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자 시인

조회 수 1248 추천 수 1 2022.07.01 09:39:59

 

                                          영원을 향한 그리움의 여정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교수

 

 

  고미자 시인의 시들은 차분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건한 느낌마저 준다. 그렇다고 시인의 시들이 인생에 대한 치열한 모색이나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개 이런 정서들이 노정될 때 서정의 밀도는 촘촘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 시인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대체 이런 상위와 거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요인들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하나가 이 시인의 디아스포라적 정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전기적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모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그 경험론적인 것들이 그의 작품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국적 정서들은, 근원에 대한 안티 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시인의 작품들에서 회고의 정서들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월의 무게이다. 서정적 정열이 세월의 깊이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열정의 정서들이 미래지향적인 것과 결부되고, 그 반대의 정서들은 과거지향적인 것과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고미자 시인의 작품 세계가 정서의 진폭이나 서정의 울림이 크지 않다는 것은 이런 요인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이 모두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인의 기질과 생리적인 측면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작품들에서 긴 호흡을 요구하는 시편들이 희소한 것도, 또 이야기성에 바탕을 둔 서사적 특성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어떻든 시인의 작품들은 차분하고 경건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밀한 느낌마저 있을 정도이다.

 

가을은 떨구는 계절일까

나무는 비에 젖고

바람에 아파하는 잎새들을

허공에 띄워 보냅니다

 

삶의 무개 하도 무거워

뒤뚱거리며 아파하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떨구듯

 

이 가을에는 빈 마음을

당신께서 채워 주시고

 

내 영혼

곱게 물들이는

지혜 주시라고

두 손을 모으옵니다.

-가을의 기도전문

 

  인용시는 시인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차분함과 경건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마치 김현승의 작품을 다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하게 닮아 있는 것이다.

가을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의 정서를 대변한다. 신화적으로 가을은 소멸의 의미 또한 갖고 있다. 그러한 가을의 속성을, 시인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과정으로 인유한다.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에는 소멸하는 가을의 신화적 의미를 통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는 정서들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욕망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억압되고, 그러한 억압이 결국은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에 이르는 길을 막는 기능적 요인으로 사유되어 왔다. 따라서 소멸이라는 가을의 정서 속에서 시인 자신 속에 내재한 욕망을 동일하게 제거하려는 시인의 노력은 내성의 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문득

문턱 그 넘어 건너간

그리운 모습들 생각이 난다

 

시간은 살아있는 존재들 속

쉼 없이 흐르는 실체 없는 것

얼마나 많은 희노애락의 순간들이

연기처럼 증발했을까

 

나의 존재 의미를 깨달기 전

소멸의 순간이 마중 오며 서두르겠지

먼먼 날처럼 느껴지던 순간들

들숨 날숨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숨을 쉬는 순간순간

문턱 그 넘어 기웃거림은

보고 싶은 얼굴들

그리운 모습들이 있어서일까

-문턱 그 넘어전문

 

  욕망이라는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생을 영위하는 과정은 어쩌면 이 정서와의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과정이가을의 기도라는 성찰의 형식으로 표명되었지만, 어쩌면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인생 자체의 모호성일지도 모른다. 뚜렷하지 않고 무언가 정립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각을 다룬 작품이문턱 그 넘어이다. 시인은 문턱이라는 절대 중심축을 설정한 다음, 여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숙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쉽게 넘을 수 있는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절대적으로 초월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경계에서 시인이 던지는 화두는 알지 못할 삶의 방향성, 정립되지 못한 인간의 숙명에 관한 것이다. “들숨 날숨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라는 이 회의의 담론이야말로 이런 정서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나온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도정에 놓인 것이 현재 시적 자아가 처한 상황이다. 아니 이런 중간형의 모습들은 어쩌면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도정에서 시인은, 아니 모든 인간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지나온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더욱 문제시된다. 실상 이런 불안의식이야말로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숙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 것이며, 영원을 상실한 인간들이 헤매는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시인이 감각하는 회의와 숙명은 여기서 비롯된다.

