌으로 드나들며, 수시로 반쪽짜리 빵을 하나씩 먹어 치운다. 다람쥐 알밤 까먹듯, 토끼 당근 갉아 먹듯, 아주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야금거린다. 낮에는 삽살강아지처럼 경애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요구하다가, 밤만 되면 콜콜 잠만 잘 잔다. 아무 소용없이, 살만 포동포동 찌는 남편은 아무리 궁리해도 배치할 적소를 찾을 길이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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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가 된 후, 홀로 생활하는데 익숙해져야만 했던 경애는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서 들어왔다. 비디오 연속극을 보려고 객실의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새우깡 봉지를 뜯었다.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혼자 살다 보니까, 전화받기도 싫어졌고 누군가에게 신경 쓰기가 귀찮아졌다. 들판에 놀러 나간 딸아이를 부르는 엄마처럼, 전화벨이 길게 목청 돋우어 경애를 불렀다.
“기영애이야아아~아, 기영애이야아아~아.”
동무들과 뛰어놀 때 엄마가 부르면 대답하기 싫듯이, 연속극에 집중하던 경애는 전화받기가 싫어서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전화벨은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전홧줄을 잡고 매달렸다. 할 수 없이 받아야만 했다.
“헬. 로!”
어떤 반갑잖은 불청객이냐는 듯, 경애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한 음절씩 짧게 자른 두 음절 ‘헬’과 ‘로’를, 거의 동시에 송화기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경애야, 내다. 은실이. 니, 집에 있는 줄 내 알고 있었다.”
고향 친구인 은실이었다. 고향인 합천에서 살 때, 경애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초계 초등학교에 다녔었다. 시카고에 와서 살면서 우연히 “영남 향우회”라는 모임에 갔다가 은실이라는 목소리 큰 여자를 알게 되었다. 은실도 합천 출신이었는데, 그녀 역시 초계면에 있는 초계 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은실은 경애와 나이도 한동갑이니 동기 동창이 분명하다고 못 박았다. 경애도 고향 사람을 만났으니 진짜 동창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경애와 은실은 타향에서 억지로 엮어 만든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되었다.
“응, 은실아. 잘 지냈니?”
“니 머하노? 방구석에 혼자 처박혀 있기 힘들지도 않나?”
“뭘 먹기도 싫고. 비디오 보려고.”
“설칠인가 경칠인가 하는 지지껍찔한 연속극 그기가? 우리 집에나 오그라.”
은실은 스시를 만들었으니, 자기 집에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혹시 입맛 돋우는 돌발사건이 있을는지도 몰라서, 경애는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은실의 떠들어대는 수다를 듣기는 피곤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가끔 깔깔대고 웃을 수 있게 해 준다. 경애는 전에 사다 두었던 탠저린 한 박스를 들고 은실의 집으로 향했다.
은실과 그녀의 남편은 위생 비닐장갑을 끼고 스시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다정한 자매처럼 부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보 그건 너무 크다구. 스시는 작아야 먹기도 좋은 거야.”
“아따, 크면 입을 좀 더 벌리고 묵으면 돼재예.”
“스시는 보기가 좋아야 맛도 좋은 거야.”
“알았심더. 어서 만드소 마.”
은실과 그녀의 남편은 스시를 네 사람이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이 만들었다. 은실의 남편은 은실을 위하여 식탁 준비도 하고, 스시 만드느라고 어질러진 그릇들을 잽싸게 닦아서 랙 위에 엎어 놓았다. 그릇에 비누칠 하는 솜씨와 그릇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는 그의 동작이 아주 능숙하였다. 그가 고명한 기계 디자인 엔지니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엌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그는 흡사 식당에서 일하는 경험 풍부한 전문 접시 닦기 일꾼 같아 보였다.
스시를 먹을 때, 은실의 남편은 은실을 위하여 간장에 와사비를 섞어서 휘저어 주었다. 그는 이것저것 색다른 스시를 가끔 집어다가 은실의 접시에 놓아 주며, 그 바닷고기의 종류와 특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또 은실은 그녀의 남편이 먹으려고 그의 접시에 집어 다 올려놓은 김치를 날름날름 집어 먹었다. 식탁 중앙에 있는 생강절임 그릇까지의 거리와 남편 접시까지의 거리가 똑같았다. 그런데도 은실은 부득부득 남편이 먹으려고 그의 접시에 집어다 놓은 생강절임을 답삭답삭 집어다가 먹었다. 은실은 남편의 입가에 간장이 묻었을 때도, 아무런 불평이나 핀잔도 없이, 얼른 냅킨을 집어다가 덤벼들어 그의 입을 닦아 주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은실이 과일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이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발딱 일어났다. 그는 지하실로 쪼르르 내려가더니, 한국배 세 개와 단감 한 봉지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동안에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온 은실은 과일을 까기 시작했다. 손발이 착착 맞는 부부가 부러워진다.
은실은 이야기할 때도, 자연스럽게 그녀 남편의 등도 어루만졌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손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은실은 그녀 남편의 손을 끌어당겨다가 만지작거리면서 경애에게 보여 주었다. 자기 남편의 손톱은 넓적하게 생겼다는 둥, 그래서 성격이 저돌적이라는 둥, 여러 말로 떠들어댔다. 흡사 생물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갖다 놓은 샘플 모형인 양, 그녀의 남편은 은실이 하는 대로 자기 신체의 부분품을 내맡겼다. 저돌적인 부분이 없는 남편에게 저돌적이라고 평해 주는 것은, 칭찬으로 포장하여 남편의 단점을 덮어주려는 애교처럼 들렸다.
은실이 허풍스러운 제스처를 동반하며 수다를 떨다가, 오미자차를 식탁 위로 엎질렀다. 차는 식탁보를 적시고, 쪽 사이를 통과하여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은실의 남편은 얼른 종이타월을 가져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자루걸레를 가져다가 바닥을 훔쳐냈다. 남편이 바닥을 닦는 동안, 은실은 낄낄대며 식탁을 닦았다.
대학도 별 볼 일 없는 데 나오고, 앞 경치는 쭈그러진 맷방석 같아, 조금도 잘생긴 구석이나 괜찮게 보이는 쪼가리가 없는 은실이다. 쇠풀꾼처럼 시커먼 얼굴에 걸맞도록 투박스런 사투리만 쓰는 은실이는 어떤 사주팔자일까? 나이는 경애와 한동갑인데 도대체 무슨 날 무슨 시에 태어났기에 저렇게 부러운 게 없이 복을 누리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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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민우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날이었다. 경애는 늘 좀 튕기는 척하느라고 약속시각 2~3분 전에 들어가면서 민우로부터 은근히 환영을 받곤 했다. 약속 시각은 전자시계같이 잘 지키면서도, ‘혹시나 잊어버렸든지 마음 바뀌어서 안 오면 어쩌나?’ 하는 약간의 걱정을 민우에게 끼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오후 6시에 ‘아사달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경애는 5시 40분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늘 민우를 기다리게 해 왔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그날은 경애가 민우보다 더 먼저 들어가서, 민우를 기다리려는 심산이었었다. 그것은 경애가 민우에게 호의를 느낀다고 보내는 청신호로서, 일종의 윙크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식당 안에 들어선 경애는 민우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민우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도 그의 시선은 경애의 속마음을 빨아들이려는 듯, 경애의 눈에 고정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그날 따라 민우의 동요 없는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늙은이답지 않고 정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 대부분은 여자가 쳐다보면 얼굴을 붉히면서 못 본 척, 다른 곳을 바라보게 마련인데, 민우는 아주 별종이었다. <이 늙은 수말이 그만큼 여자에 대하여 자신이 있다는 증거인가, 나에게 반했다는 표시인가?>
오기가 생긴 경애는 그날 그의 시선에 도전하며 정통으로 마주쳐 보았다. 경애 역시 웃지도 않고 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남자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일 때까지 동요하지 않으리라고 경애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경애는 그의 시선 속으로 스스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경애는 턱을 앞으로 내밀며, 디스코 춤추듯 상체를 비틀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경애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며,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사춘기의 소녀 흉내를 내며, 응석을 부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한 경애는, 그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경애는 창피한 마음이 들어, 주춤하고 물러났다. 경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민우는 엉큼한 웃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붉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경애의 마음만을 사로잡으려는 듯, 변함없이 눈만 반짝거렸다. 정말, 이 세상에 이렇게 괜찮은 남자가 다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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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경애의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남편은 싫다거나 좋다거나 으레 옆에서 항상 귀찮게 붙어 다니는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뭉게구름 밑에서 그림자 사라지듯, 남편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때 경애는 엄청난 공포에 둘러싸였다. 다음 순간, 별안간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명해 봐야만 할 순간이 닥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자기 인생의 주변인물은 누가 있는가, 냉정하게 내려다보아야만 되었다. 늙어서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젊었을 때 눈코 뜰 새 없이 일했건만, 남편만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그녀가 이기주의자 같았다. 늙은 남편에게 소홀히 대했던 모든 일이 후회스럽게 경애를 덮쳐왔다. 남편이 그녀 인생에 주요 부분을 차지해 왔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반평생을 몸담아 살아왔던 시카고의 하늘과 땅이 무서웠다. 함성과 광분의 흔적을 하얀 눈으로 푹 덮고, 발자국 하나 안 남긴 겨울 야구장 뤼글리휠드처럼, 모든 시야가 을씨년스러웠다.
