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을 그린 조국에서의 첫 번째 시선(원종국)

종합지 조회 수 6455 추천 수 4 2014.09.21 09:55:32
작가 : 원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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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을 그린 조국에서의 첫 번째 시선
: 채길순의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 연구


원종국 | 元鍾國, Won, Jong-Kook, 소설가

 

1. 동학혁명, 고려인, 어둠의 세월들
2. 조국을 등진 자의 회향곡
3. 이국땅을 떠도는 자의 회향곡
4. 맺음말


국문초록

채길순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학혁명의 작가’이며, 또한 ‘동학혁명의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작품 이력에 있어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은 사뭇 독특한 지점을 점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조선과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시공간의 스케일은 차치하더라도, 한국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 없던 고려인의 삶을 곡진하게 담아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1880년에서 1923년까지, 한 집안 네 세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핍박을 견디다 못해 조국을 등져야 했고, 러시아를 떠돌아야 했으며, 그들의 역사에 휘말리다가, 끝내 주검이 되어서야 강에 띄워진 ‘어둠의 세월’을 긴박하게 담고 있다. 두 권으로 묶인 이 작품은 죽음과 어둠을 넘어간 유이민 1세대 최 블라디미르의 회향곡과 남의 역사의 폭풍과 수레바퀴에 깔려 숨져간 유이민 2세대 최 베오판의 회향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잡하고 긴박한 수많은 사건들을 따라 가면서도 흥미진진한 설정으로 엮어낸 ‘능숙한 이야기 솜씨꾼의 재주’ 속에서, 우리는 잊혀질 뻔했던 고려인의 삶을 비로소 우리 민족 모두의 것으로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지 150년이 되는 해이며,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이 출간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 속의 고려인은 단순한 탈주민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전형이며, 세대를 이어가며 온몸으로 투쟁해온 우리 민족사의 소중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낸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 역시 뜻 깊은 작업일 터다. 유라시아의 변방에 산재한 고려인의 쓸쓸했던 과거사와 함께, 일찍이 그들의 삶을 한국문학 속으로 받아들인 채길순 작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첫발을 떼었다.