 

산다는 것

숨을 쉰다는 것은

환희와 눈물의 조각

즐거움과 아픔의 조각들

 

한층 또 한층

우주의 공간에 쌓아 올리는

사닥다리 만드는 일이리

발맞춤하듯 그렇게

철길처럼 나란히

 

미세한 바람에도

사닥다리는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흔들거리는 사닥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는 것

두려워 떨며

추는 춤

-위태로운 춤전문

 

  시인은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도정을 위태로운 것이라고 했다. 마치 아슬아슬한 외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가, 삶이라는 것이 위태롭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려운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인간의 현존이 위태롭다는 것은, 그리고 시인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신이 사라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일 것이다.

  이런 위기 감각이 어떤 것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은 역사철학적이고 신화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리적인 국면과 분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에 원인을 두고 있든,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그리하여 영원을 상실한 존재라는 것이고, 그 때문에 이런 불확실성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있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의 나약한 영혼을 잡아줄 수 있다면, 시인은 그러한 공포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명의 동아줄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을뿐더러 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쉽게 자기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구원의 손길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가을의 기도에서 보듯 자기를 낮추는 것, 그리하여 보다 확실한 윤리적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서정의 정열이고 서정시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어떻든 시인이 시를 쓰고, 그 도정에서 생명의 동아줄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친구여 우리

길 떠날까 이런 날은

서성이는 구름 한 점 불러다

바람의 붓으로 풍경화 한 폭 그려

생각의 폴더에 저장하고

 

투 메가바이트 메모리 칩 챙겨

어디든 어느 곳이든 지구의 벼랑 끝

우주 정거장까지 떠날까

 

초대장도 여벌옷도 여권이나

비행기표 기차표 통장도

신용카드도

운전면허증도 없이

 

엑스선 투시도 하지 않고

국적이 어디냐 묻지도 않는

국경과 인종도 초월한

우주의 언어를 만나러 가자

 

가끔은 우리 영혼에도 쉼표를 찍어

녹슨 생각을 거두어내자

희디흰 파도에 생각 싣고

떠나자 어디든지

어느 곳이든지

-친구여 길 떠날까전문

 

  피폐된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매개적으로 그냥 오지 않는다. 찾아내고 이를 자기화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불구화된 영혼, 숙명에 빠진 자아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를 찾아서 떠나려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영원을 찾아서 머나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도정에 혼자 가는 것은 낯설고, 불안하다. 순례를 떠나는 자신이 위로받고, 불안을 분산하기 위해서는 응원군이 필요하다. 시인이 동행자와 더불어 이 길에 나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대체 시인이 찾아나서는, 자신의 불구화된 영혼을 구원해주는 매개란 진정 무엇일까. 인용시에서도 얼핏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세계는 일단우주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의 언어란 무엇일까. 이 언어는 사고를 다시 제한하는 관념의 언어일까, 혹은 시인의 의도대로 존재론적 불구를 치유해줄 영원의 관념일까.

  작품의 내용에 나와 있는 대로, 우주의 언어란 시원의 언어 혹은 태초의 언어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이 언어는 구분이나 경계가 만들지 않는다. 절대 영원의 세계가 갈라지지 않은 영토라면, 우주의 언어란 이런 세계와 밀접한 상관이 있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의 세계가 계통적인 구분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양육강식으로 표상되는 인과론적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원론적 세계를 깬 것은 불행하게도 인간 자신이었다. 거침없이 확산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인간은 신과 동등한 반열에 오르려는 오기를 부렸다. 이는 가당치 않은 욕심에 불과할 뿐 결코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인간을 신은 용서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과 성찰에 의해서만 에덴동산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감싸 주었던 영원의 아우라는 이 시점부터 인간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난 것이다.