경애는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생각해 봤다. 쌀이 떨어져서 쌀 사러 식품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밥은 내가 남편 때문에 했던 것이 아니구나. 내가 먹기 위해, 나 때문에 했었구나.> 혼자 살아도 빨래를 해야 했고, 찌개도 끓여야 하였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존재이며 일만 만드는 귀찮은 남편이라고 불평하던 일이 후회되었다. 남편이 없다고 할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과의 일들도 한 조각의 해묵은 추억이 되어, 기억 뒤편에서 지워져 가고 있다. 잠잘 때 다리 올려놓는 사람도 없고, 무거워서 잠 깼다고 소리 지를 대상도 없다. 연속극 보면서 주인공이 불쌍하다느니, 등신 같지 뭐가 불쌍하냐 느니, 싸움 걸 사람도 없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도 밥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우물쭈물 점심때가 된다. 찌개를 짜게 끓여도 불평할 사람도 없고, 산채 나물을 정성 들여 무쳐 놓아도 밥 더 퍼가는 사람도 없다. 식당에 나가서 외식하기 싫어서 육개장을 만들었으나, 혼자 먹으려니 너무 맛이 없었다.
경애는 이런저런 재미있을 만한 일을 마음속에서 불러내 보려고 해적질해 보았다. 스스로 허전한 기분을 자극해, 돌풍을 일으켜 보려고 노력했다. 가라오케를 틀어 놓고 흘러간 유행가를 불러 봤다. 코미디 영화도 보고 만화책도 읽고, 사교춤도 배워 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슴속은 다시 휑뎅그렁해져서, 고요만 가득한 무풍대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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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닉 가든의 초목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특성을 보여 주려고, 분주하게 앞다투어 꽃을 피운다. 수선화, 튤립이 한창이고, 목련화도 만개했다. 민우가 목련나무 밑으로 파고 들어가 고개를 쳐든다.
“목련 꽃이 만발하니, 움츠러들었던 가슴이 좀 펴지네요.”
“목련 꽃은 괜히 슬프게 보여요. 화려하지도 않고 입을 쫙 벌려 활짝 웃지도 않아요. 무언지 덜 채워진 듯, 아련한 아픔을 줘요.”
“목련화의 꽃말은 못다 한 사랑의 숭고한 정신이라는 군요.”
숭고한 정신이야 좋겠지만, 못다 한 사랑은 얼마나 아프랴? 경애는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가는 곳마다 목련이 심어져 있다. 집을 사면 집 앞에, 교회 가면 교회 입구에, 무엇인가 배우러 시립대학에 가면 학교 도서관 창가에 목련이 있다. 경애가 반가워하거나 말거나, 목련은 눈에 쉽게 띄는 곳에서 청승맞게 피어 있다. 경애는 목련을 살갑게 만져 준다든가, 다정히 바라보아 주지도 않는다. 그냥 눈에 띄니까, 그런 꽃도 있다가 더 할 뿐이다. 목련화의 꽃말을 듣고 보니, 더욱 목련 꽃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 왜 신경 쓰랴? 그냥 있는 목련이니 그냥 보면 된다.
“그럼, 두 아드님께서는 경기도 양평군에 사세요?”
“형님댁에서 함께 사는데, 제가 자리가 잡히면, 미국으로 초청해 오고 싶습니다. 애들이 다 컸으니, 제 밥벌이 제가 하면서 살 테니까요.”
“그래야 하겠죠. 아들들이 몇 살씩 되었기에, 결혼들도 안 하셨어요?”
“큰아들은 35살이고, 작은애는 32살입니다. 애들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니까, 결혼도 못하더라고요.”
“애들 엄마는 어디 사시는지 모르세요?”
민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불편한 질문이지만, 필요한 질문이었다.
“네. 오래전에 이혼한 후, 떠나가서 제 갈 길로 갔으니까요.”
번거롭게 남의 식구들과 엉킬 생각을 하니 한심스럽고 짜증이 난다. 결혼하지 않고 이 남자를 내 친구로 만들 수는 없을까? 세상에 표시 내지 말고 함께 지내다가, 피할 수 없는 막바지 지경이 닥치면, 그때 결혼을 하면 되지 않을까? 또 뭉개며 시간 보내 봐서, 별 볼 일 없는 남자라 생각되면, 그때 헤어져도 서로 손해나거나 다치는 구석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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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도 하세요?”
“원래 술은 못 마시지만, 도경애 씨하고 마신다면 기꺼이 한 잔하겠습니다.”
죽은 남편의 성을 따라, 항상 경애를 “안 집사님”이라고 호칭하던 민우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별안간 경애의 처녀 때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처녀 때 이름은 무척 감미롭게 들렸다. 애들도 자라서 집을 떠났고, 남편도 없는 경애로서는 부득부득 남편의 성을 따라 “안경애”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처녀 때 이름 “도경애”가 훨씬 듣기 좋았다.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요.”
“어디로 가야 술집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주차하기도 마땅찮을 텐데, 내 차로 함께 가시지요.”
민우가 제안했다. 그러나 경애는 다른 남자의 차를 타는 것도 불편하고, 그녀가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도록, 그녀 스스로 운전하겠다고 했다. 경애는 그녀의 차로 함께 가자고 민우에게 제안했다. 민우가 경애의 자동차로 껑충 뛰어들었다. 수컷의 기운이 차 속으로 퍼져 풍겼다. 경애는 민우라는 남성을 자기 인생에 끌어들여, 자기 앞에 놓인 미지의 길을 개척해 나가듯, 낯선 길을 침착하게 운전해 갔다.
경애도 민우도 어디에 마땅한 술집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정석인지 모르듯이, 어떤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르니, 그냥 헤매었다. 그러나 꼭 술집을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호젓이 정처 없는 길을 드라이브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미국인 경영 술집이면 좋을 것 같았다. 될수록 한인 비즈니스 지역에서 동떨어진 곳을 찾아보았다. 한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검은 유리창 위에 파랑과 빨강 네온사인으로 올드 스타일 맥주 마크를 그려 놓은 태번이 눈에 띄었다. 경애가 도로변으로 차를 세웠다. ‘Make My Day’라고 쓰인 태번의 간판이 투광조명등 밑에서 선명한 빨강색을 반사하고 있었다.
“메이크 마이 데이.”