주제어: 채길순, 어둠의 세월, 고려인, 디아스포라, 러시아 이주, 정체성, 동학혁명


1. 동학혁명, 고려인, 어둠의 세월들

채길순은 주로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온 소설가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근대사는 외세의 침탈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고난과 역경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특히 동학혁명은 외세와 봉건질서에 대항해 일어섰던 민초들의 저항정신과 좌절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한국사의 중요한 지점이며 거대한 흐름이다. 하여 동학혁명을 소설의 중요한 화두로 삼는다는 작가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역사의 우물을 들여다보면 심연의 바닥에서 서늘한 비극을 만날 때가 있다. […] 굳이 역사가 오늘의 문제를 일깨우는 지혜라는 범박한 말을 빌지 않더라도, 외세가 밀려들고 세상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부패하여 더는 견딜 수 없이 되었을 때 민중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피면 작금의 우리 삶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동학혁명을 오롯이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소설에 천착해온 그의 작가정신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소설 동학』과 이 책의 개정판인 『동트는 산맥』은 모두 동학혁명을 중심축으로 한 대하역사소설이며,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과 『흰옷 이야기』, 그리고 최근 발간된 『조 캡틴 정전』 역시 서사의 발단은 동학혁명에 두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릇 채길순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학혁명의 작가’이며, 또한 ‘동학혁명의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동학혁명에 대한 식견은 삼십여 년에 이르는 꼼꼼한 취재와 현지답사, 인터뷰, 문헌연구 등을 토대로 한 것으로서, 이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동학혁명의 소설화 과정 연구」를 상재한 것이라든지 전국의 동학혁명 사적지를 찾아 기행문으로 엮은 『새로 쓰는 동학기행1』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민족문학의 정립이 필수적이며, 그 근간은 동학혁명에서 찾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책으로 출간된 채길순의 모든 소설 작품에 동학혁명이 중심 혹은 주변부에 놓여 있다는 점은 그의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잘못된 세계화에 저항하고 좀더 바람직한 세계문학 창조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라도 나라마다 민족문학 정립이 필요한 때다. 특히 분단 상황 아래 우리의 문학은 남북 어느 한쪽의 문학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 오늘날 분단의 역사가 외세의 질곡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리 문학의 원형은 동학혁명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이력에 있어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은 사뭇 독특한 지점을 점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조선과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시공간의 스케일은 차치하더라도, 한국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 없던 고려인의 삶을 곡진하게 담아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1880년에서 1923년까지, 한 집안 네 세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핍박을 견디다 못해 조국을 등져야 했고(그 배경에 동학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를 떠돌아야 했으며, 그들의 역사(러시아혁명과 세계대전)에 휘말리다가 끝내 주검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흐른다는) 강에 띄워진 ‘어둠의 세월’을 긴박하게 담고 있다. 두 권으로 묶인 이 작품은 작가의 설명처럼 “상권은 죽음과 어둠을 넘어간 유이민 1세대 최 블라디미르의 회향곡이고, 하권은 남의 역사의 폭풍과 수레바퀴에 깔려 숨져간 유이민 2세대 최 베오판의 회향곡이다.” 공산권 국가로의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냉전의 시대에 이 책의 초고가 씌어졌다(1980년)는 점과, 아직 주목받지 못했던 고려인을 향해 조국에서 보내준 첫 번째 시선이라는 점은 놀랍고도 값진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층이라는 계급간 모순의 고리를 끊는 투쟁의 전형을 유이민사에 두어 1980년에 「회향곡(懷鄕曲)」이라는 중편소설을 써서 황소 한 마리 값을 받았다.
그 뒤에도 「회향곡」은 십 년이 넘도록 나를 뒤척이게 했다. 시베리아 벌판을 떠도는 원혼 한 자락이 붙어 다니었는데, 나는 한 해 전 어느 새벽에 길어 올린 두레박 속에서 또렷한 환상 하나를 건져냈다. 곧, 그들은 왜 그 땅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문제―유이민사가 결코 개인이나 한 집단의 운명적인 문제라기보다 이 땅의 역사적인 문제라는 점이었다.
우연히도, 백 년 전 7․80년대 이 땅의 지배자들은 제 권력과 부를 위해 백성들의 목을 쳤다. 백성들은 망나니의 북소리와 함께 흰칼 아래 참혹하게 죽어갔다. 민중은 이 땅의 어둠을 넘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도피했다. 꽃피는 날에 돌아오마고 떠났던 그들은 ‘꼬레스키’라는 서러운 이름을 달았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동안 제정 러시아 땅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혁명이란 폭풍이 꼬레스키를 할퀴고 지나갔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꼬레스키를 밟고 지나갔다. 나는 이 참혹한 역사를 보면서 분노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러나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은 출간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독특한 소재와 스펙터클한 전개는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을 만했지만, 유라시아의 변방에 산재한 고려인의 쓸쓸한 과거사는 아직 한국인에겐 관심 밖의 영역이었던 듯하다. 다른 작가들의 관심 역시 뒤를 잇지 못했는데, 그나마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윤후명의 단편소설 「하얀 배」와 최근 출간된 양병순의 『까레이스키: 카자흐스탄 고려인 이야기』, 그리고 문영숙의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등의 소설 작품과 22부작으로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까레이스키」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단편적인 소재로 언급되었거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혹한의 땅에 내팽개쳐진 고려인들의 삶을 다루는 데 치우쳐 있어, 고려인들의 근원을 찾아 아로새긴 역사물로서는 한계를 보인다.
올해는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지 150년이 되는 해이며,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이 출간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본고는 국내 문학 작품으로서는 처음 고려인의 원형적 모습을 본격화한 이 책의 가치를 기리는 의미에 더해, 냉혹한 타지로 내몰려야 했던 고려인들의 삶에 대해 조국의 문학이 이미 20여 년(초고를 기준으로 하면 33년) 전부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되짚는 자리가 될 터다. 역사 속의 고려인은 단순한 탈주민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전형이며, 세대를 이어가며 온몸으로 투쟁해온 우리 민족사의 소중한 부분이므로, 그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낸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 역시 뜻 깊은 작업이겠기 때문이다.


