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가을 뜻/황수정 논설위원
기사입력 2017-11-10 03:38 서울신문
화단의 감나무는 내내 저 혼자 심심했다. 일껏 올려다봐 준 것은 감꽃 필 즈음 잠시였다. 튀밥 모양의 연노랑 꽃이 온 나무에서 터질 때는 백기투항이다. 겨우 손톱만 한 꽃이 분통 같은 봄볕마저 무색하게 하는데, 그 곁에 오래 서 있지 않고는 못 배긴다.
무심했던 나무 곁에 새삼 붙들리고 마는 때가 또 이즈막이다. 벽공에 박혀 익어 가는 대봉감은 점점이 대낮에 켜진 알전구다. 낙하 직전의 홍시를 한참 보고 있자면 둔한 내 머리에도 삼십촉쯤 백열등이 번쩍 켜진다. 대봉감이 떨어지려는 것은 그냥 다 익어서가 아니다. 짧아 헤펐던 봄꽃의 생애, 비바람 소란했던 풋열매의 시간, 저 너머 겨울의 빈 가지까지 다 기억해서다. 그 기억이 무거워서다.
늙은 은행나무가 온 종일 안마당에서 뒤챈다. 한 움큼씩 열매를 떨궈 놓고는 제풀에 놀라 발 아래 굽어보고, 나는 올려다보고. 바람 한 점 없어도 은행 알들은 무시로 떨어진다. 마음대로 여물어 제멋대로 떨어질 리는 없다.
이만하면 됐다, 제 등을 토닥이며 제 손으로 등짐 벗어 제 발등 위에 내려놓는 일. 비워서 깊어지는 가을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