경애가 태번 이름이 재미있다는 듯, 민우를 바라보며 간판을 읽었다.
“아이 윌.”
민우가 표정 하나 헤트리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경애가 당황하여 이번에는 심장까지 벌렁거렸다. 민우의 두뇌가 경애보다 우수하여 한 수 위이기 쉽다. 약간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민우에게 패하여, 이번에도 경애가 한 수 꺾인 셈이었다.
                                                                                                          X  X
태번 안에는 당구를 치는 젊은이들이 네댓 명 떠들고 있었다. 카운터 근처에는 동행이 아닌 두 중년 남자와 하나의 여인이 따로 앉아 맥주를 각자 마시고 있었다. 경애는 생맥주 둘을 시켰다.
“술을 입에 안댄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원래 술은 30대에만 먹었었지 안 먹은 지 몇십 년 됐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땐, 거절하기 남우세스러우니깐, 체면상 그냥 조금 먹어줄 뿐, 취해본 적은 없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시카고로 온 후로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 멋있네요. 시카고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3년 됐습니다. 필라델피아로 해서, 여기저기 떠돌며, 4년 동안을 살다가, 큰 도시에 살고 싶어서 3년 전에 시카고로 이사 왔습니다.”
“어떻게 필라델피아로 가시게 됐어요?”
창 밖 깊은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민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암팡져 보이던 민우가 감상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지으니, 무척 로맨틱해 보였다. 사르르 감은 민우의 두 눈은 경애의 마음을 살금살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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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장품 회사에서 우리 5명의 남자를 오하이오 클리블랜드로 연수교육을 보냈습니다. 한 달 동안의 기술연수였지만, 우리 모든 동료는 기술연수보다는 차라리 영어 배우는 호기로 삼았죠.”
민우를 비롯한 연수그룹은 클리블랜드에 도착하였다. 아파트가 붙어 있는 “밀방아 식당”이라는 한인 식당에서 기숙하며 지냈다. 민우는 한국에서 이미 이혼을 하고 혼자 살아오던 터였었는데, 밀방아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던 여인이 청혼했다. 모든 동료의 부러움을 받으며, 미국에 남을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민우는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클리블랜드에 머물면서, 서류상으로 한국화장품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 웨이트리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녀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별안간 그녀는 결혼을 늦추기 시작했다. 결혼을 미루면서 요구사항이 점점 많아졌다. 계약으로 결혼하자면서, 민우에게 영주권을 얻어 주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민우에 대한 불평을 일삼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아파트에서 자진 퇴각한 민우는 졸지에 오갈 데 없는 노숙자로 되어 버렸다. 민우는 안면몰수하고 일일 노동자 멕시칸들 틈에 끼어들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야 목구멍을 채울 수가 있었다. 샤워할 데도 없었고, 짐승처럼 굴러다녀야 했다.
멕시칸 노동자들과 어울려 천신만고 끝에, “호머빌”이란 조그만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 가, “오하이오 닭 공장”이란 곳에서 고정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면 영주권을 내 주겠다고 주인이 말했다. 그 닭 공장에서 아침부터 악취를 칼질해 댔고, 저녁까지 어깨가 빠지도록 닭고기를 져 날랐다. 특별히 돈 쓰는 데도 없고, 단지 먹고만 살 뿐이었는데도, 돈이 축적되지는 않았다. 민우는 1년 5개월 동안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를 돌았다.
일꾼들의 영주권을 신청해 준다고 거둬들였던 서류뭉치가, 어느 날 우연히 주인의 서랍에서 통째로 발견되었다. 그때까지 영주권 신청서류는 변호사에게 보내지지도 않은 채, 공장 주인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영주권은 애초부터 내 줄 생각을 안 했었고, 싼 노동력을 갈취만 하려고 마음먹었던 주인에게 멕시코 일꾼들은 난동을 부렸다. 난동으로 승산이 없음을 감 잡은 민우는 모든 것을 그대로 포기하고 그 닭 공장에서 나왔다.
미국땅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뉴욕으로 갈까 생각했었다. 한인 사회가 너무 크면 개인주의가 발달하여,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삭막할 것 같았다. 어디로 가서 발을 붙이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영주권 없이 떠도는 사람의 서러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미국에 이민 갔던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필라델피아인가 어디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또 필라델피아에도 한인들이 많이 산다니, 민우는 필라델피아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필라델피아로 갔으나, 영주권 얻을 길은 망막했고, 호락호락하게 민우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과부도 없었다. 혼자 굴러다니다 보니, 사람은 점점 더 초라해지고, 민우 자신의 존재감도 소멸하여 갔다. 타인들로부터도 은근히 구박 덩어리로 되어 갔다. 적지 않은 세월을 소모한 뒤, 결국 한국 식품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식품점에서 일하면서 운전면허증도 받고 소시얼 시큐리티 번호도 받았다. 중고차도 한 대 샀다. 몇 년 정도 일을 하면서 민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 무렵, 식품점 주인이 민우가 가진 돈을 3개월 동안만 꾸어 달라고 했다. 그 주인은 민우가 허기졌을 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일하다가 점심도 함께 먹는 은인이었다.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핏방울 같은 돈, 민우로서는 거의 전 재산인 10,000불을, 민우가 식품점 주인에게 꾸어 주었다.
3개월 후, 민우는 꿔준 돈을 되돌려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생재기로 돈을 주려니까 아까웠든지, 또는 월급을 두 번 주는 것 같아서 억울했든지, 계속 미루며 주인은 돈을 갚지 않았다. 꿔줬던 돈을 받으면, 그 가게에서 나오려고 마음을 굳혔다. 민우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 생각도 나고, 만만하지 않은 돈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횡포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인은 민우에게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내가 이민국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박씨는 한국으로 추방된다는 사실 알아?”
민우는 그 주인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인생을 종을 치기에는 그동안 그가 고생해 왔던 세월이 너무 억울했다. 민우는 미국에서 성공하여 자기의 멋진 인생을 식품점 주인에게 보여줌으로써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식품점을 나와 버렸다. 언제 이민국 요원이 들이닥쳐, 체포될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우는 더는 그곳에서 일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오래전의 이야깁니다. 왠지 시카고에 오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무작정 시카고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자리 잡아 가는 데는 주찬양 장로교회의 김만제 목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스킬 머신 회사에서 저는 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영주권은 아직 없지만, 세월이 약이라더니, 지금은 돈도 어느 정도 모았기 때문에, 훨씬 생활할 만해졌습니다.”
                                                                                                     X  X
경애는 민우를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여성이 약한 남성에게 느끼는 모성애일 수도 있었다.
“어머,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꿈꾸는 것 같아요. 그렇게 고생하셨는지 몰랐어요. 스킬 머신 회사에서는 영주권 얻는 후원자가 안 돼 주나요?”
“부탁해 봤는데, 비공식 고용인이라 거절당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약간 취하도록 마시었다. 민우는 제법 여러 잔을 마시고도 취한 기색이 없었으며, 마시는 솜씨도 제법이었다. 몸이 튼튼해서 그런지, 주량이 세어서 그런지, 술에 무척 강한 사람 같았다. 젊던 시절에는 내놓으라 하는 술꾼이었던지, 술 먹는 예절 또한 바랐다. 민우는 여전히 경애를 빤히 쳐다봤다. 경애는 취한 척하며, 민우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을 은근히 접근시켰다.
“취하시나 봅니다.”
