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토스, 실존적 세계관을 위하여
-정순옥의 수필세계
한 상 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1. 논의에 앞서
수필은 작가의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미학적으로 창조한 관조의 산물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데 있다고 했다. 그래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 망각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고야의 그림을 통해 체험하는 예술의 세계는 바로 우리들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사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비로소 우리는 삶의 진실에 눈뜨게 된다. 그러므로 수필문학에 지나치게 일상성에 몰두한다거나 키치적 사고에 매달린다면, 문학성은 얻기 힘들 것은 자명한 일이겠다.
문학의 본질은 사물의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조나단 킬러가 신문기사도 시처럼 배열해 놓으면 문학적 책읽기를 유발할 수 있고,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했듯, 전통적인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다. 따라서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루카치가 예단한 바 있듯, 우리는 지금 문학이 총체적 인간의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우울한 시대에 살고 있다. 때문에 적어도 본격수필이라면, 서정의 감미로움과 때로는 벽을 뚫는 비평의식이 있어야 하고, 유모나 서정 어린 섬광이나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려야 할 것이다. 이는 한편의 수필이 일상의 이삭줍기가 아니라, 자신의 성 쌓기에 주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로찾기와 예술의 탈주가 필요할 것이다.
해적이에 의하면, 수필작가 은지(蒑池) 정순옥은 195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전주기전여고와 전주간호대학을 나온 뒤, 1978년 도미하여 현재까지 미주에 거주하고 있는 수필작가이다. 미주중앙일보에 이민수기가 당선되었고, 광야(2003)와 한국수필(2009)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허난설헌문학상과 서울문예창작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수필집 <기쁜 소식>과 <오매, 복사꽃 피었네> 등의 저서를 남긴 작가이다.
헤겔은 그의 저서 법철학 서문의 마지막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노회한 철학자의 이 고전적인 잠언이 가리키는 것은, 현실적인 여러 모순의 지양태로서의 통일적인 삶을 향한 예지란, 대체로 기존의 삶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이 가능한 전환기적인 마디절에서 움트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논지는 표면적으로 철학적인 지혜의 현실적 지체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선견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필작가 정순옥의 수필작품들을 일별하며 필자에게 먼저 다가온 느낌은 헤겔의 바로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그 촌철한 어구가 주는 상징성이었다. 모두(冒頭)의 이 한 마디가 주는 상상의 진폭이야말로 더 이상의 핍집을 요구하지 않는다. ‘철학적 지혜의 현실적 지체성’이야말로 존재미학을 추구해야 할 수필작가의 최대의 무기가 아닐까. 이런 경향성은 정순옥의 작품을 통찰하면 충분히 이해될 대목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수필작가 정순옥의 수필세계는 앞서의 루카치의 언명과 같이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미세한 풍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는 미셀푸코의 존재 의미의 해석이요,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로고스Logos이자, 작가의 실존 인식은 파토스Patos의 형상화일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파악된다.
2. 실존적 파토스, 그 구체화
정순옥의 수필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그의 시선은 열려 있다. 사물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직핍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과 대상을 자기 나름의 프리즘에 의해 굴절시키고, 용해하여 자기화하고 있다. 인생의 연륜에서 오는 혜안일 것이며, 철학적 바탕 위에서 구축된 자기만의 성(城)일 것이다. 그 성의 탑은 아주 견고하여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으며, 제멋대로 출입할 수도 없다. 그만의 미적언어로 해석하고, 의미화 하여, 문학적 형상화의 길을 가는 그의 수필적 행로는 탄탄하다. 행간에 담겨진 의미의 깊이나 언어의 기의와 기표가 갖는 해석상의 깊이, 삶에 천착한 해석도 무궁무진하다. 그렇기에 삶의 철학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그의 수필세계로의 진입이 그리 쉽지 않다. 이만한 깊이의 수필을 만난다는 것은 수필 읽기의 행운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정순옥의 수필에서 이런 단정을 내리게 하는가? 이를 구명하기 위함이 이 논의의 단초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바르트에 의해 ‘작가의 죽음’이 선포된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인간 정신의 근본은 분명 인문학에 있다. 하여 글을 쓰는 궁극적 목적은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와 자기 구원일 것이다.
과연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 아니, 작가란 누구인가? 그들은 결코 인생의 행운아는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런 의무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 자신의 십자가가 될 괴로운 과업을 수행해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기 행동이나 감성, 사상 등의 모든 것이 섬세하고도 치밀한 소재를 형성하여,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나, 예술에 있어서만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특히 수필문학은 작가 자신의 반영이 기본이다. 당대 걸작을 남기겠다는 그런 지엄한 모표 이전에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의미는 우리를 오히려 긴장시킨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의미는 우리를 오히려 긴장시킨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문학작품은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관조와 성찰의 경향이 짙은 수필문학의 경우에는 ‘작가=작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마련이다.