2. 조국을 등진 자의 회향곡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상권 앞쪽에 실린 ‘원고 두 뭉치’는 프롤로그에 해당하고, 하권 뒤쪽에 붙은 ‘회향곡’은 에필로그 또는 후일담의 형식이다. 여기서의 ‘원고 두 뭉치’란 이 책의 두 주인공인 최 블라디미르(조선명 ‘최끝동’)와 최 베오판이 쓴 ‘회향곡 원고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 원고들이 소설의 본문인 셈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나중에 이 원고들을 입수해 번역․출간을 계획하고 있는 번역가가 유추한 내용 혹은 자전적 후일담으로 보인다. 부연하면, 1993년에 러시아어로 쓰인 원고 두 뭉치를 입수한 번역가가 두 편의 회향곡을 번역한 뒤, 원고 입수 경위를 유추하거나 정리한 내용을 앞뒤에 짤막하게 덧붙여서 책으로 출간하는 형식을 띤 셈이다.
최 블라디미르의 회향곡인 상권의 시작은 1880년, 최끝동이 여섯 살일 무렵이다. 몰락한 양반으로 보이는 아버지 최명문은 동학도로 있다가 쫓기듯 함경도 경흥 땅에 숨어들어와 살고 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세리(稅吏)들의 횡포를 피해 국경을 넘다 되잡혀온 일가가 장터에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은 장터의 북소리와 함께 최끝동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지고, 최명문과 함께 동학을 했던 임치상이 찾아들면서 경흥 땅에도 민란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조정으로 가던 관찰사의 금괴를 빼돌린 뒤 숨어든 함흥 감영의 막비 피병규의 선동이 보태어지면서 최끝동의 집안은 민란에 휩쓸리고 만다. 결국 민란을 주도한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최명문은 옥살이 끝에 효수당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하려다 엄 첨지의 꾐에 빠져 재산을 잃고 몸까지 더럽혀지고 만다. 누나인 금단은 국경을 넘는 임치상을 따르고, 동생인 은단은 관(官)과 청상(淸商)의 계집장사에 희생양이 되고 만다. 끝동은 스승인 김 훈장의 딸 순이와 급히 혼인하지만, 이어 김 훈장과 형 동근이 주도한 경흥 장터의 민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두 집안은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마침내 동근은 병방과 엄 첨지를 살해한 후 끝동과 은단의 월경(越境)을 도운 뒤 홀연 사라진다. 집안의 풍비박산 끝에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잔혹한 조국을 버리고 미지의 러시아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사건들은 긴박감을 더해간다. ‘광복 50주년 기념 한국일보 1억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인 『흰옷 이야기』의 심사평에서도 언급되었듯, 채길순 소설의 미덕은 “속도감”과 “구수한 입담” 등 “능숙한 이야기 솜씨꾼의 재주”이다.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에서도 이러한 장점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도리어 수많은 등장인물의 얽히고설킨 인연들로 인해 속도감과 긴장감은 한층 배가된다. 그러나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은 조선 후기 역사 속에 등장하는 민초들의 “참혹한 비극성”을 허투루 단순화하기보다 마치 “풀이 있고, 그 위를 불어가는 혹독한 바람의 이야기”를 낱낱이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사실적인 묘사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복잡하고도 빠른 전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유이민(流移民)의 삶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준다.

