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들리는 소리
정순옥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엄마’를 부르는 소리다. 나를 부르는 ‘어~ㅁ~마’ 소리다. 아~니, 내가 소싯적 엄마를 부르던 소리인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단어가 허공에 떠돌아다니다가 바람결을 타고 와 내 귓가에서 맴돌곤 한다. ‘엄마’라는 단어처럼 좋은 단어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부를 수 있는 쉬운 단어 ‘엄마’. 자라나면서 ‘어머니’ 하고 부르는 이 단어는 인류의 공통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단어, 엄마. 이 시간도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는 사랑과 포근함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엄마다. 언제나 나는 이 소리에 가슴이 흔들림을 느낀다.
나는 산골 같은 시골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우리 집 앞으로 아주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은 나의 꿈의 궁전이었다. 그 언덕은 나의 즐거운 놀이터도 되었고 앞날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서린 곳이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그 언덕에 올라가 혼자서 자연을 즐기기도 하고 부푼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시절의 추억이 있다. 제법 세차게 바람이 부는 날, 나를 스치는 바람이 좋아 동산에 올랐다. 동산 앞으론 구릉지 같은 앞산이 있었고, 그 밑으론 보리나 콩 등 각종 농작물을 심는 넓은 밭이 있었다. 그날 입은 짧은 치마에 바람이 팡팡하게 들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자,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혼자 놀았다. 그리곤 앞산을 보았다. 아~ 거기에 정말 신기한 자연의 기운이 돌았다. 나는 앞산 밑에 있는 넓은 밭 위로 바람이 물결처럼 움직이는 바람결을 본 것이다. 통상적으론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인데, 나는 분명히 바람이 결을 이루면서 이동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정말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바람결 자연의 무늬였다. 바람결은 자연에 있는 에너지의 흐름이 아닐까 싶다.
어젯밤 드라마 같은 꿈을 꾸고 난 후, 어찌나 사실적인지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꿈속에서, 나는 옛날에 놀던 동산에서 푸른 바람결을 만지며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향기롭고 평화를 주는 바람결인지 만질수록 가슴이 흐뭇함을 느끼고 있을 때, 웬일인지 바람결은 사라지고 인터넷을 통해서 알고 있는 유명배우가 슬피 우는 모습이 보였다. 내 손을 잡고서 애절한 눈으로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할 때에 느닷없이 하늘에서 돈뭉치가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그녀는 미친듯한 행동으로 돈뭉치를 끌어안으며 헤어진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댔다.
나는 이 시간도 엄~마를 부르며 아이들을 뺏기고 우는 어미의 아픈 울음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어젯밤 꿈속에서 슬프게 울던 여인의 울음소리와 함께, 두 뺨을 만지기만 해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 소리도 들린다. 수많은 사정이야 어찌 다 알 수 있겠느냐마는 분명한 것은 아이를 누군가에게 뺏겨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현실이다. 돈의 마력이 얼마나 센지 ‘돈은 귀신도 부린다’는 속담까지 있는 걸 보면, 정말 많은 돈을 가진 집안이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떼어 놓는 일은 어렵지 않았나 보다.
어른이 되어서도 슬플 때나 괴로울 때는 포근한 엄마의 품 속에 안겨 부르고 싶은 ‘엄마’.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천륜인 모자간의 사랑을 떼어 놓을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게 인류법칙이 아니겠는가. 나는 머지않아 인간의 향기를 풍기는 새로운 꿈을 꾸면 좋겠다. 돈뭉치에 상처를 받은 여인이 상처가 회복되고, 재력가의 골칫덩이에서 사랑의 통로로 변화된 복덩이 엄마의 포근한 가슴에 안겨, 엄~마를 부르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을.
나는 가끔 “돈만 있으면 해결 못 할 일이 있나요?” 전화선을 타고 싸늘하게 들려오던 어느 젊은 여성의 음성이 되살아나곤 한다.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기에 잊히지 않고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세상살이엔 돈이 힘이 되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짐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수수께끼 같은 돈의 위력에 사람들은 울고 웃으며 인생살이 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돈에도 결이 있어 사용도에 따라서 켜켜이 쌓이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선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사랑과 행복은 꼭 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너나 나나 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뜻하지 않은 사랑이 찾아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까지 지배한다 해도 영혼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지나가는 것이지 결코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이 한 시간이 더욱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아주 귀한 이 한 시간을 가장 진실한 사랑 속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살면 행복한 삶이 아닐까. 나는 어머니의 진실된 사랑이 그리울 때면 바람결을 피부로 느끼면서 걷는다. 그리고 바람결에 들리는 ‘어~ㅁ~마’ 소리를 듣는다. 영원세계에 계시는 조부모님이나 부모님도 불렀을 것이고, 나도 부르고 내 아이들도 부르고 있을 줄도 모르는 엄마.
나는 산책길에서 바람결에 들리는 ‘엄마’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오늘따라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가 내 가슴을 몹시 흔들리게 한다. 나는 숨결을 고르며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스치듯이 지나가는 인생살이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