민우가 담담히 말할 때, 남자의 이빨 냄새가 술 냄새와 섞여서 경애에게 야릇한 흥분을 주었다. 경애의 두 입술이 긴장을 풀고, 상하로 떨어져 나갔다. 남자의 사적 공간까지 침투한 경애의 얼굴을 의식한 민우의 눈빛이 갑자기 긴장하며, 그가 뒤로 흠칫 물러났다. 다시 제정신을 차린 경애가 약간의 모욕을 느끼며 완전히 후퇴했다. <미친 자식, 꽤 고상한 척하네. 지나 내나 늙어서 가치 폭락하긴 매한가지지 뭐.> 경애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경애가 얼굴에 접근했을 때, 민우는 천천히 입을 맞춰 주든가, 최소한도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어야 했다. 민우가 입을 맞추려 할 때, 경애는 절대로 안 되는 일처럼, 완강히 거절하는 척했어야 대충 맞는 각본일 것 같았다. 그러나 왜 번거롭게 척하며 에너지 소모하랴? 좋으면 대뜸 좋은 것이고, 아니면 때려치우는 것이지, 무슨 정력으로 신경전을 벌이랴? 그래도 경애는 설레는 가슴을 가눌 수가 없었다.
“크루스 한번 같이 가실래요?”
경애는 취한 척하며 게걸거렸다.
“배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말입니까?”
말을 꺼내 놓고 경애도 자신의 용기에 놀랐다. 민우가 빙긋 웃었다.
“술김에 한 말이라고 취소하지 안 깁니다.”
“제가 스케줄 잡을 테니깐, 박 선생님 몫의 비용은 박 선생님이 내세요.”
“얼마나 드는 데요?”
“얼마냐가 중요한 모양이죠?”
“중요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돈은 항상 계획을 짜서 정확한 곳에 써야 하잖아요?”
“한 주일짜리건, 열흘 정도 걸리는 것이건, 그냥 2천 불 정도 들어요.”
“알았습니다. 연락 주세요. 저도 휴가 낼 테니까.”
                                                                                                                     X  X
목요일 오전이었다. 딸 앨리스가 경애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오는 토요일 저녁에 바쁘세요?”
“아니,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약속이 없다. 무슨 일 있니?”
“나와 같은 직장에 다니는 강미영이라는 애 알죠?”
“그래, 전번에 우리 집에 함께 왔던 아가씨 말이잖니?”
“맞아 엄마. 미영이 엄마가 미영이가 어떻게 사는가 보려고 시카고를 방문했어요. 근데 미영엄마가 엄마한테 꼭 저녁을 사고 싶대요.”
“얘, 내가 사야 하는 것 아니니?”
“상관없지요. 미영엄마가 엄마한테 대접하고 싶어 하니깐, 미영엄마에게 저녁 살 기회를 주는 것도 예의인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알았다.”
                                                                                                                              X  X
금요일 저녁 10시경 민우가 전화했다. 술에 취한 듯 혀가 꼬부라지려고 들었다. 경애는 술 안 먹는 신앙인에게 술맛을 보여, 술을 먹게 하여 놓은 자기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러나 늦은 시간 잠 깨운 것에 대하여는, 경애가 사과를 받아야 할 성싶었다.
“술도 안 드시는 분인데. 제가 괜히 술 시작해 놨죠? 오늘 한 잔하셨나 봐요.”
“네. 너무 괴롭고 서러워서 한잔했습니다.”
“뭐가 괴롭혀요?”
“도경애 씨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나를 괴롭힙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경애는 승리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값비싼 척하던 민우가 기어이 오늘 저녁 경애에게 매달리려나 보다. <억지로 고상한 척, 인격자인 척할 게 뭐 있니? 되는대로 살지.> 며칠 전 민우의 입에서 술 냄새와 함께 섞여 나오던 남자냄새가 다시 한 번 새롭게 경애의 마음을 흔들었다.
흥분을 억누르며 경애는 민우를 만나기 위해 술집으로 나갔다. 술이 많이 취했기 때문에 경애가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민우는 술에 취해 있긴 했지만, 정신적 긴장이 풀려 있진 않았다. 알맞게 취해서 경애에게 엉겨 붙을 둥 말 둥 하는 민우가 차라리 귀여웠다. 다른 것은 몰라도, 민우가 남자 노릇 하나는 잘할 것 같은 확신이 왔다.
“저는 할 일을 끝내고 나서 노는 타입입니다. ‘토요일 숙제 완성형’입니다.”
“월요일 아침에 숙제를 대충 얽어매는 ‘월요일 숙제 땜질형’ 보다 낫죠?”
“그래서 얘깁니다. 나는 영주권이 있어야 합법적 지위를 가지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습니다. 전 우선 결혼을 해야 합니다. 결혼 신고를 해 놓고 놀든지, 크루스를 가든지 해야지, 불안전한 미래를 안고 어떻게 마음 편히 놀러 갈 수 있겠습니까?”
“아~ 말 되네요. 책임감이 강하신 분 같아서 존경스러워요.”
“마음 편히 놀려면 결혼 신고부터 하고 놀러 가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또 크루스도 결혼 후에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텐데, 결혼도 하기 전부터 서두를 건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사리 밝고 딱 부러지는 수컷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원앙금침을 깔아 놓고 유혹하는 여자를 사양하는 남자라니, 너무 존경스럽다.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이라는 사람이 성경에 등장하긴 하지만, 세상에 이런 남성이 실제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경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맞아요. 제가 그날 술에 취해서 말실수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크루스 간다는 것은 취소할게요.”
잠 깨운 것에 대한 사과를 독특히 받겠다고 나온 경애였지만, 오히려 민우에게 사과했다. 타당한 이론에 기초한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민우가 믿음직스러웠다. 경애는 행복하고 만족한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띠었다.
“제가 사랑하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한 분이신 것 같아요. 가까운 시일 내에 다운타운에 가서 우선 결혼신고를 해 놓고, 결혼식에 대한 계획도 짜도록 하지요?”
                                                                                                          X  X
경애는 식당 ‘갯벌가든’에서 미영엄마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솔직하고 기분 좋은 여인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럼, 지금 사시는 데는 어디세요?”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어요.”
경애에게 첫 번째 들어온 감정은 미영엄마가 민우 살았던 곳에서 산다는 친밀감이었다.
“어머, 내가 아는 사람도 필라델피아에서 왔는데.”
경애는 반가움에 얼른 말 안 했어도 좋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아, 그래요? 한국사람인데요?”
경애는 조금 후회되었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애는 약간 고민이 되었지만, 우물쭈물하면서 거짓말한다는 인상을 주어, 공연히 오해받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60세는 돼 보이는 남자분인데요.”
후회가 섞이기 시작했으므로, 경애의 음성은 약간 떨려 나왔다. 미영엄마가 의미 있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려다 말고, 이내 활짝 웃었다. 말실수하여 민우와의 관계가 잘못 알려지면, 좋은 건수도 없었는데 소문만 이상하게 나는 손실을 맞게 생겼다. 앨리스와 미영은 자기들끼리 영어로 규정식사와 건강운동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데요?”
“박철우 씨라고 하든가 뭐, 박민우 씨라고 하든가 그래요.”
필라델피아의 수많은 한국사람 중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 것이며, 더구나 미영엄마가 남의 남자 이름을 무엇하러 기억하랴? 그래도 경애는 자기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약간의 혼란을 남겼다.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앨리스와 미영이가 다가와서 옆의 가게로 쇼핑을 갔다 올 테니까, 좀 기다리라고 했다. 앨리스와 미영이가 쇼핑하러 출발한 뒤에 경애와 미영엄마만 남게 되었다.
“도시마다 한인사회가 다 좁지만, 필라델피아의 한인사회는 더욱 좁아요. 아까 그 사람 이름이 박 뭐라고 그랬죠?”
“확실하진 않지만, 박진우인지 박민우인지 뭐 그런 것 같아요.”
미영엄마는 자기가 마당발이라는 증거를 보이려는 듯,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으려는 표정이었다.
“혹시 키 좀 자그마하고 딱 벌어진 사람 아니에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사람 좀 그렇게 생긴 것 같아요.”
만약 미영엄마가 민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민우가 살아온 필라델피아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솟았다. 남의 생활을 잘 알진 못하겠지만, 민우의 생활이 타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취었는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우에 대한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보이자, 경애는 민우와 데이트하는 것처럼, 새록새록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미세스 안이 어떻게 아시는 분이에요?”