정순옥의 수필쓰기는 <하늘나라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품안의 자식을 먼저 보낸다는 일만큼 고통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구멍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온다.”라는 참절(斬截)할 슬픔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자기가 살기 위해 형제에게 검붉은 피를 흘리게 한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재현한 듯 ‘광주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으로서 고국을 떠나와 있는 해외동포의 한 사람인 엄마에게 너는 행동으로써 그때의 현장을 설명해준 셈이다.
내 혈육은 험악한 현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엄마는 안전한 곳에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우렁엄마 얘기를 해주고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화자의 각성은 작가의 실존 인식인 바로 파토스의 형상화이다. 순연한 자연인으로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과도 같은 인식과 완성의 순간이 이 작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의 로고스는 해광이란 이름 붙이기를 통해 상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감정의 기복은 그로 하여금 “너는 한 마리의 하얀 새/ 창공을 나르는 펠리컨/ 초록 바다와 붉은 태양 사이로/ 자유롭게 나는 아름다운 새/ 사람들을 초록 바다처럼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붉은 태양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많이 참으로 많이/ 海光이라는 이름을 가진 너/ 오늘도 내 눈동자에/ 너의 모습을 그려 놓은/ 한 마리의 하야 펠리컨/ 창조주의 유일 작품 고귀한 너(해광 전문) 고도록 분출한 작가적 감성이 펠리칸으로 대유하여, 로고스를 파토스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실존 인식은 그만의 성 쌓기자, 존재방식일게 분명하다. 수필문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화에 있다고 할 때, 작가 정순옥의 수필은 문학적 원초적 지향을 통해 자전적 고백에 닿아 있다고 하겠다.
상투적인 소재나 반응에 의존하는 작품은 웨렌의 비유처럼 썰매를 카고 미끄러지는 것이나 공중낙하일 것이다. 이는 언어의 무임승차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경우, 황금을 찾아내는 시적 열정이 아니라, 도금을 통해 시인이라는 명망을 유지하는 언어의 세공사일 것이다. 하지만 수필가에게는 그 언어가 삶의 역정에서 길어낸 사유의 산물이다. 수필가 정순옥은 어쩌면 보통사람에게 하찮고 작은 일에까지 환호하고 있다. <오메, 복사꽃이 피네!>라는 영탄은 그저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합성이 아니요, 사물을 내 안에 들여놓는 이른바 내적감각으로의 승화인 것이 분명하다. 한 송이 복사꽃에 열중하는 작가. 경이로운 자연에 탐닉하는 화자의 열린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화자에게 복사꽃은 그저 꽃일 수 없다. 바로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실향의 정서, 디아스포라이자, 생명애인 바이오필리아를 함께 감지하게 한다.
이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복사꽃 한 송이를 보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왜 한 송이의 복사꽃을 보면서 남도 사투리가 생각난 것일까? 아마도 인생의 맛을 느끼게끔 하는 생기 있는 남도 말을 맛깔스럽게 품어 내던 남도 여성의 입술이 분홍색 복사꽃처럼 예뻤나 보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예민한 촉수는 한 송이 복사꽃에서 전라도 사투리로 연접되어 언어 기표를 통한 기의에 착목하게 한다. 나아가 한 송이 꽃을 통해 고향과 조국을 동시에 연상하게 함으로써, 장소애인 토포필리아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하여 결미의 “이 시간 나는 답답한 가슴을 트이게 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주는 남도 사투리를 감미로운 본토박이 남도 여성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복사꽃 생각 속에서 듣는다.”라는 정서화와 함께 의미 해석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화자는 한강을 사랑한다. 여기 한강을 사랑하는 작가의 심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 후 가난이 서러워 울던 시대로부터 새마을 운동 이후 경제부흥이 급속히 일어나,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한 것을 한강의 기적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내 사랑 한강은 야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물줄기를 품어 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이 솟아나게 하지만, 때로는 피와 눈물이 섞여 있고, 뼈를 깎는 아픔을 감당해 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영혼들이 그 속에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한강은 살아 숨 쉬고 있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강인가 보다. 난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나를 품어 줄 한강이 있어 외로운 줄도 모르고 고단함도 잊고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답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나 보다.