“저기 번뜩이는 강이 두만강이고, 뒤쪽으로 검게 보이는 게 노국 땅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우리는 저길 건너야 한다.”
형이 말할 때 나는 등지고 온 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달빛을 쓴 산은 안개가 띠처럼 둘러져 있어서 꼭 깊은 꿈속에 든 듯 푸근하게 보이었다.
“끝동이 너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게냐? 그따위 정나미 떨어진 땅일랑 뒤돌아보지도 마라. 이제 살아갈 새 땅이나 잘 보아두란 말이다!” (상권, 188쪽)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의 삶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포시에토, 바라바셰프, 수이푼, 포크로브, 키예프, 수찬, 슈코토프 등의 마을에 일만여 명”(상권, 202쪽)의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는 하나 생사여탈권은 러시아의 지배자들에게 있었던 것. “두고온 조선 땅이나 쫓겨 들어온 죽음의 땅에서조차 지배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상권, 235쪽) 덧붙여 신두밤, 미륵녀 내외의 암투에 걸려 ‘죽음의 폴타프카 골짜기’에서 벌목공으로 연명하는가 하면, 동포들의 삶을 옭죄어 제 살 궁리를 하는 사악한 피병규나 마장섭의 마수(魔手)를 피해가며 살 길을 도모해야 했던 것이다. 통대인 알렌코의 첩이 된 은단이로 인해 잠시 고난을 피하는가 싶다가도 ‘헌 계집’이란 트집으로 쫓겨난 뒤론 일찍이 김 훈장이 알려준 대로 ‘북쪽으로, 또 북쪽으로 가는 것만이 살 길[北方徒生, 又北方徒生]’로 알고 스퍼스크 달리니를 거쳐 하바로프스크까지 ‘떠돌아 들어가[流移]’게 된다. 그 와중에 동포애를 느끼게 만드는 박두배나 갑산댁을 만나기도 하고, 죽은 줄 알았던 김 훈장, 임치상, 금단이 누나 등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알렌코의 책사인 안드레이의 도움으로 도망치던 끝동은 총 맞은 말과 함께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만, 간호사인 아그라페나 등의 도움으로 소생한 뒤 그녀와 결혼해 ‘최 블라디미르’가 된다. 다니엘 신부의 도움으로 제화공장을 차리며 간신히 러시아 땅에 정착한 그에게 이번엔 갑산댁이 나타나 아이(나타샤)를 맡긴 후 숨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1904년, 슘꼬프 경관이 나타나 왜군의 밀정 혹은 사회주의자란 혐의로 블라디미르를 체포한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사건들 속에서 최끝동은 마침내 러시아 사람이 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미완의 정착일 뿐이다. 죽음의 고비마다 최끝동(혹은 최블라디미르)은 어릴 적 들었던 ‘경흥 장터의 북소리’를 떠올리고, 그러한 죽음의 공포는 유이민의 삶을 더욱더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머니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새벽 닭소리에 쫓기는 유령같이 훌쩍 달아났다. 그러다 또 어떤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거기는 형장이었다. 어머니는 금세 온데간데없고 나는 몸이 묶여져 목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망나니의 칼이 허공에서 번쩍거리며 춤추었다. (상권, 199쪽)

그동안 벌목장에서는 조선 사내 둘이 죽어 나갔고, 만주 사내들과 노국 사내들도 연일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새벽에도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는데 막사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천천히 허공을 메우고 있던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천천히 북소리가 일고 있었다.
둥, 둥 둥…….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연 칼날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내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죽어서 저승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어둠의 소용돌이와 칼빛이 어둠을 뭉턱뭉턱 끊어내었다. (상권, 233쪽)

대개 쫓기는 꿈이었는데, 우수리스크 알렌코네 하인들에게 쫓기거나, 바람처럼 일어나는 경흥 장터의 북소리와 함께 칼 든 망나니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쫓기는 사람은 늘 달랐다. 쫓기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형이거나 아버지이기도 했다. 가끔은 김 훈장이나 임치상, 금단이 누나와 은단이, 순이이기도 했다. (상권, 275쪽)

“블라디미르…… 이방인의 마르크시스트들은 사형이라네. 자네도 꼼짝없는 마르크시스트가 되어 있네. 모스크바 대주교에게 청원을 내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그동안 기록이나 남겨놓게.”
다니엘 주교가 펜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촛불을 끄는 바람 대신 죽음의 북소리가 살아난 것은 이때부터였다. (상권, 304~305쪽)