미영엄마가 “딱 벌어진 사람”에서 “아시는 분”으로 말을 바꾸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 질문은 조금 전에 미영엄마가 무의식적으로 지으려다 의식적으로 취소했던 야릇한 미소처럼 불편하게 다가왔다. 이 말짓은 그 야릇한 미소를 단지 언어로 바꿔 놓은 또 하나의 야릇한 제스처였다.
경애가 말을 잘해야 할 중요한 순간이 닥쳤다. 미영엄마가 민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민우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민우에 대하여 왜 그렇게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만, 자세히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애는 또 너무 오랫동안 생각한 후에 대답하여, 꾸며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내 후배 애 친구분이에요. 제 후배 애가 그분을 꽤 좋아하나 봐요. 보이프렌드는 아닌 것 같고, 몇 번 만났었나 봐요. 언젠가 한번 그 애가 우리들에게 인사시키더라고요.”
“어머! 내가 아는 사람 같아요.”
미영엄마는 눈을 반짝였다. 어떤 여인과 사귄다고 하는 데서 결정적 힌트가 미영엄마 뇌리를 명중했던 모양이었다.
“박민우 씨의 얼굴 피부가 좀 검지 않아요?”
박민우라는 이름이 분명하다는 듯, 경애는 민우의 이름을 똑똑하게 발음하며 밝혔다.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확실한 데이터를 입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죠? 얼굴이 좀 희진 않고, 눈썹이 송충이 눈썹이고, 코는 넓적코지요?”
“어머, 아주 정확하게 맞는 사람인 것 같아요.”
“후배와 사귄다고요?”
미영엄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애는 걱정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킥킥 웃었다. 미영엄마의 말에는 불평이 섞이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에는 그 사람이 영주권이 없습니다.”
“영주권 없는 게 흠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경애는 또 한 번 민우에 대한 강한 연민을 느꼈다. 민우와 결혼하여 영주권을 해결해 주고, 민우가 저런 구차스런 소리를 안 듣고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에는, 그 박민우란 사람이 나쁜 소문을 내고 필라델피아에서 사라졌어요. 어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시카고로 갔을 거라고. 작년까지 필라델피아에 살았었어요. 아마 작년이나 올해 시카고로 왔을 거예요.”
경애는 미영엄마가 엉뚱한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말없이 들어 보기로 했다. 민우가 미국 온 지는 7년 되었고, 시카고로 온 지가 3년 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경애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도 이미 민우의 말을 더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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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는 한국에 벚꽃이 장관이라고 했다. 경애 대학동창 여자들끼리 한국관광을 가자고 했다. 미영엄마가 전해 준 민우 이야기 때문에 실망스럽고 우울했던 경애는 동창들과 어울려 한국관광을 가기로 했다. 경애는 민우를 생각하면 너무 분하여 한밤중에도 잠이 홀딱 달아난다.
“내가 너무 값싸게 보였거나 헤픈 여자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야.”
생각할수록 경애는 억울했고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이왕 지나간 일이니 할 수 없다. 앞으로나 야적잖은 인간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말아야겠다. 바깥바람을 쏘이고 돌아오면 좀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5박 6일 동안 벚꽃관광을 포함한 고국 서남해안 관광이 끝난 후, 자유롭게 한국에 머물다가, 오고 싶은 날짜에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패키지여행이다. 봄에는 비철이라, 미국으로 되돌아오는 비행기는 아무 때나 예약이 된단다.
고국의 벚꽃구경은 그저 친구들과 떠들고, 시시덕거리는 소란일 뿐이었다. 늙었어도 여자들은 그냥 계집애들이었다. 별일 아닌 것으로 법석을 떨며, 맹맹한 일로 배꼽을 잡고 깔깔대었다. 그런대로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이 되었다. 5박 6일의 고국관광을 마치고, 경애는 특별히 갈 데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서둘러 떠났다.
경애는 서울 근교에 숙소를 잡았다. 시장터에 나가서 구경하다가 순대를 먹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맛이 없었다. 거리를 배회하다가 멍게와 해삼을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누가 담은 고추장에 무슨 표 식초를 몇 대 몇으로 섞었는지 모르지만, 새큼 칼칼하면서도 달콤하여 아주 먹을 만했다.
갑자기 박민우가 그리워진다. 경애는 스스로 생각해도 훼까닥한 여자 같다. 미영엄마의 말이 생각나서, 경애는 분통이 터지기도 했지만, 자기를 과소평가한 민우가 맹랑한 놈인 것 같아 혼자 킥킥 웃어 본다. <기가 막혀. 멀쩡한 사기꾼 놈이네. 흉악한 놈.> 이와 같은 때는 너무 심심하니 사기꾼일망정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멍게 해삼 찍어 먹여 주면서 낄낄댈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경애는 미친 척하고 양평을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애를 속이려 들었던 박민우란 남자의 집에 아무도 모르게 들러 보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본인의 허락 없이 그의 고향 집에 찾아가는 것은 실례일 수 있겠지만, 민우가 경애에게 한 일에 비하면, 그 정도는 무례한 일일 수 없다.
이튿날 박민우의 고향이라는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를 찾아갔다. 이름을 대니, 이웃 아주머니가 민우의 큰아들이라는 사람을 불러내 주었다. 박민우의 큰아들인 박정호라는 사람이 나와서 어둑어둑하고 텅 빈 시골 다방으로 경애를 안내했다. 색깔 바랜 조화가 구석마다 피어 있는데, 건들기만 하면 조화 위에서 5년 전의 먼지가 재채기를 불러낼 것 같다. 커피를 주문하면, 파리 빠졌던 커피를 볼펜으로 파리만 건져낸 후, 내다 줄 것 같다. 생각 끝에 요구르트를 시켰다.
“별안간 불쑥 찾아와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시카고에 사시고, 아버지와 함께 간 교회 다니신다고요?”
“같은 교회 다니는 건 아니고, 교회 활동 때문에 만나서 함께 봉사활동을 했었죠. 이번에 볼일이 있어서 고국관광 팀에 합세했었어요. 봉사 활동할 때, 박민우 집사님이 저에게 주소를 가르쳐 줬었어요. 마침 오늘 이 근처에 놀러 왔다가, 잠깐 들렀어요.”
“아버지는 몸 건강하세요?”
“네. 항상 즐겁게 지내시더라고요. 교회 봉사도 열심이시고요.”
경애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정호는 검은 얼굴에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위로 치켜 쳐다볼 때는, 벌써 이마에 주름살이 뚜렷하게 보이는 완전 중년 남자였다. 가난에 찌들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온 듯, 정호에게서는 애늙은이 냄새가 났다.
“정호 씨는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농사를 짓습니다. 제 농토는 없고요. 큰아버지의 농토에서 큰아버지가 하시는 특수작물 재배를 도와드립니다. 오이, 그리고 참외와 땅콩 농사를 짓습니다.”
“본인의 농토는 없으시다고요?”
“다른 재주도 없고, 20살 때부터 늘 큰아버지 농사일만 도우며 살아왔습니다.”
“결혼도 안 하시고, 돈만 모으셨겠네요? 나이 더 들기 전에 결혼도 하셔야죠?”
경애의 농담 섞인 질문에, 정호는 쓸쓸히 웃었다.
“동생분도 만나 볼게요. 그래야 시카고 가서 아버지 만나면, 안부 전해 드리죠.”
정호는 못 들은 척, 대답도 없이 담담히 앉아있었다. 경애는 자기가 말실수라도 했나 걱정을 했다. 정호가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냥 일어섰다. 어떻게 돼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경애는 우물쭈물 뒤따라 일어섰다.
“가시죠. 제 동생도 만나고, 제 어머니도 만나 뵙고 가세요.”
