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미국의 작가 겸 사회사업가 Helen Adams Keller,1880.6.27~1968.6.1
1887.3.3 앤 설리번 선생과 처음으로 만나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 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 설리번 선생과의 만남,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
헬렌과 애니. 1887년 처음 만났던 해의 모습
마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무렵, 소녀는 현관 앞에 나와서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앞치마는 흙투성이였다. 마차에서 내린 어떤 사람이 현관으로 다가왔다. 소녀는 그때의 만남을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뻗쳤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나를 끌어당겨 양팔로 꼭 감싸 안았다. 그녀는 온갖 사물을 내 앞에 드러내 보이려고 한 사람, 사물의 비밀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내게 사랑을 주려고 예까지 찾아온 사람이었다.” (헬렌 켈러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 중에서)
하지만 그 순간 만큼은 기쁨보다도 놀라움과 두려움이 더 컸는지, 소녀는 자신을 끌어안는 그 낯선 사람을 뿌리치고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 뒤에 쓴 글에서 헬렌 켈러는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한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 있다면 바로 이날, 내가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난 날이다. 무엇으로도 측량할 길 없으리만치 대조적인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생각할수록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1887년 3월 3일, 만 일곱 살을 꼭 석 달 남겨놓은 때였다.” (앞의 책에서)
설리번 선생은 학교를 수석 졸업한 수재, 하지만 헬렌 켈러처럼 시각 장애인
헬렌과 애니. 1888년 케이프코드에서
헬렌은 1880년 6월 27일에 미국 앨라배마 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애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19개월 되었을 때에 뇌척수막염 으로 추정되는 병을 앓고 나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고 말았다. 헬렌이 여섯 살 무렵, 소녀의 부모는 당시 장애인 교육에 앞장서던 퍼킨스 학교의 교장에게 부탁해서 가정교사를 한 사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선발된 인물이 바로 앤 설리번(이하 ‘앤’의 애칭인 애니)이었다.
애니는 1866년 4월 14일에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며, 구빈원을 전전하는 어려운 생활 끝에 퍼킨스 학교에 들어와 점자 및 수화 사용법을 배우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애니가 장애인 학교를 다닌 까닭은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결막염으로 시각장애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며, 여러 번에 걸친 대수술 끝에야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했던 까닭이었다(하지만 그녀는 평생 사물이 둘로 겹쳐 보이는 불편을 감내해야만 했다).
"W A T E R,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시작은 감동적이었지만, 헬렌과 애니의 이후 생활이 줄곧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응석받이로 자란 헬렌은 도통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을 하며 수화를 가르치던 애니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진이 빠지곤 했다. 헬렌은 심지어 애니를 때려서 앞니 하나를 부러뜨리기까지 했으며, 애니 역시 헬렌이 지나친 행동을 할 때마다 찰싹찰싹 때려주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난 4월 5일, 훗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입을 모은 사건이 벌어진다. 집 마당의 펌프가에서 헬렌이 드디어 '물(water)'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 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앞의 책에서)
헬렌에게 투쟁과 승리의 삶, 애니에겐 고난과 헌신의 삶
훗날 극작가 윌리엄 깁슨은 헬렌과 애니의 첫 만남에서부터 이 기적적인 깨달음의 순간까지를 묘사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The Miracle Worker)>(1959)이라는 희곡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62년에 아서 펜 감독이 제작한 영화는 애니 역의 앤 밴크로프트와 헬렌 역의 패티 듀크가 나란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수상하며 격찬을 받았다. 물론 적잖은 극적 과장이 있긴 하겠지만, 두 배우의 열연이 빛나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케 한다.
펌프가에서 처음으로 언어가 트이는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의 한 장면.
애니 역의 앤 밴크로프트와 헬렌 역의 패티 듀크는 나란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수상했다. (1962년)
그런데 사람들이 기억하는, 또는 기억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 그러니까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에서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된 헬렌의 어린 시절까지만이다. 이 영화만 보고 나면, 마치 헬렌의 삶은 그 펌프가에서의 계시와도 같은 경험 이후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일사천리 해피엔딩을 향해 질주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우리는 널리 알려진 위인 헬렌의 삶 말고 또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헬렌의 분신이며 그림자였던 애니의 삶이다. 헬렌이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그 삶은 투쟁과 승리의 삶이지만, 애니와 그 주위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그 삶은 고난과 헌신의 삶이었다.