  시인이 찾아 나선 것은 이때의 언어였다. 곧 우주의 언어가 그것인데, 이 언어는 비행기표나 기차표도 필요로 하지 않고 운전면허증이나 엑스선 투시도 필요치 않. 게다가 국적이나 국경, 인종과 같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경계를 무시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우주의 언어이다. 이제 그 언어만 자기화하면 서정적 자아를 고난 행군으로 밀어 넣은 불행한 숙명들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도정이 시인의 의무이고, 서정의 간극을 메꾸는 시 쓰기의 책무가 될 것이다.

 

고독한 영혼을 불러라

외로워 떨고 있는 혼을 불러라

 

길 잃은 새들도 불러라

혼을 흔드는 가을 숲이여

 

네 침묵의 언어로

어둠을 삼켜라

 

그 빛으로 어둠 불 살러

새벽을 부르고

 

무서리 너를 적시면 외쳐라

흔적을 남겼노라고

 

빛의 흔적을

혼을 깨우는 침묵의 외침이여

-침묵의 외침전문

 

  시인은 갇힌 영혼을 일깨우고자 한다. 숙명이나 불행한 영혼의 단면들은 모두 이 감옥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숙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 마치 무덤 속에 갇힌 혼을 깨우는 피리소리처럼 시인은 영혼의 종, 운명의 종을 계속 울려대는 것이다.

  「침묵의 외침이 말하고자 한 것도 이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고독한 영혼을 부르고”,“외로워 떨고 있는 혼을 불러내려 한다. 영혼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고요히 잠들어 있는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계속 일깨우고 현재의 이 시간으로 끌어내야 한다. 시인이 영혼을 일깨우고 현실로 불러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불행한 혼을 일깨우는 시인의 행위는 정당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잠자는 영혼의 상태에서 각성이란 전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실상 이 물음에 대한 답이야말로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추구하는 주제일 것인데, 작품의 표현대로 그 매개랄까 수단은 가을 숲이다.가을의 기도에서 보듯 시인에게 가을은 이번 시집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이미지로 구사된다. 모든 것을 떨구어버리는, 가을의 신화적 의미는 내성의 길을 가는 시인에게 의미심장한 기제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시인은 가을의 이미 저리들을 이번 시집에서 효과적으로 은유화한다. 가령, 시인은가을에 떠나거(나는 가을),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가을(떠나는 가을)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고향과 결부된 시에서도 가을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이미지로 등장(내 고향)하기도 하고, 영원을 건너는 징검다리(계절의 건널목)로 사유되기도 한다.

  계절과 결부된 숲은 그것이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는 경우이다. 자연이란 영원을 잃어버린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에덴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체감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영원의 감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모호한 영원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순환론적 관점에서 영원으로 수용되고, 또 모성적인 이미지라는 점에서도 영원의 상징으로 구현된다.

 

이 골목 저 길에서

숨 가삐 달려와 도란거린다,

내가 연두 빛 얼굴 내밀 때

대지는 환희로 출렁거렸다

 

새들은 연두 빛 노래 부르고

내가 진초록의 숨을 쉴 때는

매미도 소리소리 노래 불렀지

 

나 노을 빛 옷 입고

귀뚜라미 노래 멈추니

무서리 하얗게 내린다

 

저무는 길

별들의 이야기 바람의 숨소리

가슴에 품고

나는 대지와 하나 되리

-갈잎의 독백전문

 

  작품의 제목을 갈잎의 독백이라 했지만 실제적으로 서정적 자아의 독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작품에서 자연과 서정적 자아는 적절하게 상응하고 조우하는 관계이다. 가령, “내가 연두빛 얼굴 내밀 때 / 대지는 환희로 출렁거리는 것이 그러하다. 이런 조화는 자연과 인간이 구분되는 세계, 경계로 나누어진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자연 속에서 경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를 만들어낸 것이 인간이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게 했던 욕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시인은 욕망이 갖는 한계를 알고 있기에, 이를 버리는 연습을 지금껏 해 온 터이다. 그러한 도정의 마지막 단계가 이렇게 자연과 호응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경계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경계가 무화된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 곧 자연 그 자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더 이상 영혼의 불행이나 숙명과 같은, 인간의 원죄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대지와 하나된다는 이 자세에서 시인의 결기가 느껴지는 것은 이런 정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며 땅