경애는 흠칫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혼하고 따로 사는 엄마까지 만나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를 만나러 가자면, 바쁘다고 핑계를 대야 할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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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을 얻으려고 그랬든지, 서로 눈이 맞았든지, 그 사람은 아무튼 만난 지 한 달 만에 미세스 민이라는 어떤 과부와 결혼을 했었습니다.”
미영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 필라델피아에서 결혼했었어요? 박민우 씨라는 이가?”
“박민우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고추밭 식품점’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일도 괜찮게 하고 언변도 좋아서, 식품점 주인이 최대한으로 우대해 줬대요. 결혼하긴 했는데, 서로 싸운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결혼하여 싸울 수도 있고 뭐……. 초혼도 싸우는데 늙어서 만난 부부가 어디 그렇게 잘 맞겠어요?”
“좀 그렇겠죠?”
“그 박민우와 새로 결혼한 아내가 구타를 당해서 항상 얼굴에 상처와 멍투성이가 돼서 살았대요. 그래도 누가 그렇게 남의 부부싸움에 상관하겠어요?”
“어머, 남자가 새디스트인가?”
“그런데도 여자가 창피하니까, 말을 안 하고 그냥 살아왔었대요. 미련한 여편네지요? 글쎄 그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 아내한테 그렇게도 잘해 준대요.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정도래요. 저도 고추밭 식품점에서 몇 번 그 남자를 본 적이 있지만, 싱글싱글 웃고 우스운 소리도 참 잘해요. 보기엔 아주 멀쩡해요.”
“그 남자가 그 사람인지는 몰라도, 내가 본 후배의 친구인 남자분도 인상이 괜찮게 생겼더라고요.”
“사람을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그 결혼한 여자의 여동생이 뉴욕에 사는데, 그 집에 방문하러 왔다가, 그 언니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경찰에 신고했대요. 그래서 아내 폭행이 다 들통이 났대요.”
“아니 그래, 그 남자는 왜 여자를 그렇게 때려요?”
“그 남자가 술을 많이 먹는 데다가, 임포텐트라고 수군거리더라고요.”
“성불구자라고요?”
“그 말이 맞을 소지가 다분해요. 자기가 좀 그러니까, 공연히 여자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겠죠. 술로 밤을 보내면 자기는 잊고 넘어가지만, 여자는 어쩌겠어요? 그리고는 이혼을 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세뇌를 시켜서 꼼짝 못하고 살았었대요. 그런 여자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학대받고 가해자에게 영주권 얻어주고…….”
“그럼, 그 남자도 영주권은 얻었을 것 아니에요?”
경애는 될 수 있으면, 민우와 미영엄마가 말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영주권 나오기 전에 이혼 신청이 들어갔기 때문에 못 얻었대요.”
미영엄마가 누구를 모함할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토록 잘 알 수 있었겠느냐는 의심도 생겼다. 소문을 믿지 않는다고 쳐도, 이 엄청난 부담을 경애 스스로 끌어안으면서까지, 민우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박민우라는 사람, 인간성도 나쁜 사람이기 쉬워요. 고추밭 식품점 주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어요. 식품점 주인이 일자리도 제공해 주고, 오갈 데 없는 자기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돌봐 줬잖아요. 그러면 주인을 위해 헌신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주인에게 꾼 돈 10,000불을 갚지도 않고 그냥 자취를 감춰 버렸대요. 고추밭 주인아저씨같이 인정 많고 순하신 분이 분해서 애를 쓰더라고요.”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그렇게 그윽하고 매혹적인 눈빛을 가진 남자가 악마의 심장을 지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 징그러운 인간들.> 잡았던 물고기를 놓치고, 흔적이라도 발견하려고 애타게 너겁을 헤집는 호숫가의 어부처럼, 경애의 가슴에 공허한 혼란이 실물을 잡기 위해 요동쳤다.
경애는 기도하고 싶어졌다. 어떤 사람을 믿는 것은 다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한다. 신뢰에 전혀 금이 가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싶어진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신과 대화하고 싶다. 또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신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리고 그 박민우라는 남자는 가는 귀가 먹었대요. 그러니 오죽 오해를 잘했겠어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그 남자는 항상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라 하고 쳐다봐야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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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면 다문리는 드넓은 들판에 숲을 끼고 자리 잡은 한가한 동네였다. 시골집이었지만 대문도 꽤 컸는데, 문지방을 넘어서니, 널찍한 안마당이 펼쳐졌다. 큰아버지네 식구들은 모두 일하러 들로 나갔는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안채는 이중 서까래로 분여를 내달아, 화려하게 지은 한옥집이었다. 대청 앞에 미닫이 분합을 달아 놓아서, 고급 분위기 풍기는 기와집이었다.
바깥채는 오래된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한 듯했다. 슬래브 지붕으로 만들고, 벽돌과 유리창을 어설프게 내달아 놓아서, 가건물 같이 보였다. 그 바깥채의 사랑방 앞쪽으로 여닫이 얼룩유리 방문이 보였다. 그 방문 앞에는 아담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던지, 사랑방 문이 열리면서 박정호의 동생이라는 남자가 나왔다. 그는 불평 섞인 말에, 꽥꽥 심술을 섞어, 한마디 한마디 집어 던지며, 툇마루를 주춤주춤 내려왔다.
“헝아, 워디 가쩌쩌? 아까 찾꾸 또 찾어쩌. 들에서 들어옹 거 나 봐쩌, 아까.”
말투와 똑같이 그 남자는 불안정한 발걸음을 위험스럽게 떼며, 고꾸라질 듯 정호에게 덤벼들었다. 정호하고 달라서 동생이라는 사람은 바짝 여윈 체구였는데, 다리가 시원찮은지, 걸을 때는 금방 넘어질 듯이 휘뚝거렸다. 눈동자도 풀려 있었으며, 눈동자 한쪽이 따로 굴러다니는 사시였다. 얼른 보아도 그가 몽골리즘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정호는 말없이 그를 한동안 포옹하여 주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손님이 왔어. 우리 정석이 조용히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석이는 착해, 그렇지?”
“소온님? 누고? 누곤데?”
정호가 귓속말로 했으나, 정석은 손님이 반가웠던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물었다. 정석은 턱과 코 밑에 수염이 시커멓게 난 남자였다. 지독한 근시인지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도, 정석은 그의 얼굴을 경애에게 바짝 밀어 접근시키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경애는 속으로는 기겁을 하며 놀랐다. 정석이라는 남자가 금방이라도 그녀의 얼굴에 헤딩하던가, 주먹으로 그녀의 볼때기를 쥐어박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호가 눈치챌까 봐, 경애는 곧 침착을 위장하며, 고개만 뒤로 젖혀 위험성이 내재하는 공간으로부터 탈출했다. 겁에 질려 허둥대는 심장의 박동을 달래며, 경애는 억지로 웃었다.
동생을 보살피며, 큰아버지 집에서 붙어사는 정호는 얼마나 힘들까? 이런 동생을 낳아 형의 인생을 말뚝에 묶어 놓은 후, 이혼이라는 편리한 문을 열고, 자기 혼자 도망친 여자는 누구일까? 인간은 얼마만큼 사악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자기 개인 이익을 위하여 얼마만큼 비열해질 수 있을까? 그 여자를 이토록 독하게 만든 근본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민우는 어쩌면 진짜 성불구이기 쉽다. 성불구인 남편과 평생 누군가가 붙어서 돌봐 주어야 하는 아들을 떼어 놓고, 또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선 그 여자는 지금쯤 얼마나 행복할까? <오, 징그러운 인간들.> 그 여자가 여성이듯이, 경애도 역시 여성이라는 사실이 증오스러워진다. 별안간 주님께 기도드리고 싶어진다. 써도 삼켜야 할 약이라면 삼키고, 달아도 삼켜선 안 될 남의 사탕이라면 토해 놔야 사람일 수 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엄마를 두었다는 죄로, 가엾은 정호는 어렸을 때부터 발목이 묶였다.
