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백석의 연인 과 결혼한 경성제대 反帝동맹 주동자 신현중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법학과 1학년때 日帝 만주침략 비판하는 삐라 배포학생까지 포섭, 일본 전국에 충격

                                                                          입력 2022.03.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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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결혼한 신현중, 박경련 부부. 통영 출신으로 이화고녀를 나온 박경련은 시인 백석이 연정을 품었던 ''이다. 백석은 시 '통영'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란을 향한 마음을 드러냈다./조선일보 DB

 

1931114일 경성 시내에 호외가 뿌려졌다. ‘초유의 反帝비밀결사와 학생중심의 조선공산당이란 굵직한 제목이 긴박감을 더했다.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만주침략을 반대하는 반제동맹이 적발됐다는 내용이었다.

 

최고 수재들이 모였다는 경성제대에서 전투적 반일(反日) 비밀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인 학생 3명이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반제동맹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총독부를 경악시켰다.

 

당시 경성제대에 다니던 조용만(1909~1995·언론인, 소설가)조선 통치의 중추 인물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제국 대학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포섭되어 조선 독립을 부르짖는 공동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준 획기적인 사건’(‘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1988)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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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을 전한 조선일보 1931114일자 호외. 일제 경찰은 보도금지 조치를 내려 대규모 체포 두달 후에야 보도할 수있었다.

 

'저 피로 물든 만주 광야를 보라

 

발단은 만주사변이었다. 일본 군부는 1931917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경성제대 반제동맹은 만주침략을 중단하라는 격문을 뿌리며 일제의 침략에 제동을 걸었다. ‘저 피로 물든 만주 광야를 보라. 우리 동포들이 제국주의 총칼에 도륙이 되고 있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반전격’(反戰檄) 성명을 쓴 이는 경성제대 법학과 1학년에 다니던 스물한살 신현중(1910~1980)이었다. 신현중은 예과 신입생 때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반제동맹 주역인 조규찬과 예과의 조선 학생들 책상서랍에 격문을 투입한 열혈청년이었다. 경찰은 예과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만 막았을 뿐 격문 작성자가 누군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신현중은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독서회를 조직하면서 학생들을 포섭했다. 일본인 학생 이치카와(市川朝彦), 히라노(平野而吉), 사쿠라이(櫻井三良)도 끌어들였다.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제2고보(경복고 전신)에도 독서회 삐라를 배포하면서 조직원을 늘려나갔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세 차례나 일제 검거에 걸려 와해된 상태였다. 반제동맹은 제3차공산당 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ML계 강진과 줄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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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사회부로 옮긴 신현중이 동료들과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다.

 

경성제대 일본 학생까지 가담

 

신현중이 쓴 만주사변 격문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한 사쿠라이의 하숙방에서 등사판으로 밀었다. 이틀 밤을 새며 4800장을 찍은 뒤 928일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에게 비밀리에 나눠줬다. 하지만 또 다른 배포책이던 강약수가 격문을 보따리에 넣고 옮기다 경찰 불심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독서회를 함께 한 경성제대 학생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경성제대에서만 일본학생 7명을 포함 20명이 끌려갔고, 치의전과 제2고보학생, 총독부·은행 급사까지 50명이 체포됐다.

 

신현중은 주동자가 먼저 체포되면 안된다는 의견에 따라 미리 함경남도 흥남으로 몸을 피했다. 저고리 바람에 낡은 맥고모자를 쓰고 괴나리봇짐을 진 시골뜨기 장꾼처럼 차렸다. 여차하면 중국이나 소련으로 튈 작정이었다. 격문을 뿌린 지 한 달 넘게 신문엔 이렇다할 기사가 없었다. 일제의 보도금지 조치때문이었다. 경성에 잠입한 신현중은 아지트인 이성학의 집으로 갔다가 체포됐다.

 

신현중은 체포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메리켄사쿠(손에 끼는 호신무기)를 생각했으나 형량이 많아질 것같아 쓰지 않고 그 순사에게 서로 갈 테니 결박하지 말라고 제의했다그러겠다던 순사는 내가 반항하지 않을 것같자, 달려들어 포승줄로 힘껏 묶었다. 나는 몸은 묶였지만 구경꾼들 앞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비겁하지 않게 잡혀가노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반제동맹사건으로 공판에 넘겨진 19명 중 징역형을 산 학생은 신현중(징역3) 혼자였다. 조선일보 급사였던 안복산과 조선총독부 급사였던 이형원 등 소년범 2명이 징역 2년을 살았다. 나머지는 모두 집행유예였다. 항일운동사건으로는 유례없이 가벼운 처분이었다. 경성제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학생들을 관대히 처분해달라며 호소한 덕분이 컸다고 한다.

   

징역3년 산 뒤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

 

형기를 꼬박 채우고 출소한 신현중은 언론계에 투신했다. 1934년 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왔다. 입사 첫해 연말 신현중은 신문에 젊은 意氣가지고란 제목의 송년사를 썼다.

 

이 무기력하고 침체한 금일의 조선이므로 일층 더 우리들 청년의 존재가 중요하고 고귀함을 자부하여야될 것이다정열에 불타는 청년이 되자! 동시에 실무에 착실한 젊은이가 되자!’ 혹독한 시련을 겪은 스물넷 청년은 여전히 패기넘쳤다. 교정부를 거쳐 19351월부터 사회부에서 일한 신현중은 편집국원 상벌규정 실시 후 첫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될 만큼 유능한 기자였다. 1939831일 신문사를 관두고 통영으로 귀향할 때까지 신나게 기자 생활을 했다.

 

과거 반평생 내 직업이 일개 기자였기 때문에 기림(김기림), 만식(채만식), 원조(이원조), 석영(안석주), 일보(함대훈), 소천(이헌구), 정희(최정희), 천명(노천명), 선희(이선희), 허준, 백석 등등 한 직장에서 비비대고 일하고 낄낄거리고 놀았더니만큼 이 쟁쟁한 문단의 별들이 내 머릿속 한 구석에 남겨준 그림자를 더듬어 회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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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6123일자에 실린 백석 시 '통영' .백석이 사랑한 ''의 자취를 찾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백석 연인 과 결혼

 

신현중은 같은 해 입사한 백석, 허준과 자주 어울렸다. 허준은 월간지 조광’ 19362월호에 소설 탁류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던 소설가이자 교정부 기자였다. 신현중은 먼저 여동생을 허준에게 소개해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결혼 회식 기념자리에 참석한 통영 출신 이화고녀생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했다. 신현중의 누나가 통영에서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친 제자였다.

 

백석은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박경련을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백다운 고백도 제대로 못했다. ‘통영이란 시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조선일보 1936123)

 

박경련은 백석을 피했다. 박경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신현중이었다. 둘은 19374월 통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백석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이듬해 월간지 여성’ 4월호에 발표한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그렇게도 살틀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진주여중·통영중·부산남중·부산여중 교장으로

 

신현중은 1939831일 신문사를 그만두고 통영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일꾼을 사서 밭을 일궜지만 부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해방 후 잠시 언론사에 몸담았지만 이내 교육계로 방향을 바꿨다. 진주여중, 통영중, 부산남중, 부산여중 교장을 지내며 제자들을 길렀다.

 

1954년 자전적 수필 두멧골을 냈고, 국역 논어’ ‘도덕경을 썼다. 젊은 날의 혁명가신현중은 조선 독립과 광복을 찾기 위한 수단 방법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접했고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신현중은 사후 10년이 지난 1990,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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