-<내 사랑 한강>에서
화자에게 있어 한강은 ‘영양수액을 공급받는 생명줄’이라 했다. 그런 한강이 그에게 ‘생수가 되어 마음을 적셔준다.’는 언술은 조국에 대한 애정이요, 공간애를 느끼게 한다. 이는 ‘공존’이라는 절대의 가치를 지니며, ‘한강의 기적’이란 상징을 통해 명멸하는 역사와 함께 변화와 발전도상에 있는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렇게 이 수필은 한강이란 대상에 시선을 정박하기 보다는 존재사태에 대한 심적 표상으로의 한강을 찬미하고 있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진리의 경우, 우리가 마주하는 존재사태가 의식에 의해 해석된 지향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사태로 바로 그 자체라고 언명했듯, 여기서는 공존의 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런 공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포토필리아 즉 공간애가 전제된다. 포토필리아는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topos’와 병적 애호를 뜻하는 philia의 합성어로 장소애, 공간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수필 <내 사랑 한강>은 바로 이런 지점에 놓요 있다고 하겠다.
조국이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든든해야 해외동포 생활이 수월하다. 십 여년 전에 있었던 엘에이 폭동 사건에서 본 것처럼 힘이 없어 억장이 무너지는 억울함을 당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식적으로는 한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엘에이 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현지 부근에서 사는 나는 알고 있다. 힘이 없는 민족이어서, 이민생활에서 오는 언어장벽 때문에 갖는 가슴에 서린 한(恨)을 긴 한숨으로 허공에 날려 보내 버려야 하는 억울한 희생자들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모든 것을 포용하며 뼛골이 아프도록 노력하면서 열심히 사는 선한 재미동포들의 아픈 가슴을, 내일의 기적을 바라보고 있는 한강이 오늘도 어루만져 주면서 위로해 주기에 그래도 위안을 받으면서 희생자들은 살고 있음을 안다.
-<내 사랑 한강>에서
문학은 이렇게 철학의 명제처럼 논리적인 언어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모순적이고 비약적인 언어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파괴되 내면을 조심스럽게 기우고, 피 흘리는 상처를 닦아내는 데 더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소용돌이치며 아우성 치고, 그러나 그 위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강처럼 인간의 온갖 모순된 삶을 싸안고 흘러간다. 그래 때로는 갇혀 있던 슬픔의 물꼬를 조금씩 틀수 있는게 문학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객관화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단순한 자기 존재에 그치지 않고 확대하고자 하는 안목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좀 더 견고하게 자신을 구축하는 작업을 통해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정 어린 자아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과 무관했던 대상에서 그 본질과 대상과의 상관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서 자신의 객관화가 구체화하게 된다. 수필문학은 이 경우, 특히 화자인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빌지지 않더라도 정순옥 수필에서는 그의 체험과 사유, 성품이 노출되고 있다.
예술작품은 ‘놀이’와 비슷하다. 놀이처럼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다.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이 삼각형의 놀이 속에서 독자는 늘 바뀌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놀이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진다. 작품이라 후세의 해석에 열려 있다. 따라서 진리란 시대마다 독자에게 새롭게 열린다. 수필 <재봉틀 노래>는 이런 놀이에 걸맞는다.
화자에겐 “도르록…도록” 하는 재봉틀의 소리를 노랫소리로 감응하고 있다. 그것도 사뭇 ‘흥겨운’ 노랫소리다. 한데 노랫소리에서 인생의 아름다운 꿈의 조각보를 만들고 있다. “우리 어머니 세대와 나의 세대 그리고 딸의 세대를 잇대어 주는 즐거움“이다. 이 작품의 화소인 ‘재봉틀’은 그저 사물이기 보다는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상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이런 대비적 착상은 의인화의 매체로서의 낯선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는 데서 이 수필의 장점이 된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재봉틀은 어머니의 사랑을 회상하는 매체이자, 작가 자신의 ‘창작’의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노고의 산물인 보자기야말로 작가 자신의 심혼을 담은 창작물에 비견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한 나의 인생은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간직한 안정된 삶이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고 있다. 어머니의 숙련된 바느질 솜씨는 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라는 것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봉틀로 바느질하신 어머니의 가정을 위한 헌신적인 인고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귀한 인생살이 꿈의 보자기를 만들어 내신 어머니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재봉틀 노래>에서
화자에게 이런 어머니가 있기에 그의 삶은 ‘사랑’이란 보자기로 짜깁기 되었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직조되어 ‘꿈의 보자기’가 되었을 일이다. 결미의 “도르륵 도록…도루록, 내 인생의 아름다운 꿈의 보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한 줄 한 줄 정성스럽게 박아가는 재봉틀 리듬 소리는 우리 어머니와 나 그리고 딸의 세대를 이어 주는 재봉틀 노랫소리가 되어 내 가슴을 유쾌하게 진동시킨다.”라는 진술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하는 작품이다.