정호는 경애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며,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그는 문을 열어 놓고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경애는 문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상한 악취를 느꼈다. 악취는 방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아랫목에 꽃 이불이 깔렸었는데, 우둥퉁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머리칼은 백발이었지만, 피부는 희고 고운 편이었으며, 눈 코 입이 수려하게 생긴 할머니였다. 제법 혈색이 좋은 그 할머니는 방그레 웃었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정호는 그 꽃 이불의 발치에 둘둘 뭉쳐 놓은 신문지 덩이를 번쩍 움켜쥐고 나가, 툇마루 밑에 집어 던졌다. 정호가 옆으로 지나갈 때, 지독한 대변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환자가 간신히 보아 놓은 대변 뭉치인 것 같았다.
“어머니, 시카고에 사시는 분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교회 봉사하시는 분이래요. 아버지도 지금은 기독교인이 돼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신다네요.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독실한 집사님으로 됐대요.”
정호는 경애가 한 말에, 자기가 꾸며낸 두어 마디를 더 추가했다. 심한 중풍으로 거의 사지를 못 쓰는 듯한 정호 어머니는 오른손의 손가락들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육체 중에 움직일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정호의 어머니가 누워 있은 머리맡에는 녹음기가 지성으로 테이프를 돌리며, 낮고 침착한 목소리를 중얼중얼 토해내고 있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누가복음 어딘가에서 읽어 본 듯한 성경구절이 흘러나왔다. 숨이 막힐 듯한, 방 안 공기였지만, 경애는 모르는 척했는데, 그 모르는 척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들리는 성경이라는 녹음테이프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들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경애도 성경 읽기 싫을 때, 들리는 성경으로 들으면,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성경을 쉽게 읽는 방법을 터득하여 오래된 고민거리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행복감에 웃음이 났다. 경애는 엉뚱하고 우스운 생각으로 두뇌를 메워, 지독한 냄새 때문에 참기 괴로운 분위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은실이를 부러워하던 열풍도, 혹시나 하고 민우에게 기대했던 가슴 설레는 사랑도, 한 점의 입김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북동 무역풍이 남동 무역풍의 영향으로 회귀선에서 무풍지대를 이루는 것 같이, 경애 안팎에서 일던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다. 잠시 건너뛰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호흡이 정말로 정지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단지 일어나 걸어 다니고 싶을 뿐인 이 여인은, 무슨 날 무슨 시에 태어난 팔자일까?
“아버지로부터 엄마에게 연락은 자주 옵니까?”
“한 달에 한 번꼴로 어머니한테 편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자리 잡히는 대로 우리를 미국으로 초청하시겠다고 해서, 그 구원의 날만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미국 오면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
“미국에 이민 갈 기회가 있다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맡을 것이고, 미국에는 정석이 같은 애를 돌봐 주는 기관이 있다니까, 제가 좀 숨을 쉴 것 같아요. 그러면 저는 평생 한 맺힌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정호의 목소리는 밝고, 장난기까지 섞여 있었다. 역겨운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경애는, 미국 가면 숨을 좀 쉴 것 같다는 정호의 호흡곤란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기꾼 아버지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아들을 두었다고 생각하니, 또 기도를 하고 싶어진다. 당장은 냄새가 너무 나니까 기도를 못 하지만, 집에 가서 오늘 저녁에는 꼭 기도해야겠다.
“생활비는 아버지가 보내 주세요?”
“아버지도 힘드시니까, 돈은 못 보내시고, 어머니 생신 때만 100불씩 보내시더라고요.”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하죠.”
“제가 압니다. 아버지가 마음만은 변치 않을 분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떠돌아다녔지만, 아버지의 마음만은 어머니나 우리 형제와 항상 함께 있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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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봄은 늦도록 쌀쌀했으며, 경애의 마음도 따뜻해지진 않았다. 빙수 그릇에 담긴 각종 과일은 각자 자기들의 색깔과 모양을 유지하여 자기들의 특성을 보이면서도, 또 다른 과일과 어울려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박민우 씨, 저를 사랑하시니까, 저와 결혼하려고 그러세요?”
민우는 무슨 생뚱맞은 질문이냐는 듯, 경애를 빤히 응시했다.
“저와 결혼하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신 있어요?”
“자신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둘 다 예순두 살입니다. 몇 년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80살까지만 산다고 해도 18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1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이혼한 부부 중 4년 이하로 결혼생활을 한 뒤 이혼한 부부가 30%이고, 10년 안에 이혼한 부부가 절반 이상이라더군요. 우리가 결혼하여 18년 동안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행복하게 산다면, 지금까지 허송했던 세월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경애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오, 징그러운 인간들.> 또 침묵이 흘렀다. 이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인간에게 무시당하고 희롱당한 것에 대한 복수는 끝까지 해 주겠다.
“박민우 씨는 애들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었습니까?”
“무척 사랑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를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더 이상은 추호의 미련도 없습니다.”
“전처인 그분은 어땠어요?”
“착한 여자였고 나를 희생적으로 사랑했었던 적도 있지만, 새 애인이 생겨서 벌써 20년 전에 나를 떠나갔습니다.”
“지금 그 여자는 어떻게 지내신대요?”
“재혼 후 중풍인지 무슨 병인지 걸렸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지만,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민우의 진심은 알 수가 없다. 아내를 상관 안 하고, 혹은 큰아들에게 아내와 작은아들을 떠맡겨 버리고, 경애와 한바탕 살아볼 셈인지도 모른다. 성불구라는 것도 사실은 확인되지 않은 미지수다. 영주권이 필사적으로 필요하니까, 마음 약한 과부 경애와 결혼하여, 영주권만 얻으려 드는지도 모른다. 영주권을 얻은 후,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가며, 자기가 가족을 보살피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들들과 아내를 미국으로 초청해다가, 작은아들과 아내는 양로원에 맡길 수도 있다. 그들을 양로원에 맡긴 후,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자기대로 경애와 놀아날 계획인지도 모른다. 경애는 그런 불합리한 행복을 차지할 뻔뻔스런 위인이 못 된다. 타인에게 불행을 끼치며 가로챈 사랑은 경애가 원하지도 않고 묵인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민우는 아는가? <아, 징그러운 인간들.> 내가 그런 여자로 밖에 안 보였다니 참지 못할 모욕이다.
“여자가 늙도록 자식들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다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면 슬플 거예요. 남편은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다가,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늙도록 잘 살 궁리를 한다면, 그 아내는 참 슬플 거예요.”
경애는 말없이 일어섰다. 민우가 쩔쩔매며, 미적미적 따라 일어섰다. 다급해진 민우가 떠나려는 경애의 팔뚝을 잡았다. 경애가 돌아서며 민우의 뺨을 힘껏 쳤다.
“정신 차려! 나쁜 자식.”
경애 손에 힘이 너무 세게 들어갔던지,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일이라 그랬던지, 민우는 의자로 털썩 주저앉았다. 경애가 밖으로 나와서 얼핏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니, 민우는 테이블에 엎어져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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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원이라고 해서 나왔으니까, 달리 착각하지 마세요.”
민우는 술이 꽤 취해 있었으나, 경애는 별로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아하, 너 술 못 먹는 놈이었었구나’ 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죄송해요 도경애씨, 용서해 주세요.”
“뭐가 죄송합니까? 말씀해 보시죠.”
“저 스스로와 도경애씨를 함께 속였습니다.”
“용서받고 싶으세요?”
“네, 용서해 주세요.”
“지금이라도 마음속의 진실을 숨김없이 털어 놓고, 하나님과 인간에게 용서를 빌면, 용서받을 거예요. 진심이 보이면, 저도 용서할 게요. 나를 이용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주권만 얻으려 했을 뿐이었죠?”