후원자들에게 손을 벌려야만 생활이 유지되는, 명성과 달리 순탄치 않은 삶
혼자서는 뭔가를 보거나 듣고 이해할 수 없었던 헬렌은 전적으로 애니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했다. 래드클리프 재학 시절만 해도, 애니는 강의실에서 내내 헬렌의 곁에 붙어 앉아서 손바닥 위에 강의 내용을 일일이 철자로 적어서 알려주어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애니가 헬렌의 가정교사이긴 했지만, 본인도 대학을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는 사실 쉽지 않았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굴욕감도 들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헬렌은 ‘천재성이 과장되었다’는 비판에 대한 확실한 반증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계가 문제였다. 한때는 가정교사를 고용할 정도로 애쓴 헬렌의 부모였지만, 딸이 유명해지면서부터는 도리어 그 후원금을 착복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심지어 헬렌은 부모의 사후에도 유산이라 할 만한 것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으며, 애니 역시 10년 가까이 밀린 가정교사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나아가 헬렌과 애니 모두 돈 관리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평생 경제적인 곤경에 시달리면서 후원자들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고, 심지어 쇼 무대에까지 나서야만 했다(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날에도 헬렌은 공연 무대에 올라야 했다).
남들 앞에 '보이는'모습에 충실해야 했던 헬렌. 도자기를 만지며 포즈를 취했다.(1962년)
또한 헬렌과 애니는 평생 남들 앞에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언론에서는 겨우 열 살짜리 소녀를 졸지에 ‘천사’이며 ‘성녀’이며 ‘천재’로 격상시켜 버렸으며, 이런 이미지가 워낙 굳어진 까닭에 주위 사람들은 이런 전제, 또는 편견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무조건 두 사람을 깎아 내리기 일쑤였다. 일각에서는 헬렌을 ‘자유의지라고는 없는 살아있는 인형’으로 혹평하기도 했는데, 장애인으로서 헬렌이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한계를 생각해 보면 부당한 말에 불과하다. 전기작가인 도로시 허먼의 말마따나 그 당시의 사회나 지금의 사회나, 장애인 중에서도 일부만, 즉 외모가 흉하지 않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탁월하며, 불행을 이긴 영웅에 속하는 장애인만을 선별해서 받아들이려는 성향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헬렌의 몸종에 불과한 애니, 헬렌을 이용하는 애니, 오해와 모함에 둘러싸인 동반자
헬렌(왼쪽)과 애니. 1898년.
애니의 삶은 헬렌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였지만, 어디서나 탁월한 제자의 빛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는 애니가 헬렌의 몸종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또는 그와 반대로 애니가 헬렌의 주인 노릇을 하며 사리사욕을 위해 장애인을 부려먹고 있다고 모함하기 일쑤였다. 애니의 단호하고 직선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은 사사건건 헬렌의 가족과 후원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을 빚어내면서 이런 악평을 더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애니 자신이 천사나 성녀와는 거리가 먼, 일면 어두운 성격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원만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당한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헬렌을 이용하려 했든, 또는 비판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지만, 정작 평생 가운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반세기 동안 헬렌을 떠맡은 사람은 애니 단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아울러 애니의 말년에 그 역할을 인계 받은 폴리 톰슨 역시 무려 46년 동안 헬렌을 위해 일했음을 기억해야 하리라). 헬렌과 붙어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니는 가뜩이나 약한 시력으로 헬렌에게 책을 읽어주고, 헬렌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느라 늘 기진맥진했다. 폴리 역시 수십 년 동안 헬렌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다 보니, 나중에는 오른손만 비정상적으로 크고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한 사람의 삶보다도 더 위대한 두 사람의 우정
헬렌은 사실상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였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불운은 그치지 않았다. 1936년 10월 20일, 애니는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헬렌은 이 고마운 스승의 손을 마지막까지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1946년에는 살던 집에 불이 나서 그때까지 모은 자료며 원고 등이 모두 소실되는 사고를 겪는다. 헬렌과 애니의 일생에 관한 자료 가운데 빈 구석이 많은 것도 이때의 일 때문으로 추정된다. 1960년 3월 21일, 이번에는 애니 다음으로 헬렌에게 고마운 존재였던 폴리 톰슨이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이후 헬렌은 당뇨병으로 인해 7년 넘게 휠체어와 침대 신세를 지다가, 1968년 6월 1일에 87세로 사망한다.
도로시 허먼의 지적대로, 반드시 애니나 반드시 폴리가 아니었더라도 헬렌은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헬렌 혼자서는 결코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헬렌의 삶은 불가피하게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었으므로, 그녀의 삶을 이야기할 때에 애니나 폴리 같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 역시 불가피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흔히 헬렌 켈러라는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인물’의 생애에 감탄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헬렌과 애니라는 두 사람의 우정, 그리고 서로에 대한 헌신과 애착이 아닐까. 어쩌면 애니가 남들로부터 ‘장애인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헬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아이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애니 역시 내심으로는 헬렌이 자기 도움 없이도 버젓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말년에 이르러 한 친구가 애니에게 칭찬의 뜻으로 이렇게 추켜세우는 말을 건넸다.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자 애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게로군.” 그녀다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