최끝동이 경흥 장터의 처형 장면을 목격한 것은 1880년, 두만강을 넘어 우수리스크에 든 것은 1894년이다. “조선에서는 불법 월경자가 잡히면 장터에 사람을 모아 놓고 공개 효수(梟首)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1884년 국교가 수립되고 이어 1888년에 조-아육로통상장정(朝俄陸路通商章程)이 발효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육로통행이 자유로워지고 조선인의 월경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끝동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유년기의 지워지지 않는 기억, 또는 조국이나 지배자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1891년 연흑룡주 총독 코르프는 고려인 이주민의 법적 지위를 3개 부류로 구분해 다루면서 고려인 이주에 대해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 국교수립 이전에 이주한 1부류 사람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가구당 15데샤티나(16.4ha, 약 4만 9천여 평)의 토지를 분배했다. 그러나 국교수립 이후에 이주 정착한 2부류 사람들은 매년 러시아 비자를 발급받도록 했다. 이들은 체류기간 2년이 만료되면 조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3부류는 여권과 비자 없이 일자리를 찾아 불법적으로 러시아에 들어온 사람들로서, 이들에게는 국유지에 정착해 생산 활동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여 당시의 고려인은 토지를 분배받은 귀화인 ‘원호(原戶)’와 토지 소유권이 없는 비귀화인 여호(餘戶), 그 외 떠돌이 품삯노동자 등으로 엄격한 신분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2부류 또는 3부류로 분류되었을 최끝동의 불완전한 신분,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는 당시의 정세와 함께 최끝동 일가를 불안에 떨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터다. 이 같은 불안의식은 그의 둘째아들 최 베오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 하권에서도 고스란히 들어난다.