풍성한 가을 들녘

포근한 함박눈

시린 어깨 감싸주는 가슴입니다

 

비 피하는 처마

더위 식혀주는 바람

갈증 덜어주는 생수이며

햇살 뜨거운 여름날 그늘입니다

 

초봄 눈 틔우는 새싹의 환희

바이올렛의 잔잔한 미소

영혼의 길 밝혀주는 등대입니다

 

무시로 내 삶의 길잡이

어둠 밀어내는 빛

등대

어머니는 영원의 빛입니다

-등대 나의 어머니전문

 

  서정적 자아가 자연과 하나 될 때, 비로소 자연의 준엄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자아가 욕망으로 물들어 있을 때,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에 갇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것은 물질이 내뿜는 동전의 짤랑거리는 소리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지언정 정신의 공백은 메울 수가 없다.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인간의 고뇌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런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의 삶이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운한 삶과 불행한 영혼을 포회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의 감각뿐이다. 영원을 잃은 인간은 시린 어깨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뜨거운 여름날의 햇살로부터도 피해 나갈 길이 없다. ‘시린 어깨햇살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은 포근함이며 시원함이다. 이를 만들어주는 것이 자연이다. 시인은 그러한 자연을 등대로 비유했다. 그리고 자신은 길 잃은 배로 치환하면서 그를 구원해줄 등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등대가 바로 자연이었던 것이다. 자연은 이런 불구성을 치유해줌과 동시에 초봄 눈 틔우는 새싹의 환희이면서 바이올렛의 잔잔한 미소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희망의 메시지에 올라타고 시인은 앞으로 전진한다. 시인이 그러한 길을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의 길 밝혀주는 등대가 저 앞에서 길을 인도해주고 있기에 가능했다. 이 등대, 곧 자연은 무시로 내 삶의 길잡이역할을 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둠 밀어내는 빛과도 같은 구실을 해주었다. 결국 등대란 어머니이며 영원의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서정 시인이 다 그러하지만 고미자 시인의 경우는 서정적 감수성이 남다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서는 디아스포라적 환경이 길러준 것일 수도 있고 시인 자신의 기질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든 시인은 그러한 감수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간의 숙명이라든가 불행한 영혼의 정서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읽어내고자 했다. 과장이나 현학이 아니고 또 현란한 비유의 의장을 거치지 않고도 시인은 이를 자연스럽게 표명했다. 그 탐색의 여정에서 시인은 가을의 신화적 의미를 읽어냈고, 자연의 형이상학적 의미, 곧 영원의 정서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매개로 불행한 영혼의 한 단면을 읽어내면서, 이를 초월한 매개, 곧 자연의 구경적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다. 이는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만들어낸 서정의 치열한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미자.jpg

 

약력고미자 시인

1963 전남 목포간호학교 졸업파독 간호원(1967). 미국 이주(1978). 순수문학 시 등단(2006) 사진작가(2007) 시카고 문학상(2017,2018). 시카고문인회 총무(2017~2021). 현재시카고문인회 부회장시카고디카시 회원

 

 

 송기한 교수.jpg

 

송기한 | 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교수

19625월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 전후시와 시간의식』 『고은민족문학에의 길』 『문학비평의 욕망과 절제』 『한국 현대시의 서정적 기반』 『시의 형식과 의미의 이해』 『21세기 한국시의 현장』 『한국 현대시와 시정신의 행방』 『한국 현대시의 근대성 비판』 『1960년문학연구』 『서정주 연구』 『한국시의 근대성과 반근대성』 『문학비평의 경계』 『비평과 인식』 『현대시의 정신과 미학』 『서정의 유토피아(1, 2) 현대문학의 정신사등이 있다. 대전대 우수학술연구상, 시와시학 평론상, 대전시 문화상 학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문학평론가. UC BERKELEY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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