수필 <커피 한 잔의 행복>을 보자. “코피 한 잔의 행복이 내 삶에 생기를 무척 북돋아 주는 것이.” 화자에게는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진다. 한 잔의 커피일망정 그것이 노숙자에게는 천금으로도 다할 수 없는 행복의 메시지일 수 있다. 자잘한 일상에 정박한 화자의 시선이 따뜻하다. ‘생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그런 생기를 잃은 이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목도한다. 그저 스쳐지나갈 일이지만, 화자에 이르면 그렇지 않다. 그저 측은지심이 아니다. 타자에의 애정이 아니고서는 이를 수 없는 지경이다. 수필은 이렇듯 진실과 애정을 담고 사물의 본질을 캐내야 한다. 로고스와 파토스, 감성과 이성을 조화시킬 때 비로소 인간다움은 꽃을 피우게 된다.
생기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인데, 태초에 창조주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성경에 쓰여 있다. 섭리에 따라 생기가 없으면 나는 다시금 흙으로 돌아감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동안에 생기가 소멸하지 않도록 무언가로 자꾸 보충해 주어야 하는데, 오늘은 새벽에 손에 들게 된 커피 한 잔이 새롭게 생기를 북돋아 줌을 느낀다. 커피 한 잔을 행복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오늘 하루도 꿈과 할 일이 많은 나의 생활에 감사하며, 나처럼 모닝커피를 찾는 힘없는 노숙자들도 생기를 얻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모두에게 더욱더 임하길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성탄절이 있는 계절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커피 한 잔의 행복>에서
커피 한 잔에 묻어나오는 화자의 진정성이 읽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수필은 인간 존재의 문제를 해명하고 존재에 천착하는 데에 있다. 인간학적 수필의 의의일 것이다. 이런 정서와 상상이 혼융하여 작가는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확연하게 한다. 메시지의 강렬함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결미의 “나의 손에 들고 있는 시니어 커피 한 잔이 신비롭게도 내 삶에 무한한 생기를 북돋아 주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차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향한다.”라는 대목이 사상의 정서화에 기여하고 있다.
어쩌면 수필작가 정순옥의 수필은 소박하다. 행간에 담겨 있는 겸손함이 그의 수필의 진정성일 것이다. 수필문학이 어차피 일상의 자잘함을 버리지 못할진데, 삶의 현장에서 일궈낸 소박한 마음밭이 독자들의 가슴에 닿아 잔잔한 감동을 줄 수만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수필은 이렇게 자기 영혼관의 만남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수필이 이런 영혼과의 만남을 불꽃으로 피워 올릴 수 있겠는가? 단순한 영혼에 대한 그 어떤 분석이나 통찰도 진실로 그의 영혼과 속삭인 뒤에 영감에 찬 것이 아니라면, 독자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적 자아의 고독한 영혼 깊숙이 자리한 자기 심령과의 속삭임으로 길어 올린 영감에 찬 내밀한 글을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작가의 깊은 사상과 만나게 된다. 한 마디로 정순옥의 수필은 파토스, 실존적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하겠다.
3. 나가는 말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 속에는 그 작품을 창조해 낸 저자의 남다른 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명작 속에는 적어도 그 저자의 생애가 농축되어 독자를 흡인함으로써 감동과 정서적 미감에 함몰하게 하는가 하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저자의 삶을 지각하게 하는 각성과 삶의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삶과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수필문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수필작가 정순옥의 수필을 통괄하는 창작적 기법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변화에 편승한 패러다임도, 실험적 기법도 찾기 어렵다. 그의 수필 쓰기는 전통적 문법에 충실하고 있다. 평범하고 잔잔한 문체에 작가적 톤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함에도 왜 그의 수필이 읽히게 하는가?
그 매력은 그렇다. 바로 작가의 진정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의 수필에서는 ‘철학적 지혜의 현실적 지체성’이라는 존재미학을 엿볼 수 있다.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미세한 풍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으며, 미셀 푸코의 존재 의미의 해석과 사물의 인식과 작가의 인식인 파토스적인 실존 인식이 형상화되어 독자를 감동하게 한다. 이런 경향성은 삶의 진정성이란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타인에 대한 낯섦에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그만의 공법일 것이다.
약력:
아호: 蒑池 /전북 정읍 출생/<미주 중앙일보> 창간 15주년기념 이민기 우수상 (1989)/⟪광야⟫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2003)/⟪한국수필⟫신인문학상 수상 (2009)/제26회 허난설헌문학상 수필부문 금상 (2012)/제25회 서울문예창작 문학상 (2013)/제4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상 (2013)/2017년 에세이포레 제2회 해외문학상 2018년 한국문협본부 공로상 2021 문학공감 문학상/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및 미주지회 이사/수필집 『기쁜 소식』(2010)『오매, 복사꽃 피네』(2013) 『베틀』(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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