3. 이국땅을 떠도는 자의 회향곡

채길순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소설적 재미를 첫째로 꼽는다. 때로 줄거리가 복잡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는 그만큼 소설의 속도가 빠르다는 뜻도 있다고 본다. 불필요한 묘사는 과감하게 버린다. 그렇지만 대화 하나 묘사 하나도 흥미와 연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라는 답을 한다. 또 ‘자신의 소설적 장점으로 자부하고 싶은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빠르게 진행해 나가는 속도감과 서술 및 대화의 재미성에 있다고 여긴다. 마치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평하는 독자가 많았다.”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 하권의 복잡한 전개와 속도감 역시 상권에 못지않다. 1907년, 하바로프스크에 살고 있는 최 베오판 가족에게 러시아에 유학 가 있던 나타샤가 돌아온다. 안드레이와 더불어 최 블라디미르의 제화공장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전개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나타샤를 마음에 두고 있던 형 젠지노프 역시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 학습을 시작하는데, 이에 더해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던 베오판의 배 다른 형 최인섭(최끝동과 김순이 사이)을 비롯해 임치상, 김 훈장 등 고려인들이 쫓겨 오고, 공채나 세금 등의 명목으로 차르 정부의 수탈이 더해가는 등 아버지의 사업은 나날이 곤경에 처한다. 제화공장의 파업으로 말미암아 안드레이, 나타샤, 젠지노프 등이 수감되는데, 나타샤는 위장 전향서를 쓴 뒤 현청의 고위 관리인 뚜루게네프의 첩이 되어 여러 가지 음모나 테러를 사주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파급을 막기 위한 조처로 마침내 아버지의 제화공장은 정부에 몰수당하고 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 실망한 젠지노프는 ‘철저한 러시아인’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군에 입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골이 되어 돌아오고, 병든 아버지마저 니꼴라스크로 이주한 뒤 얼마 못 가 숨지고 만다.
베오판은 임치상에게 입적되어 길러진 임영아와 결혼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참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백위군으로 입대해 연일 패퇴하던 베오판은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가 ‘낙인타살’ 형을 언도받는데, 때마침 쏟아진 포격의 틈을 타 탈출한 뒤 문둥이 마을에 숨어 지내다 다시 탈주한다. 어느새 큰 세력으로 성장한 혁명군에 잡혀 마장섭, 안드레이 등을 만난 뒤 과거의 연인 나탈리아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시베리아 바이칼 호를 거쳐 꼬레스키 마을에 은둔해 있게 된다. 그곳에서 베오판은 박두배를 만나 대한독립군단을 찾아가려 하지만, 이른바 자유시사변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가 볼셰비키 혁명군에 잡혀 감금당한다. 그러나 그의 문재(文才)를 알아봐줬던 과거의 스승 체르코프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하바로프스크에서 마약 중독자가 된 나타샤를 만나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행 기차를 탄다. 우수리스크의 집에 들러 동생 엘리샤베타와 아내 임영아, 그리고 아들 한웅을 만난 베오판은 강가 움집에 묵으며 아버지의 회향곡에 이은 자신의 회향곡을 쓴다. 마지막으로 나타샤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밀항선을 타려던 베오판은 ‘조선 청년 자율단원’에 붙잡혀 교살 당하고 만다.
이야기는 상권의 첫 부분 ‘원고 두 뭉치’로 흐른다. 1923년 3월, 러시아 경관의 묵인 하에 베오판과 나타샤의 시신은 (꼬레스키들 사이에서 조선으로 흐른다고 믿겨지는) 강에 띄워진다. 그리고 후일담인 하권의 끝 부분 ‘회향곡’에 이르면, 두 편의 회향곡을 조국에 건네준 최 엘리샤베타 노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그들 고려인의 삶과 회향곡을 음미하는 것으로서 기나긴 서사가 마무리된다.
디아스포라의 여정은 상권에 이어 하권에서도 복잡하고 속도감 있게 지속된다. 여러 차례 붙잡히고 탈출하는 사건들의 지나친 연속은 일견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한 방법으로서는 탁월한 전개 기법이라 할 만하다. 봉건적 차르 시대와 사회주의 혁명기, 게다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에 맞서는 민족주의 진영의 틈바구니에서 유이민자인 고려인들의 삶이란 단순히 개연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서사 영역이 아닐 터다.
묘하게도 상권과 하권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은 비슷한 형식으로 맞물리는데, ‘몰락해가는 조선조의 부패한 관료’와 ‘몰락해가는 차르 정권의 부패한 경관’이 그렇고, ‘조선의 관군’과 ‘러시아의 백위군’이 그렇고, 또한 새로운 탈출구를 도모하는 민중운동으로서의 ‘동학’과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 등이 그렇다. 그러나 상권보다 하권의 상황은 보다 비참한 것이다. 아버지 최끝동이 조선의 관군과 민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레 민란 세력을 지지하다가 월경(越境)한 것에 비하면, 아들 최 베오판은 차르 정부의 백위군과 볼셰비키 혁명군, 그리고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갈팡질팡한다. 이는 모두 최 베오판이 이방인 2세이기 때문이다. “짜르의 훈장을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의 공장을 몰수해 간 현청 관리들을 보기 좋게 복수하겠어. 이방인으로서 보란 듯이 말야.”(하권, 127쪽) 하고 말하는 형 젠지노프에게 “흥! 우린 누가 뭐래도 검은 머리털과 검은 눈동자를 바꾸지 않는 한 어둠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이방인이야. 우리에게 그 같은 이스크라(불꽃)는 허망할 뿐이야.”(하권, 128쪽)라고 대꾸하는 베오판의 모습은 이런 처지를 잘 대변한다. 그리하여 아버지 최 블라디미르에겐 꿈에도 그리는 고향이라도 있었던 반면에, 아들 최 베오판에게는 “고향마저 없는 처지”(하권, 282쪽)라는 한탄이 배어나게 되는 것이다. 