민우는 울기 시작했다. 경애는 짜증스러워졌다. 민우에게 만만하게 보인 스스로가 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민우는 아내와 아내 사랑하는 마음을 숨겼던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경애는 자신이 얕보인 것에 대하여서는 분통이 터지려고 했지만, 하나의 가엾은 여인, 민우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굳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실제로 얕보인 것이 아니라, 민우가 경애에게 사랑을 느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소용 있으랴? 그런 것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고, 따질 필요도 없었다.
“평소 술을 많이 마셨던 분인가요? 필라델피아에서 어떤 여인과 사기결혼을 한 후, 그녀를 학대했던 적이 있어요?”
민우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고달픈 인생길에 지쳐 쓰러진 나그네 같았다. 경애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서럽게 울고 있는 민우를 앞가슴에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경애는 그러한 스스로가 싫었다. <무시당해도 싸다, 이 못난 여편네.> 경애는 마음 약한 자신에게 불평을 했다.
“저는 원래부터 남자로서 자격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이 말은 민우가 성불구라는 고백 같이 들려서, 경애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성불구자인 민우가 미세스 민이란 여인과 섹스를 시도하려고, 허둥대며 진땀 흘리는 장면이 경애 머릿속에 떠올랐다. 성이 무엇이기에, 멀쩡한 사람을 무가치한 나무토막으로 만드는가? 성을 만든 조물주는 이 남성의 슬픔을 아는가?
“필라델피아에서 잘못했던 일이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제가 용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생각해 볼게요. 저 같은 피해자에게 용서 받으려면 그런 일도 고백해야 되지 않겠어요?”
“어떤 때는 술 좀 마셨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너무 사소한 것까지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빨래할 때 비누를 너무 많이 넣거나, 설거지하고 숟갈을 눕혀 놓으면, 밤새도록 불평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끓인 된장찌개가 짜다고 그녀가 국그릇을 난폭하게 밀어서, 국이 엎질러지던 날, 저는 그녀에게 폭행을 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여동생을 불러들여, 나를 거리로 내 몰았습니다.”
“고추밭 식품점 주인한테 돈 꾸고, 안 갚았어요?”
들통 난 비밀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자포자기하는 과정인지, 민우는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민우는 빈종이 위에 전화 번호 두 개를 적었다. 고추밭 식품점 주인의 것과 미세스 민의 전화번호였다.
“두 분에게 각각 전화해 보세요. 싸웠던 사람들은 양쪽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들어보면,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식품점 주인이 돈 받으러 당장 시카고로 쫓아오든가, 끝없는 불평만 하고 때려치우든가 할 것입니다.”
한 동안을 더 울고 난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도경애씨, 자격이 없는 사람이 사랑하려 들어서 죄송합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박민우씨, 아내를 사랑합니까?”
“제 아내와 제 작은 아들은 제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 같습니다.”
“여건이 되면, 아내와 작은아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실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됩니다.”
“역시 나는 안중에도 없었군요.”
민우는 테이블에 엎드려, 다시 한 번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경애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오, 징그러운 인간들.> 경애는 당장 집에 들어가지 않고, 민우 앞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자신이 기막히게 한심스러웠다.
“도경애씨, 저는 나쁜 놈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게요.”
“서류상 이혼은 된 상태지만, 처음부터 저는 제 처를 배반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처는 젊었을 때부터 떠돌이인 저와 제 아들들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전 젊었을 때부터, 월급을 받든가 가외 돈이 생기면, 술 마시고 노는 데에 써 버렸죠. 남편을 기다리며, 그 여자는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늙도록 일하다가 몸져눕게 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라고 저에게 요구했습니다. 저의 큰아들은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공부할 능력이 못됩니다. 제 처와 제 작은아들은 제가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되는 처지입니다. 아내와 아들들을 미국으로 초청한다는 바램은 이제 헛일임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한국으로 되돌아가, 그들을 보살피며 가족과 함께 살아야 될 것 같습니다.”
“박민우씨는 한국에 가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 수 있겠어요? 아들들은 어떻게 살아가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어차피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못난입니다. 희망도, 믿음도, 또 사랑까지도 제 몫은 이 세상에 한 조각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원래부터 저하고는 상관 없는 단어들이었었습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아이처럼, 민우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었다. 옆 테이블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젊은 남녀들이 짜증스러운 듯 찡그렸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놈이네.> 경애는 눈을 감았다. <오 징그러운 인간들.> 경애가 오히려 울고 싶다. 경애를 이용하려 들었던 이 사기꾼은 왜 경애 앞에서 울 필요가 있는가?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것이 흑백과 청탁을 구별할 수 없는 혼란의 구덩이처럼 느껴졌다. 누가 좋은 사람이며 누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란 말인가?
“박민우씨, 제가 후원자가 되어 영주권을 내 드릴게요. 저와 결혼해요.”
“무 무슨 뜻입니까?”
민우는 언제 뺨을 한 대 더 얻어맞을는지 모른다는 듯, 겁먹은 표정이었다. 민우는 숨소리까지도 멈춘 듯 모든 동작을 고정하고, 양쪽 귀의 신경을 세우는 표정이다. 입까지 헤벌리고 눈물 고인 그의 눈으로 경애를 쳐다보았다.
“나를 사랑할 필요 없어요. 같이 살아야 할 부담도 느끼실 것 없어요. 계약결혼이 아니니까, 나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어요. 단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아내와 아들들을 버리고 혼자 떠돌지 않겠다고요.”
그것이 바로 민우가 원하던 것이라는 듯, 민우는 이미 다시 흐느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평생 두고 갚겠습니다.”
“은혜는 갚을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사절이에요. 한 가지 일러둘 게 있어요. 결혼하여 진짜 동거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민국에서 가끔 조사하러 나온다니까, 우리 집에 신발과 입던 옷은 갖다 놓으세요. 영주권 나올 때까지요. 또 영주권 나온 뒤에도, 저와 결혼했었던 사실은 비밀로 해요. 어쩌면 아름답지 않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X  X
맑게 갠 월요일이었다. 숲 속 산책길이 상쾌했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곧 허물려 나갈 낡은 건물의 벽돌 벽이 무너지다 만 채 서 있었다. 헌 건물이 헐리고 이 자리에 언제 새 건물이 들어설는지 알 수는 없다. 언제 쓰일는지 모르지만, 건축에 사용될 거대한 자재들과 장비들이 헌 벽돌 벽에 바짝 붙어 쌓여져 있었다. 헌 건물 벽과 새 자재들 사이에 북쪽으로 난 좁은 틈이 있었다. 무심결에 그 틈을 들여다 본 경애는 희끄무레한 색깔을 발견하고, 바짝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목련나무가 그 틈바구니에서 가지 하나를 내밀고, 거기에서 찌그러진 목련 꽃을 한 송이 피우고 있었다. 온종일 햇볕 한 점 안 닿고, 토끼나 다람쥐조차 들여다 봐 주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피는 목련화는 경애를 한없이 쓸쓸하게 만들었다. 제 철을 놓치고 뒤 늦게 꽃이라고 불그스름하게 피우는 목련 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경애는 빙끗 웃었다. 직사광선은 일 년 내내 닿지 않는 틈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느라, 자기가 피울 수 있는 꽃을 피우니 기특하다. 막혀진 공간에 갇혀있는 목련은 언제 바깥 구경을 하게 될는지 기약이 없고, 언제 밑동 채 베어져, 흔적조차 없어질는지 모른다.
경애의 머릿속에 아직 남아 가끔 회오리치던 잡념들이, 아침 햇살에 새벽 별 사라지듯, 하나하나씩 자취를 감춘다. <나는 가질 만큼 가졌다.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무슨 명예가 그렇게도 소중하단 말인가?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다. 할 수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X  X
경애는 민우와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만났다. 그들은 시청에서 결혼신고를 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경애는 주차장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민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경애씨, 고맙다는 표현으로 키스 좀 해 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우리는 실제로 결혼한 게 아니고, 글씨만 썼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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