“네 아버지는 너희들이 아는 대로 조선 땅에서 쫓겨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다. 이 땅에 들어오신 뒤로 하루라도 ‘내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잊으신 적이 없으셨다. 지금도 조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장 떠나실 분이다.” (하권, 92쪽)

“여보! 차라리 난 모든 것 잊고 우리 조선 유이민이 모여 산다는 우수리스크로 돌아가고 싶소. […] 이곳에는 이제 우리의 낙이라곤 없소. 자나 깨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형체도 없는 악마, 자꾸 숨통을 죄는 손들……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소.” (하권, 136쪽)

“베오판! 조금만 참자. 우리는 곧 조선 땅에 돌아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아버지, 제발 그런 꿈 같은 건 버려요. 우린 조선에 갈 수도 없어요.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져도 뿌리를 내려야 하듯, 이제 우리도 이 땅에서 뿌리 내릴 곳을 찾아야 해요.” (하권, 151쪽)

“귀관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문득 법무관의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뿌리도 없이 부초처럼 떠돌았던, 허망한 세월이었다. 이 닳고 헤진 육체를 이제 어디에다 정착시킬 수 있단 말인가. 짜르가 지배하는 세상도, 혁명군이 지배하는 세상도, 그렇다고 꼬레도 내게는 설 땅이 아닌 것이다. (하권, 257~258쪽)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진정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거긴 내가 돌아갈 땅이 아니오! 난 조선인도 아니란 말이오.”
[…]
“꼭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소?”
내가 참담한 심정이 되어 물었다. 영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아래로 내려 감았다. 그런 영아를 보며 나는 아득하게 절망했다.
[…]
“아버지는 돌아갈 곳이 있어 회향곡을 쓸 수 있었지만, 내가 돌아갈 고향은 없소.” (하권, 280~282쪽)

“‘꼬레스키’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하권, 10쪽) 점철된 인물인 나타샤의 상징성은 보다 더 극명하다. 자신을 키워준 양아버지를 배척해가면서까지 사회주의 운동의 신봉자가 되었고, 그리하여 위장 전향하여 차르 정부의 심복인 고위 관료의 첩으로 암약하지만, 결국엔 연인 안드레이와 혁명군으로부터 버림받은 채로 혁명군과 백위군, 러시아인과 ‘꼬레스키’의 ‘몸을 받아가며’ 마약에 취해 있는 나타샤의 말년은 당시의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총체적인 형국에 다름 아닐 터다.
이러한 민족사적 비극은 이 작품의 원거리에 배치된 ‘자유시사변’에 이르러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건은 “일제에 대항한 여러 정치조직 간 주도권 다툼, 단일 고려인 군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이견과 합의 부재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이러한 극단적 노선 다툼의 비참한 결말은 조국으로부터 쫓겨난 디아스포라의 희망 의지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인 데 더해, 그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안기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고려인인 박두배와 유대인인 체르코프의 공통된 의견은 유이민자로서의 배신감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오하묵․마장섭이 이끄는 이르쿠츠크지구 고려군정회의(高麗軍政會議)와 이동휘 계열이 이끄는 상해파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이 여간 심각하지 않아. […] 함께 힘을 합쳐서 혁명 당국과 교섭을 해도 모자라는 판에 세력 다툼이니 한심한 일이지.” (박두배의 말; 하권, 232쪽)

“꼬레스키들은 여럿으로 갈리어 아직 끝나지도 않은 혁명 뒤에 차지할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었어. 꼬레스키들은 볼셰비키 혁명군에게 서로 투쟁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제 편끼리 혈투를 했단 말이다.” (체르코프의 말; 하권, 240쪽)


4. 맺음말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에서는 고향을 등진 자도 이국땅을 떠도는 자도 결국 정착하지 못한 채로 역사의 수레바퀴에 처참히 밟히고 말았다. 1대인 최명문은 조선에서 당당히 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조선의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2대인 최끝동(최 블라디미르)은 조선을 버리는 길이 살 길이라 여겼으면서도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다가 회한 속에 죽었으며, 3대인 최 베오판은 ‘꼬레스키’와 ‘러시안스키’ 사이에서 부유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로 동족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4대인 최한웅은 러시아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길 원했으나 강제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알마타로 내쫓기고 말았다. 어느 것도 그들이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풀 위를 불어가는 혹독한 바람’이 잠시의 틈도 주지 않았던 때문일 터.
다음은 작품 말미에 나오는 최 베오판과 최한웅의 대화인데, 이는 이들 4대의 유이민으로서의 운명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아버지. 우리는 정말 조선 땅으로 가나요?”
“글쎄……. […] 너는 조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머니는 저 강 끝에 있다고 하셨어요.”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죽어서도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단다.”
“저는 아버지가 꼬레스키가 아니라 러시아 사람이길 바랐어요.”
“그건 왜?”
“……모르겠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지만…….”
“그에 비해 꼬레스키는 어떻더냐?”
“가지도 못하는 땅에 갈 생각을 하면서 늘 우울하게 살아요.” (하권, 289~290쪽; 대화 위주로 편집)

복잡하고 긴박한 사건의 끝없는 전개 속에서도 이 작품이 읽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데는 잘 짜인 설정이 큰 몫을 한다. 액자소설의 구성 속에 담긴 두 편의 회향곡이 그렇고, ‘과거-대과거-현재’의 구성으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플롯이 그렇고, 조선에서 연해주를 거쳐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차차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내쫓겨 우수리스크로 돌아오는 공간 이동도 그렇다. 요컨대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며,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종국에는 회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설정인 셈이다.
좀더 미시적인 설정은 어떠한가. 최끝동이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블라디미르가 된 것은 삶에 대한 간절함 때문일 터이나, 최 베오판이 고려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결국 우수리 강에 수장된 것은 이방인으로서의 덧없음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의 색다른 표현일 터다. 또한 최끝동이 개명하여 블라디미르가 되고 그 아들을 베오판이라 작명하지만, 4대에 와서는 도리어 ‘한웅’이란 한국식 이름을 붙이게 된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의 책 표지에 둘려진 띠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안이 적혀 있다. “무관심 속에서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이야기!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우리 민족의 이야기!” 본고는 채길순의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비롯해, 이 책이 고려인의 삶의 궤적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조국에서의 첫 시선이란 점을 뜻 깊게 되짚어보았다. 냉전시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권 국가로 멀리 이산(離散)된 한 민족에게 보낸 작가의 시선은 핍진한 것이었다. 복잡하고 긴박한 수많은 사건들을 따라 가면서도 흥미진진한 설정으로 엮어낸 ‘능숙한 이야기 솜씨꾼의 재주’ 속에서, 우리는 잊혀질 뻔했던 고려인의 삶을 비로소 우리 민족 모두의 것으로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들 고려인들에 대한 한국 문단의 지속적인 관심과 문학적 형상화가 뒤따르지 못했던 점과, 그리하여 그간의 선행연구와 작가연구가 미진할 수밖에 없었던 점은 후학들의 숙제로 남을 터다. 유라시아의 변방에 산재한 고려인의 쓸쓸했던 과거사와 함께, 일찍이 그들의 삶을 한국문학 속으로 받아들인 채길순 작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참고문헌

기본자료
채길순, 『어둠의 세월: 꼬레스키 회향곡』, 마루, 1993.

참고자료
채길순, 『소설 동학』(1-5), 하늘땅, 1991.
채길순, 『흰옷 이야기』(1-3), 한국문원, 1998.
채길순, 『동트는 산맥』(1-7), 신인간사, 2001.
채길순, 『조 캡틴 정전』, 화남, 2010.
채길순, 「동학혁명의 소설화 과정 연구」, 청주대 박사학위 논문, 1999.
채길순, 『새로 쓰는 동학기행1』,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2.

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주류성, 201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비, 2006.
정은경, 『디아스포라 문학』, 이룸, 2007.
윤후명, 「하얀 배」, 『하얀 배: 1995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5.
양병순, 『까레이스키: 카자흐스탄 고려인 이야기』, 가이드포스트사, 2009.
문영숙,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푸른책들, 2012.

 

필자 약력
원종국 (소설가, 동국대 겸임교수)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용꿈>과 르포집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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